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운이 좋게도 배울 점이 많은 상사와 함께 일하고 있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력도 화려하다. 전략컨설팅펌 입사 후 초고속 승진에 최연소 이것도 하시고, 저것도 하시고, 뭘 많이 하셨는데 다 까먹어버렸네... 어쨌든! 굉장한 분인데, 이 분과 2년여 동안 같이 일하면서 자주 말씀 하시는 패턴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보통은 갈굴 때 하는 말씀인데 워낙 자주 듣다 보니 귀에도 쏙쏙 박히고 그 나름의 교훈도 있는 것이 나만 알기 아까워서 공유한다.
1. 이거 뭔 겨울에 눈 내리는 소리야
말 그대로 당연한 소리 하면 나오는 피드백. 내용 없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을 뭔가 있는 것처럼 할 때 매우 높은 확률로 들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내년 매출 성장을 위해서는 전반적인 영업 시스템 개선과 더불어 고객사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류의 이야기이다. 딱 들어도 뭘 어떻게 하겠다는 둥의 내용이 다 빠진 당연한 말. 만약 내 상사를 괴롭히고 싶다면 이런 얘기를 프레젠테이션으로 수십 장 정도 만들어가서 중간에 못 나가게 묶어두고 계속 얘기하면 된다.
2. 콧물 날 때 콧물약 먹으란 말이잖아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현상에만 초점을 맞춘 해결책을 이야기할 때 들을 수 있다. 콧물이 나는 이유가 감기일 수도 있고, 알레르기일 수도 있고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단순히 콧물 난다고 콧물약 먹으라고 하는 건 실제 이유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이다. 회사로 예를 들면, 매출이 안 나오니까 영업 담당자 다 갈아치웁시다 정도가 될 수 있겠다.
3. 하이 레벨로만 말하지 마 / 내용이 없잖아 / 뭐를 어떻게 하자는 건데
보통 이 말은 "뭔 소리야? 뭔 말인지 모르겠어" 이후에 나온다. 여기 오기 전엔 몰랐던 개념인데 '하이 레벨'로 이야기를 한다는 건 현업에서의 현황을 세밀하게 파악하고 이야기 나눈다기보다는, 보다 큰 시각에서 구조적이거나 개념적인 부분을 다룬다는 것이다. 물론 하이 레벨로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는데, 자칫 잘못하면 내용이 없는 이야기, 앞서 1번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겨울에 눈 내리는 당연한 소리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특정 기술을 가지고 제안서를 써야 하는데, '이 기술은 user-frinedly 한 인터페이스와 advanced 된 기술로 기존의 XX 한 문제를 해결한다'라는 써가면 100% '뭐가 뭘 어떻게 해결을 하는데? 내용이 없잖아 내용이!'라는 사자후를 들을 수 있다. 이 예시에서는 기존의 XX 한 문제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이고 우리 기술이 그 원인을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개선을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인지, AS-IS와 TO-BE가 어떻게 바뀌는 것인지, 부족하면 도식도 넣어주고 하는 정도의 '내용'이 있어야 한다. 사실 이 부분에서 가장 많이 혼났지만 배우기도 가장 많이 배운 부분이다.
4. 말 안 할 거면 들어오지 마 or 나가
회사 와서 일주일도 안 돼서 들었던 말. 미팅 들어가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끝나자마자 '이럴 거면 그냥 들어오지 마세요'라고 하시길래 완전 쫄았다. 회의에 들어와서 말을 안 한다는 건 value add를 안 한다는 거고, 그럴 거면 아예 안 들어오는 게 낫다는 것이다. 특히 외부 미팅에서 한 마디도 안 한다는 건 그냥 멍청이 인증이라고... 그 이후 한동안은 미팅 들어가면 '무조건 한 마디 해야 돼.. 한 마디는 해야 돼...'라고 속으로 염불을 외면서 불안에 떨었었다. 그런데 이런 압박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미팅 들어가기 전엔 무조건 관련 내용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죽어도 한 마디는 해야 하니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더라. 당연히 내용을 생각하고 들어가니 아젠다를 좀 더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갈 수도 있었다. 결국 해피 엔딩! 다들 한 마디씩은 합시다.
5. 구조화가 안되잖아 구조화가 / 불렛포인트가 안되잖아 / 바바라 민토 책 읽었어?
우리 팀엔 성경책 수준의 위상을 가진 책이 있다. '바바라 민토, 논리의 기술'
직무 막론하고 추천한다. 읽고 나면 보스가 왜 저 이야기하는지 자동 이해 된다.
6. 모르면 모른다고 해 / 아는 척하지 마
사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게 당연한데, 회사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만 해도 이상하게 그 말이 뱉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괜히 아는 척하고 얼버무리다가, 질문 한 두 번에 모르는 거 들통나서 먼지 나게 털리기도 했다. 물론 아는 척한다는 게 독인 건 안다. 모르는 것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지고, 재수 없으면 아는 척한 것 때문에 잘못된 의사결정에 이르거나 더 큰 이슈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이 모르는 걸 아는 척하는 건, 모른다고 하면 내가 바보처럼 보일까 봐, 혹은 왜 그것도 모르냐고 질책받을까 봐가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모르는 걸 아는 척할 때 크게 혼내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고 알아보겠다고 할 때 기다려주는 이 문화가 상사의 샤우팅이 참 감사하다.
7. 혁신적이네?
주의! 칭찬이 아니다! 만들어 온 슬라이드 리뷰하면서 종종 하는 말씀인데, 보통의 장표에서는 하지 않을 법한 희한한 시도를 해오면 '창의', '독창' 정도의 언뜻 들으면 내가 잘했나 착각할 수 있을 만한 느낌의 워딩으로 조지시는 편이다. 예를 들면, 장표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을 흑백으로 두고, 다른 엉뚱한 데에 채색을 해놓을 때라던지, 시간에 따라 바뀌는 단계라던지, 그래프를 그려올 때 시간 순서를 위가 아닌 아래에 둔다던지, 내가 왜 그랬을까 싶긴 한데 이 부분도 5번 '바바라 민토, 논리의 기술' 읽으며 개선 중이다. 기다려주세요.
이 밖에도 어록이 많지만 나중에 또 차차 풀어봐야겠다. 회사에서 이렇게 배울 점이 많은 분을 상사로 모실 수 있다는 게 행운이라고 느끼는 요즘이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새해에는 이 레벨은 졸업하고 더 고차원적으로 털리면서 또 한 번 많이 배울 수 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