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둘 남매 하나
어느덧 세월은 흐르고 흘러 뉴욕에 온 지 16년이 됐다. 그중 9년 동안 양육을 경험했다. 아이를 갖기 전 몇 년의 시간이 9년 못지않게 길게 느껴지는 이유는 고된 육아 때문인지, 호된 미국적응 때문인지, 여러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앳된 나를 그리워하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이곳에서 만난 아내와 나는 동성커플로 아이를 가졌고 며칠 전 첫 아이의 아홉 살 생일 파티가 열렸다. 그동안 비공개로 운영하는 개인 sns 계정에 한국인 엄마로서, 동성 커플로써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한 경험과 감상을 짧게 쓰면서 여느 전형적인 엄마들처럼 아이들의 일상을 공유했다. 보통은 사진을 설명하는 짧은 글 위주의 피드지만 마음이 요동칠 때면 긴 글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글의 길이와 상관없이 수없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 이유는,
1. 글을 쓴다는 것은 마음속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완성된 문장을 보면 너무 내밀한 부분을 털어놓은 것 같아 불편했다. 읽는 사람이 과하게 공유된 내밀함을 느끼지도 않는데. 나만의 문제에 가까웠다.
2. 레즈비언 모모(부모)로써 육아가 잘 되고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신생아 때는 하루에 열 번 기저귀를 처리했다. 횟수가 점점 줄어 엉덩이에서 기저귀를 완전히 떨어뜨릴 때까지 3년이 걸렸다. 다른 신생아의 부모들처럼 최소한 3개월 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밤낮이 바뀐 아이의 작은 위장을 채우는 일이 매시간 반복 됐다. 아이의 기본욕구에 반응하는 삶을 사는 것은 레즈비언 페어런팅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아주 느리게 낫는 중병을 간호하는 일로 정의하는 편이 나았다. 상관이 있다 한들 그럭저럭 잘 되고 있는 거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확신에 찬 문장을 쓰기에는 아이가 너무 어렸다.
3. 글에 불평, 불만, 자조가 너무 많았다. 아이 키우는 게 원래 힘든 일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없던 때라 희망이 없었다. 어쩌다 긍정적으로 써진 글은 내 마음과 관계가 없는 노력의 흔적일 뿐이었다.
4. 그리고 어떤 주제는 실제로 아주 개인적이고 과한 부분이 있었다.
아이들은 자라 각각 아홉 살, 다섯 살이 됐다. 그동안 코로나가 있었고 한국 방문도 수 차례 가졌다. 소규모의 한국인 커뮤니티에 속하면서 커밍아웃하는 일이 두려웠기 때문에 일부러 더 많은 커밍아웃을 하며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던 초기 몇 년이 지나갔다. 어떤 반응도 예상이 가능한 정도가 되자 게이 커뮤니티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다. 일반 사회 속에서 남들처럼 아이들을 이곳저곳에 실어 나르는 매일이 반복 됐다. 체조, 태권도, 피아노, 테니스, 수영, 생일파티, 놀이터, 가족단위의 여행과 아이의 물건을 사기 위해 가는 쇼핑센터, 학교에서 벌어지는 각종 행사,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의 전화 통화를 하는 주말. 내가 레즈비언인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일반사회 속 현생의 스케줄을 성실히 지켜냈다. 나는 정체성이 오락가락할 정도로 변한 세상에 있었지만 한국은 참 한결같았다. 여름 방학 동안 참관수업 문의를 위해 본가 근처의 기독교 산하 대안학교에 전화를 했지만 다른 부모님들의 눈이 있어서 안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동안 아이들의 하루를 책임지던 미니밴의 트렁크와 스케쥴러의 눈금 사이 어디쯤에서 잊혔던 정체성이 똘망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아, 한국에 기독교 단체라는 게 있었지, 거기서 하는 반대 집회라는 게 있었지, 시청광장 무지개 축제 때문에 늘 논란이 됐지. 그런데 내가 지금 그곳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전화를 걸어 참관 수업을 받고 싶다고 말한 거구나. 13시간의 시차 때문에 한국으로의 통화는 늘 자정이 넘은 시각에 이루어진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새벽, 고요한 거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수량이 모자라서 필라델피아에 사는 지인에게 부탁해 어렵게 배달해 온 의자. 그때도 나는 나의 운을 시험해 보려는 듯 뉴욕에 근접한 필라델피아와 버지니아 매장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지인의 손에 들려 배달된 의자에 앉을 때마다 우리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화기애애해졌다. 대부분의 대안학교가 기독교에서 운영된다는 사실을 여러가지를 알아보며 처음 접하게 됐다. 한국의 기독교 산하 대안학교에 동성애자 자녀의 청강을 문의하는 것도 의자의 재고를 문의하는 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나의 어리석음에 한숨 섞인 실소가 나왔다.
태평양 너머에서 열심히 아이들을 돌보는 삶을 살면서 시간이 흐르면 이런저런 좋은 소식도 들리겠거니 하는 안일한 생각이 9년째에 힘을 잃자 조금씩이라도 기록을 남기는 편이 좋겠다는 후회섞인 의지가 밀려왔다. 너무 내밀한 나를 마주하는 불편함이 크고, 여전히 레즈비언 페어런팅에 대해선 물음표 이고, 감사가 부족한 문장에 묻지도 않은 속이야기를 늘어 놓을 수도 있지. 나도 이번 생이 처음이고 글쓰기 전문가도 아닌데. 나와 같은 실수를 남발하는 타인을 목격 하며 안도감을 느끼는 소시민의 관점에서, 내가 늘어놓는 어떤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안식 그 자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썼다 지웠다, 드디어 하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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