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甫竪 一日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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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이보(異甫)는 늦잠을 잤다.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기 직전에서야 잠이 들었으니 오늘도 이보는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도 수행한 셈이 되었다지만 누가 그 불침의 셈을 치러주는 일은 없으니 자만(自慢)스레 자족(自足)할 뿐이다. 먼 산 너머로 동이 트려고 할 때 이보는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수배령이 떨어진 것도 아니면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싶었는지 마지막 순발력을 발휘했다. 조금 지나면 어머니의 기침이 있을 터이고 밤새 불을 켜두었다는 핀잔과 담배냄새가 빠지질 않는다는 잔소리를 듣는 게 두려웠을 지도 모른다. 혁명은 산적한 두려움들을 뚫고 나가야 하는 일일 터인데 가장 가까운 두려움에도 이보는 매번 절망한다. 하지만 절망은 잠의 공습에 밀려 사라져버리고 이보는 긴 회색을 지나 깜깜한 아래로 쑥 떨어지는 그 잠의 통로를 서둘러 내려갔다.
어떤 꿈이었는지 기억나지를 않았다. 왜 눈이 뜨였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 아침이었다. 아침일 리가 없지만 눈을 떴으니 그렇게 부를 밖에 이보는 도리 없다는 도리질을 치며 머리맡을 뒤적여 붉은 담배 곽을 쥐었다. 이불을 동그랗게 말아 누에 꼴로 앉아 담배를 피운다. 왼손만 홀로 이불사이로 삐져나와 물 컵이며 재떨이와 라이터 따위를 이불에 감춰진 발 앞에 모아놓았다. 날이 추운 모양이다. 흰 연기가 목구멍아래 긴 어둠속으로 들어간다. 이런 표현은 이보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간밤에 읽은 바보들의 수다 탓일 거라고 들어갔던 흰 연기를 검은 입 밖으로 꺼내며 궁시렁댄다. 희였던 연기는 회색으로 변해버렸다. 가능한 읽지 말아야한다는 약속을 또 어기고 말았다. 하지만 약속은 깨지기 위한 것이 아니던가? 지키기 위한 것이었나? 그럴 리가 없다. 약속이란 분명 깨지기 위한 것일 거라고 다짐하며 일어섰다.
어인 일인지 어머니가 보이지를 않는다. 식탁에 차려진 밥상을 산발한 머리로 들이밀다가 론네펠트의 레몬 스카이를 다 마셨나하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요즘 이보는 독일 허브 차 회사인 론네펠트의 레몬 스카이라는 허브 차에 빠져있다. 유독 이보는 레몬을 좋아한다. 도대체 레몬이란 놈은 전생에 어떤 인연이기에 내게서 떨어지지를 않는 걸까하는 생각을 이보는 머리를 긁던 손을 코 안으로 쑤시며 멋대로 일으켰다. 쨌든 레몬 스카이는 없었다.
간밤에 사막을 건너 날아온 이보는 오늘이 며칠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음에도 오늘을 21일이라 하자고 마음에 적었다. 오늘은 21일이고 도서관에 가야한다. 출근할 곳이 없어진 이보는 최근 도서관을 회사삼아 출근길을 삼기로 했었고 사막으로 떠나기 전까지 열흘간을 빼먹지 않고 출근하여 겨우 도서관과 친해진 터였다. 도서관은 조금 추웠지만 어느 카페보다 조용했고 서둘러야 할 까닭이 없는 곳이었다. 구내식당의 백반이 먹을 만큼 값이 쌌고 다양한 종류의 방문자들은 구경거리가 될 만도 했다. 구내식당의 높은 천정을 떠올리다 으슬으슬 추워진 이보는 욕실에 뜨거운 물을 틀어두고 다시 담배를 물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커피를 꺼냈다. 사막에서 얻어온 아로마 덩어리를 욕조 속에 던져 넣었다가 급히 꺼내어 비닐 껍질을 까서 버리고 도로 물속에 던져 넣었다. 거품이 보글거리며 아로마 덩이가 물에 풀어진다. 이보는 풀어지는 흰 덩어리를 보며 자신도 저렇게 잘 녹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공상을 잠시라도 꿈꾼다. 그러고 보니 이보는 어제 아니 오늘 조금 전에 식어버린 머리맡에서 꾸었던 꿈 안에서 아로마 덩어리 같은 달을 보았던 것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단지 그 달이 한 개가 아니라 네 개였던 것 같은 기억이 있어서 왜 네 개씩이나 되지? 하고 꽁초를 달래며 한 모금에 커피를 콧물처럼 훌쩍이고는 이내 욕조 안에서의 얕은 잠수를 실시했다.
물속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좋다. 언제나 물속은 고요하다. 항상 물 안에서는 혼자여도 편안하다고 이보는 슬쩍 멋쩍은 미소를 어울리지 않게 띄었다. 그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라는 불안이 물결처럼 밀려와 이보는 벌떡 일어서 서둘러 젖은 몸을 닦았다.
카페는 3층이었고 Y대학 정문 앞이 훤히 내다보이는 자리에 이보는 주문대기용 진동 벨을 들고 앉았다. 이삼층이 모두 한 카페인데 북적이는 아래층에 비해 3층에는 자리가 널널했다. 그 훤히 보이는 대학의 입구를 내려다보던 이보는 불연히도 부끄러워졌다. 고백을 하자면 이보는 삼층의 창가에서 내려다본다는 것이 마치 잠든 여자의 벌려진 가랑이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보의 낯이 달아올랐다.
“아! 늦었죠?”
“어 왔구나. 앉아.”
“그래도 막 뛰었어요.”
“뛰지 말라니까. 뛰면 넘어져. 날도 추운데 걸어 다니자.”
그린 티 라테는 반이 남았고 커피는 비었다.
“다음 작품은 어떤 거예요?”
이보는 A를 바라보다가 주저하면서도 용기를 낸다.
“내가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궁금해요.”
“으흠, 이건 그냥 내 개인적인 생각인 거구, 참 이걸 말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보는 A를 다시 살핀다.
“말할게. 진심이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고. 진짜 솔직하게 말하는 거야. 진심으로.......난 말이야...그러니까. 너의 벗은 몸을 보고 싶어. 그 너의 벗은 몸을 막 읽고 싶고 막 읽으면서 입을 맞추고 싶어. 그러면 입을 맞추고 난 다음 바로 그 다음에 너의 표정을 들을 수 있고 난 또 너랑 막 하고 싶어. 그런 너의 표정을 또 막 듣고 막 읽고 막 찍고 막하고 싶다. 그런 걸......하고, 해보고 싶어.”
아차, 이보도 이보의 말을 듣는 A도 아무 말이 없이 마주보고만 있다. 이보는 뭔가 불안해서 자꾸 눈을 찡긋거리며 A를 향해 대답을 구하지만 도무지 A는 아무 반응도 없다. 혹시 A가 바라보고 있는 이보가 A의 멍해진 표정에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이 A는 이보를 계속 바라보고만 있었다. A가 소금기둥이라도 된 거냐. 기다려보자. 이보는 초조해하며 A에게 걸렸던 주문이 풀리기를 기다린다. A의 눈이 말이 아닌 말을 이제 막 시작하려했고 그제야 이보는 자신의 솔직함이란 바보스런 실수였음을 후회해야했다.
“아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데, 아 이건 아 말을 하는 게 아닌데, 쪽팔리게, 아니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내가 전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아니구 뭐냐면.”
A의 말이 눈에서 흘러나와 테이블 위에 쾅하고 떨어졌다. 우주 대충돌의 순간이란 이런 거일 거라고 이보는 주머니 속 피디수첩을 꼭 쥐며 생각했다. A가 통곡을 한다.
“A야 진짜 미안하다. 나는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나는 나이도 많고 뭐 그게 그치? 저기 그냥 못들은 걸로 해주라. 진짜 미안하고 내가 지금 그냥 갈게. 내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어. 기억 속에서 나를 지워. 오늘 들은 말도 다 잊어버리고. 나 같은 인간은 없다고 원래부터 없었다고. 저기 나 갈게. 진짜 미안해, 응? 내가 연락할게. 아니 내가 연락 안할게.”
이보는 울고 있는 A를 두고 나간다. A는 테이블위에 얼굴을 박고 소리 내어 울어버린다.
넓은 창밖으로 계단을 내려선 이보가 허둥대다가 서둘러 Y대학 입구를 향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가방을 메려는 건지 들려는 건지 어정쩡한 게 이보의 뒷모습이 급하다.
“이러면 안 되지. 왜 이러니 진짜로 그걸 말해버리면 어휴. 이런 건 혁명이 아니야.”
중얼거리며 A에게 토했던 고백을 후회하는 이보는 광장 앞에서 운동장을 찾다가 놀랐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언제 이렇게 바뀌었는지 활주로 같은 광장 앞에 선 이보는 잠깐 멍청해졌고 숨고 싶던 Y대학 그 운동장의 어두운 통로를 아쉬워할 뿐이었다. 운동장은 사라지고 그곳은 식당, 도서관, 극장, 서점 등으로 이어진 언제 도착하는 지도 모를 우주선을 위한 활주로와 비행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활주로는 어디나 비슷하게 강한 바람을 소유하고 있다. 강풍에 밀려난 이보의 광풍(狂風)한 생각들이 활주로 위의 플라타너스 잎에 끼어 뒹굴며 어제의 종합주가처럼 폭락했다.
“이런! 기도를 해야 돼, 기도를.”
이보는 방향을 틀어 한 번인가 가본 적이 있는 Y대학의 예배당을 향해 길고 높게 뻗은 계단을 구원처럼 찾아 올랐다.
이보에게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예배당 안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이 말은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긴 하지만 이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해도, 설령 예배중이라도 좋을 걸음으로 앞쪽 단상을 향해 쭉쭉 걸어 나갔다. 가방을 여전히 한쪽 팔에 어정쩡하게 걸고 이보는 예배당의 중간 의자에 엉덩이를 끼우고 두 손을 모았다. 나무 십자가 뒤로 오색의 유리창너머로 빛이 반짝였고 어두운 십자가를 바라보던 이보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어요. 이게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 말하지 말걸 말하면 안 되는 데. 왜 안 말렸어요? 이제 다 끝나버리겠죠? 아아...혁명은 아직 준비되지도 않았는데. 실수였어. 실수였다는 걸 알아야 해요. 이런 시작이 아니었는데 첫 장면부터 틀렸어. 아아.”
진정한 참회였다. 이보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이 핑 도는 걸 애써 참았다. 코가 멍멍해졌고 몸이 긴장되어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일까? 이보는 그만 실례를 했다. 방귀가 나와 버린 것이다. 한 번 더. 참지 못했다. 이보는 적잖이 당황하여 감았던 눈을 떠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아후~ 저기 좀 이런…….”
으흡! 이보는 황급히 괄약근을 조이고 일어서 잰 걸음으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예배당에 그의 발소리가 약간의 향기와 더불어 크게 남았다. 엉덩이가 축축해진 게 분명했다.
비가 오려는 지 마른 화장실에 천둥이 울린다. 얼굴이 벌게진 이보가 힘을 쓰고 용을 쓴다. 이보가 언제 이런 힘과 용을 써 보았던가? 항상 어제보다 오늘이 힘들다는 건 이런 것인가 보다고 핏줄을 끌어 모은 이보는 왼손에 든 휴지를 보며 떠올렸다.
“하아! 이제 연락도 안하겠지? 전화해도 받지 않을 거야? 진짜 말하지 말걸, 말하지 말지.”
<금연구역> 푯말을 바라보던 전보다 한결 편한 표정의 이보는 아주 깊게 담배를 빨고 멍하니 <금연>의 의미와 <구역>의 의미에 대해 연구해보았다. 그러다가 떠오르는 이름들을 그저 떠올렸고 그 사람들의 지금을 공상했고 그들의 흡연을 추정하기에 이르자 괜한 짓이라는 결론을 내고는 똥을 닦았다. 이보는 일어서 변기 물을 내리려다가 문득 변기 안을 돌아보았다. 도대체 예배당에서 그리도 다급하게 이보의 배를 아프게 하고 이보로 하여금 참회의 순간을 스스로 져버리게 한 그것. 바로 이보가 배설한 것은 무엇인가.
변기 안에서는 맑은 물에 산 낙지 한 마리가 꿈틀대고 있었다. 한쪽 발은 변기 밖으로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반대쪽 끄트머리의 발은 깊은 구멍 속으로 밀어 넣는 게 보였다. 이보는 이걸 어째야 하는 지 꺼내 줘야하는 지 밀어 넣어야 하는 지 버둥거리는 산 낙지를 보며 자신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전화기를 꺼내 119를 불러야 하나 하며 고민을 하다가 변기 물을 내려버렸다. 왼손은 전화기를 들고 오른손은 변기 꼭지를 누른 것이다. 그야말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이보 씨는 해내었다. 그 잠깐 동안. 이보 씨는 감히 혁명이란 것을 보았다. 이건 뭔가 혁명적이다. 그 자체 아닌가. 이보는 가슴이 뛰었고 가슴이 뛰어서 잠시 그렇게 있기로 했다. 화장실은 고요했고 적막했지만 적조하지 않았고 뜨거웠다.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 전화기를 든 이보의 왼손이 심하게 떨렸다.
“응, 오늘이지? 알아 갈게. 아니 원래는 같이 가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혼자. 응? 여기? 여기가 어디냐면…….좀 울리지? 넌 어딘데? 극장이구나.”
흰 변기는 조금 전 산 낙지 한 마리를 삼켜버린 변기는 시침을 뚝 떼고 그저 새로 흘러내려온 물을 아주 조금 찰랑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참 순결한 변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