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Death Valley

11화. 불타는 산의 분노

by 시더로즈



제11화: 불타는 산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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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불타고 있었다


용서의 황금빛 정원을 떠나자,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앞에는 거대한 산이 솟아있었는데, 그 산 전체가 붉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나무가 타는 불이 아니었다. 뭔가 더 원초적이고 강렬한 불이었다.

분노의 불이었다.


공기가 뜨거웠다.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뜨겁고 무거웠다. 그리고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왔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소리 같았다.


무서웠다.


지금까지의 여행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는데, 이 분노의 산은 너무나 원시적이고 압도적이었다.


산기슭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땅도 뜨거웠다. 그곳에는 붉은 꽃들이 피어있었는데, 꽃잎들이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가시가 엄청났다. 지금까지 본 어떤 가시보다도 크고 날카로웠다. 마치 창끝 같았다.


"누구야! 허락도 없이 내 영역에 들어오는 건!"


폭발하는 듯한 목소리가 산 전체에 울려퍼졌다. 가장 큰 붉은 꽃에서 불꽃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

그는 거대했다. 온몸이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용암처럼 흘러내렸다. 눈은 타오르는 석탄 같았고, 숨을 쉴 때마다 불똥이 튀었다.


"나는 분노야! 내 산에 함부로 오지 마!"


나는 급히 뒤로 물러섰다. 분노의 열기가 너무 강해서 날개가 그을릴 것 같았다.

"미안해! 무례하게 굴려던 건 아니야!"

"그럼 뭐야? 나를 구경하러 온 거야? 아니면 나를 없애려고 온 거야?"

분노는 계속 화를 냈다. 그의 분노가 커질수록 산의 불길도 더 치솟았다.

"모든 존재들이 나를 나쁘다고 해! 없애야 할 감정이라고 해! 하지만 나도 필요한 존재야!"

분노의 절규에는 깊은 상처가 담겨 있었다. 무서우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웠다.

"나...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어서 왔어."


분노의 불길이 잠시 줄어들었다.


"이해하고 싶다고? 진짜?"


"응. 지금까지 많은 감정들을 만났는데, 모두 각자의 역할과 의미가 있었어. 너도 분명 그럴 거야."

분노가 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금씩 화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정말... 나를 이해하려고 하는 거야?"

"그래."


분노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들어와. 하지만 조심해. 내 영역은 정말 위험해."

분노는 나를 산 중턱으로 안내했다. 가시 사이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신기하게도 분노가 함께 있으니 가시들이 조금 비켜주었다.

"이 가시들이 보이지? 이것들이 내가 만든 경계야."

"경계?"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야. 그리고 소중한 것들을 지키는 방패이기도 하고."


나는 그 많은 가시들을 바라보았다. 정말 날카롭고 위험해 보였다.

"사람들은 나를 파괴적이라고 해." 분노가 슬프게 말했다. "하지만 나도 보호하는 역할을 해."

"보호한다고?"


"그럼! 누군가 내 소중한 것들을 해치려 할 때, 나는 일어나서 '안 돼!'라고 외쳐. 그리고 맞서 싸워."

산 중턱에는 여러 종류의 붉은 꽃들이 있었다. 각각에서 다른 존재들이 나타났다.

"분노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첫 번째 꽃에서 나타난 정의로운 분노가 말했다.


"나는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일어나는 분노야. 옳지 않은 것에 맞서는 힘이지."

두 번째 꽃에서 나타난 보호하는 분노가 말했다.

"나는 사랑하는 것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일어나는 분노야. 지키려는 본능이지."

세 번째 꽃에서 나타난 좌절의 분노가 말했다.

"나는 막혔을 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분노야. 변화를 만드는 에너지를 주지."

하지만 산 한쪽에는 더 어둡고 뒤틀린 부분이 있었다.

"저곳에는 파괴적인 분노들이 살고 있어." 분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파괴적인 분노?"


"방향을 잃은 분노들이야. 무엇에 화가 났는지도 모르고, 그냥 모든 것을 부수려고 해."


그곳에서는 검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연기에서는 무서운 기운이 느껴졌다.

"나도 조심해야 해." 분노가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너무 커지면 저들처럼 될 수 있거든."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지혜가 필요해. 그리고 방향이 필요해."


산 정상 쪽을 가리키며 분노가 말했다.

"저기 정의가 있어. 내 파트너야."

산 정상에는 파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붉은 불꽃과는 다른, 차갑고 맑은 불꽃이었다.

"정의는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흐르도록 도와줘. 무엇에 화내야 하고, 어떻게 그 화를 표현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우리는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가파르고 힘들었지만, 분노가 길을 안내해주었다.

정상에서 파란 불꽃의 존재가 나타났다. 그는 분노와 대조적으로 차분하고 냉정했다.

"안녕, 나비야. 나는 정의야."

"안녕, 정의야."

"분노가 너에게 우리 관계를 설명했구나. 맞아, 나는 분노의 길잡이야."

"길잡이?"

정의가 고개를 끄덤였다.

"분노 혼자서는 방향을 잃기 쉬워. 때로는 엉뚱한 곳에 화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정도를 넘기도 하지. 하지만 내가 함께 있으면 분노는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

"어떻게?"

"정의로운 분노만 허락하는 거야. 진짜 부당한 일에만 화를 내도록. 그리고 적절한 수준에서 멈추도록."

분노가 덧붙였다.

"정의와 함께 있을 때의 내 모습을 봐."

분노와 정의가 손을 잡자, 분노의 불꽃이 달라졌다. 여전히 뜨겁지만, 더 안정적이고 통제된 불꽃이었다. 파괴적이지 않은, 보호를 위한 불꽃이었다.

"이제 우리의 꿀을 마셔봐."

두 존재가 함께 만든 꽃에 입을 댔다. 매운맛이었다. 하지만 나쁜 매운맛이 아니라, 정신이 번쩍 드는 매운맛이었다.

그리고 마음속에 단단한 힘이 생겼다. 부당한 것에 맞설 수 있는 용기.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는 힘. 하지만 동시에 절제할 줄 아는 지혜도 함께 생겼다.

이것이 정의로운 분노의 꿀이구나.


"어때?"


"신기해. 힘이 생기는데, 동시에 마음도 차분해져."


"그게 진짜 분노의 힘이야." 분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파괴가 아닌 보호를 위한 힘."

정의가 덧붙였다.


"분노는 나쁜 감정이 아니야. 문제는 분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야."


"어떻게 표현해야 해?"


"건설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냥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산 곳곳에서 다른 존재들이 나타났다.


"나는 경계 설정이야."


"나는 자기 옹호야."


"나는 변화의 에너지야."


모두 분노의 건설적인 면들이었다.


"분노는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줘." 경계 설정이 말했다. "무엇이 옳지 않은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알려주지."


"그리고 그것을 바꿀 에너지도 줘." 변화의 에너지가 덧붙였다.

나는 일곱 번째 꿀을 얻었다.정의와 보호의 꿀.


"고마워, 분노야, 정의야. 분노의 진정한 의미를 배웠어."


"천만에. 하지만 조심해. 분노는 강력한 힘이야. 함부로 사용하지 마."


분노가 산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어둠이 깔린 깊은 골짜기가 보였다.


"다음에는 두려움을 만날 거야. 내가 외향적인 감정이라면, 두려움은 내향적인 감정이야. 조심해, 두려움은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어려워."


분노의 산을 떠나며, 나는 뒤돌아보았다. 불타는 산이 여전히 웅장했지만, 이제는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든든한 수호자 같았다.


분노도 나를 보호해주는 힘이었다. 이제 그것을 알았다.




제12화:어둠의 동굴 속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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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모든 것을 삼키고 있었다.

분노의 불타는 산을 떠나자,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붉은 불길의 열기는 사라지고, 대신 차가운 공기가 몸을 감쌌다. 그리고 앞에는 깊고 어두운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동굴 입구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기운은 차가우면서도 끈적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나를 향해 뻗어나왔다.

들어가기 싫었다.

본능적으로 몸이 뒤로 물러났다. 지금까지의 여행 중 가장 가기 싫은 곳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다. 이곳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동굴 입구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안을 들여다보니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다.

"들어와도 괜찮아."

조용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누... 누구야?"

"나는 두려움이야.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그 감정."

"두려움이라고? 어디에 있어?"

"여기, 저기, 모든 곳에. 두려움은 모습이 일정하지 않거든."

정말로 그랬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형체들이 계속 변하고 있었다. 때로는 커다란 그림자 같았고, 때로는 작은 점들의 집합 같았다.

"겁내지 마. 나는 네 적이 아니야."

"하지만... 무서워."

"당연해. 그게 정상이야.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나는 조금씩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발밑에는 부드러운 이끼들이 깔려 있었고,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라색 꽃들이 피어있는 것이 보였다. 제비꽃 같았지만, 평소보다 훨씬 어둡고 신비로운 색깔이었다.

"저 꽃들이 너야?"

"그 중 일부지. 나는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어."

가장 큰 제비꽃에 다가가자, 그 속에서 어둠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지만, 눈빛은 의외로 따뜻했다.

"안녕, 나비야.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지?"

"응... 정말 무서웠어. 지금도 무서워."

"미안해. 하지만 그 두려움이 너를 보호하고 있다는 걸 알아?"

"보호한다고?"

두려움이 고개를 끄덤였다.

"만약 두려움이 없다면? 높은 곳에서도 뛰어내리고, 위험한 것도 만지고, 해로운 것도 먹을 거야. 두려움은 생존을 위한 경보 시스템이야."

말을 들어보니 그럴듯했다. 분노가 외부의 위험에 맞서는 힘이라면, 두려움은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센서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두려움이 너무 커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잖아."

"맞아. 그게 내 문제야. 때로는 과잉보호를 하게 돼. 실제로는 위험하지 않은 것까지 무서워하게 만들지."

두려움은 동굴 깊숙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더 짙은 어둠이 있었다.

"저곳에는 내 형들이 살고 있어. 공포와 절망이야. 그들은 나보다 훨씬 강해."

"형들?"

"응. 나는 막내야. 가장 온순한 두려움이지. 하지만 내가 계속 커지면 저들처럼 될 수 있어."

나는 오싹했다. 지금도 충분히 무서운데, 더 무서운 존재들이 있다니.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나는 너를 저들에게 데려가지 않을 거야. 대신 다른 존재를 소개해줄게."

두려움이 나를 동굴 반대편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작은 촛불 같은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황금빛 들국화였다.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저기 용기가 있어."

"용기?"

촛불 같은 들국화에서 작지만 단단한 존재가 나타났다. 키는 작았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안녕, 나비야. 나는 용기야."

"안녕, 용기야. 두려움과 너는 어떤 관계야?"

용기가 미소지었다.

"사람들은 용기가 두려움이 없는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건 틀렸어. 진짜 용기는 두려워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두려워하면서도?"

"맞아." 두려움이 대답했다. "용기 없는 두려움은 마비가 되고, 두려움 없는 용기는 무모함이 돼. 우리는 함께 있을 때 의미가 있어."

두 존재가 가까이 다가오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두려움의 어둠과 용기의 빛이 만나서 은은한 회색빛을 만들어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균형 잡힌 색깔이었다.

"우리의 꿀을 마셔봐."

나는 두 존재가 함께 만든 꽃에 입을 대었다. 쓰면서도 달콤한, 복잡한 맛이었다. 그리고 마음속에 새로운 힘이 생겼다.

여전히 무서웠다. 하지만 그 무서움이 나를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더 현명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이 지혜로운 용기의 꿀이구나.

"어때?"

"신기해. 무서운데 무섭지 않아."

"그게 맞아." 용기가 말했다. "두려움을 인정하되,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 그게 진짜 용기야."

두려움이 덧붙였다.

"그리고 기억해. 두려움을 느끼는 건 나약한 게 아니야. 오히려 살아있다는 증거야.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에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거거든."

나는 고개를 끄덤였다. 정말 그랬다. 아무것도 소중하지 않다면 두려울 것도 없을 테니까.

동굴 한쪽에서 다른 존재들이 나타났다.

"나는 신중함이야."

"나는 경계심이야."

"나는 생존 본능이야."

모두 두려움의 건설적인 면들이었다.

"두려움은 우리를 더 조심스럽게 만들어." 신중함이 말했다.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지."

"그리고 위험을 미리 감지하게 해줘." 경계심이 덧붙였다.

생존 본능이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두려움이 우리를 살아있게 해준다는 거야. 적절한 두려움은 생존에 필수적이야."

하지만 동굴 깊은 곳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나는 과도한 두려움이야. 모든 것이 위험해 보여."

"나는 공황이야. 두려움이 통제를 벗어났을 때의 모습이지."

두려움이 그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은 내가 조심해야 하는 부분들이야. 두려움도 적절해야 해."

"어떻게 적절하게 유지해?"

용기가 대답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거야. 정말 위험한 것과 그냥 새로운 것을 구별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

두려움이 덧붙였다.

"그리고 혼자 두려워하지 마. 믿을 만한 사람과 함께하면 두려움도 줄어들어."

동굴 끝쪽에서 또 다른 빛이 보였다.

"저기 희망이 있어." 두려움이 말했다. "내 친구야."

"희망이 여기에?"

"그래. 두려움과 희망은 함께 다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는 곳에는 미래에 대한 기대도 있거든."

정말로 동굴 끝에서 희망의 노란 빛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두려움은 현재 우리를 보호하고, 희망은 미래로 나아갈 힘을 줘. 둘 다 필요해."

나는 여덟 번째 꿀을 얻었다.지혜로운 용기의 꿀.

"고마워, 두려움아, 용기야. 무서워하면서도 용감할 수 있다는 걸 배웠어."

"천만에. 앞으로 더 어려운 길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하지만 이제 너는 두려움과 함께 걸을 수 있어."

두려움이 동굴 밖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푸른빛이 보였다.

"다음에는 슬픔을 만날 거야. 가장 깊은 감정이지. 준비해."

어둠의 동굴을 떠나기 전, 나는 뒤돌아보았다. 그곳은 여전히 어둡고 무서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둠 속에 지혜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려움은 나를 막는 벽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였다.




제 13화. 깊은 바다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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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두려움의 어둠 동굴을 벗어나자, 눈앞에 거대한 바다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 바다는 보통의 바다가 아니었다. 물빛이 깊고 진한 파란색이었고, 그 안에는 무수한 기억들이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했다.


바람도 없고, 파도도 없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고요함이었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는 말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스며들어 있었다.


바다 위에는 작은 섬 하나가 떠 있었다. 그 섬에는 푸른 꽃들이 피어있었다. 물망초였다.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크고, 색깔도 더 깊었다.


섬에 내려앉자, 발밑의 땅이 부드럽고 축축했다. 마치 눈물에 젖은 것 같았다.


"안녕."


조용하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무한한 깊이가 담겨 있었다. 가장 큰 물망초에서 신비로운 존재가 나타났다.


그녀는 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바닷물처럼 흘러내렸다. 눈가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있었다. 하지만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깊고 따뜻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슬픔이야."


"안녕, 슬픔아. 여기는... 정말 조용하네."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 모든 눈물, 모든 아픔, 모든 그리움을 말이야."


슬픔은 바다를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바닷물 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들이 보였다.


"저것들은 뭐야?"

"눈물이야. 지금까지 흘려진 모든 눈물들이 바다 속에 진주가 되어 가라앉아 있어."

나는 놀랐다.


"눈물이 진주가 된다고?"


"응. 눈물은 짠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혜의 진주가 돼. 아픔을 통해 배우는 것들이 있거든."


슬픔은 바닷가에 앉으며 손으로 물을 떠올렸다. 그 물은 투명했지만 어딘가 반짝이는 입자들이 섞여 있었다.

"사람들은 보통 나를 피하려고 해. 만나기 싫어하고, 빨리 지나가버리려고 하지. 하지만 나도 소중한 감정이야."


"슬픔이 소중하다고?"


"물론이야. 슬픔이 없다면 기쁨의 소중함을 알 수 없어. 상실이 없다면 사랑의 깊이를 깨달을 수 없고. 아픔이 없다면 치유의 의미를 모르지."


슬픔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덤했다. 분노와 두려움처럼, 슬픔에도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슬픔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바다 위에 떠 있는 다른 작은 섬들을 가리켰다. 각 섬마다 다른 색깔의 물망초들이 피어있었다.

첫 번째 섬에서 나타난 그리움이 말했다.


"나는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이야. 사라진 것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지."


두 번째 섬에서 나타난 아쉬움이 말했다.

"나는 끝나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야.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이기도 하고."

세 번째 섬에서 나타난 공허함이 말했다.


"나는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야.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의 아픔이지."


네 번째 섬에서 나타난 우울함이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마음이야. 색깔을 잃어버린 세상을 보는 눈이지."

각각의 슬픔들을 보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모두 다른 종류의 아픔이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사랑에서 나온 아픔들이었다.

"왜 사랑하면 슬퍼지는 걸까?"


슬픔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사랑한다는 건 마음을 열어주는 거야. 그러면 기쁨도 들어오지만 아픔도 들어와. 하지만 그게 사랑의 온전한 모습이야."


"그럼 슬픔은 피할 수 없는 거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게 나쁜 건 아니야. 슬픔은 우리를 더 깊은 존재로 만들어주거든."


슬픔은 바다 저편을 가리켰다. 그곳에서 다른 존재가 나타났다.


"저기 애도가 있어. 내 형이자 치료사야."


바다 위를 걸어오는 존재가 있었다. 그는 슬픔과 비슷했지만, 좀 더 깊고 차분한 느낌이었다.


"안녕, 나비야. 나는 애도야."


"안녕, 애도야."


"슬픔이 순간의 감정이라면, 나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치유하는 과정이야. 상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의 일부로 만드는 일을 해."


애도가 바다에서 연꽃 하나를 건져 올렸다. 진흙 속에서 피어난 깨끗한 꽃이었다.


"슬픔을 통해서만 피어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어. 고통 속에서 자라나는 지혜와 연민이 있지."

"어떤 지혜?"


"삶의 유한함을 아는 지혜.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는 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도 생겨."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슬픔을 겪은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위로가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가장 큰 섬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무지개빛 물망초가 피어있었다.

"저기 깊은 슬픔이 있어." 슬픔이 말했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슬픔이지."

우리는 그 섬으로 이동했다. 깊은 슬픔은 다른 슬픔들과 달랐다. 무겁지만 동시에 신성해 보였다.


"나는 모든 존재의 아픔을 품고 있어." 깊은 슬픔이 말했다. "나 혼자만의 슬픔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겪는 보편적인 슬픔이지."


"보편적인 슬픔?"


"생로병사의 슬픔. 만남과 이별의 슬픔. 모든 존재가 겪어야 하는 숙명적인 아픔이야."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깊은 슬픔에서는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마치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한 고요함이었다.


"슬픔의 끝에는 평화가 있어." 애도가 말했다. "충분히 슬퍼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받아들임이 와."


"우리의 꿀을 마셔봐." 슬픔과 애도, 그리고 깊은 슬픔이 함께 말했다.


나는 무지개빛 물망초의 꽃심에 입을 대었다.


짠맛이었다. 눈물의 맛이었다. 하지만 쓰라리지 않았다. 오히려 깊고 부드러웠다. 마치 바다의 깊이처럼 한없이 깊은 맛이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무언가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작은 슬픔들, 표현하지 못했던 아픔들이 모두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슬픔의 꿀이구나.


눈에서 자연스럽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슬픈 눈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화되는 느낌의 눈물이었다.


"울어도 괜찮아. 눈물은 부끄러운 게 아니야." 슬픔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상해... 슬픈데 왜 이렇게 마음이 편하지?"


"그게 슬픔의 힘이야. 제대로 슬퍼하면 마음이 정화돼. 그리고 다시 사랑할 힘도 생겨."

애도가 덧붙였다.


"슬픔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야.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소중한 것을 갖지 못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거든."

바다 저편에서 다른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금빛이었다.


"저기서 기쁨이 기다리고 있어." 슬픔이 말했다. "슬픔과 기쁨은 함께 다녀. 깊이 슬퍼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어."


"그럼 이제 기쁨을 만나러 가는 거야?"


"그래. 하지만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해줄게."

슬픔이 진지하게 말했다.


"슬픔을 피하려고 하지 마. 슬플 때는 슬퍼해도 돼. 그게 자연스러운 거야. 다만 슬픔에 갇혀있지는 마. 슬픔도 흘러가는 감정이야."


나는 아홉 번째 꿀을 얻었다.깊이와 정화의 꿀.


"고마워, 슬픔아, 애도야, 깊은 슬픔아. 아픔의 의미를 배웠어."


"천만에. 이제 너는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슬픔을 통해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을 거야."

바다를 떠나며, 나는 뒤돌아보았다. 끝없는 바다에 무수한 진주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모든 눈물이 지혜가 되어 있었다.


내면의 그림자 여행이 끝났다. 분노, 두려움, 슬픔... 모두 어렵고 힘든 감정들이었지만,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배웠다.



이제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혼자서도 완전한 존재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 저 멀리 황금빛에서 새로운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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