엄마 둘, 남매 하나 <1, 2, 3. 삼초 통계학>
콜로라도 스키여행에서 뉴욕으로 돌아오는 기내 안. 이륙에 앞서 비상착륙을 대비한 산소호흡기와 튜브 사용법 안내가 한창이었다. 어두운 갈색 피부의 남자 승무원은 전체적인 설명을 끝낸 후 앞 좌석부터 뒷좌석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아이가 있는 좌석을 하나하나 짚으며 보호자를 향해 다시 한번 당부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좌석 쪽에 멈춘 그가 말했다.
“엄마가 누구든지 간에….”
갈 곳을 잃은 그의 손가락 끝이 와이프 쪽에서 내쪽으로 흔들리니 그의 손에 매달린 산소마스크도 사방으로 춤을 췄다.
“그러니까 엄마가 누구든지 간에…. 엄마가 먼저 산소마스크를 해야 돼요.”
“I see.”
내 짧은 대답이 끝나자마자 그가 다음 부모를 향해갔다. 뒤늦게 큭큭 웃음이 났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말실수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제대로 확인하고 운을 띄우고 싶어 한다. 웃음이 난 이유는 이 건들건들하고 건조한 승무원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떠올라서였다.
'I don’t care who you are and I don’t need to know, whoever the mom is. Wear that f*cking oxygen mask before you put them to kids.'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피로한 승무원의 이야기도 하나의 에피소드라고 생각하니 여운이 남았다.
하나, 둘, 셋 소화시간 3초
늘 커밍아웃을 하며 살다 보니 머릿속에 사람들의 반응이 모여 통계가 되기도 한다. 커밍아웃 후에 공통적인 패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됐다. 커밍아웃 직후 정적의 길이에 대한 것이다.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어 일반화하기는 싫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그렇게 된다.
한국: 5초 이상의 정적+동공지진+질문
미동부: 3초를 넘지 않는 정적
정적의 길이가 길 수록 우리 가족에 대한 내 설명도 길어져야 한다. 지역마다 다른 소화 속도 때문에 낯선 이에게 아내를 언급할 때 타인이 받아들이는 속도를 예상하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서부에는 정적이 없었다.
미서부: 정적 없음
애매하게 오래 이야기해야 하는 사이
눈 스포츠에 초보인 나는 그동안 빨리 성장하는 아이들의 스키 실력을 따라잡기 위해 삼 년째 스키와 스노보드를 번갈아 시도해 왔다. 그러다 이번 콜로라도 스키 여행부터는 스노보드에 정착하기로 마음먹고 삼일 동안 강습을 받기로 했다. 이렇게 우물쭈물하다가는 내년부터 실력이 부쩍 늘어버린 아이들의 뒤를 쫓다가 눈사람이 되어 산을 내려올 상황이 눈에 훤했다.
홀로 스노보드 강습을 받으며 며칠째 다른 종류의 강습인원들을 만나고 한나절 붙어 있다가 숙소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침묵을 지키고만 있을 수 없는 곤돌라 위에 사람들과 올라타면 꼼짝없이 십 오분을 이야기해야 한다. 다들 넉살 좋게 날씨 이야기로 시작해서 집, 가족, 직장, 친구부터 사돈의 팔촌 이야기까지 소재도 다양한 대화를 나눈다. 그럼에도 불편해질 만한 이야기는 슬쩍 잘도 넘어가는 서쪽 사람들을 보면서 두려움, 무관심, 존중이 뒤섞여 오래되면 이렇게 노련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69년 6월 28일 동성애자 탄압에 항의에 열렸던 대규모 집회 '스톤월 업라이징(Stonewall Uprising)'이 시작된 서부의 샌프란시스코와 가까운 콜로라도에서 (그래도 비행기로 4시간..) 정적이 지워진 곳의 삶을 엿봤다. 너무 좋다. 여전히 소수지만. 정말 이게 다구나. 허무했다. 정적이 없는 것을 바라며 산다니 사소하다. 그런데 이렇게 사소한 게 요원하니 어질어질하다. 한국에 방문하면 마음이 편하지만 사소한 일에 부담을 느낀다. 동부의 3초와 한국의 5초. 둘의 차이가 12시간의 시차만큼이나 길다. 세계 어디에서든 우리 모습 그대로 사회 속에서 아이를 자라게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유난히 긴 정적 끝에 이상한 질문이 나올까 봐 쓸데없이 말이 많아지는 사람이 된다. 성격 좋은 엄마, 이상한 여자일 것이다.
비상시에는 아이보다 어른이 먼저 산소마스크를 착용한다.
무신경하고 피로해 남의 삶에 최소한의 관심뿐인 승무원 같은 사람들이 가득한 한국에서의 슈퍼마켓이나 미용실 같은 편의시설에서 안내받는 상상 해 본다. 이 정도면 타인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 같아 편안하다. 산소마스크만 잘 쓰면 된다. 엄마가 누구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