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평범한 겨울 날

강설

by 시더로즈



1화: 평범한 겨울날



“아직도 숙제 안 끝났어?”


룸메이트 유진이 침대에서 일어나며 하품을 했다. 새벽 4시, 기숙사 방에는 강설의 노트북 화면 불빛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데이터베이스 과제가 생각보다 복잡해서…”


강설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SQL 쿼리문들이 모니터에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컴퓨터공학과 3학년, 그녀의 일상은 늘 이런 식이었다. 코딩, 과제, 수업, 그리고 또 코딩.


“너 정말 컴퓨터랑 결혼할 거야?”


유진이 웃으며 말했지만, 강설은 이미 코딩에 빠져 있었다. 평소처럼 조용하고 평범한 새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노트북 화면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어? 이상하네.”


강설이 키보드를 두드렸지만 반응이 없었다. 화면이 완전히 꺼진 다음, 다시 켜졌다. 하지만 바탕화면에는 이전에 없던 이상한 이미지가 떠 있었다.


복잡하고 아름다운 기하학적 문양. 마치 눈송이 같기도 하고, 만화경 속 그림 같기도 한 신비로운 패턴이었다.


“해킹당한 건가?”


강설이 마우스를 클릭했지만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문양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함도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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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컴퓨터공학과 강의실*


“오늘은 데이터 마이닝 기법에 대해 배워보겠습니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졌지만, 강설의 머릿속은 여전히 새벽에 본 그 이미지로 가득했다. 노트북을 재부팅한 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지만, 그 복잡하고 아름다운 문양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강설아, 너 괜찮아? 얼굴이 창백해 보이는데.”


옆자리 선배 민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 네. 괜찮아요. 그냥 밤새서 좀 피곤해서…”


“요즘 너무 무리하지 마. 건강이 제일 중요한 거 알지?”


민혜 선배는 항상 후배들을 챙겨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강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수업에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창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11월 중순에 눈이라니. 강설은 창문 쪽을 바라봤다. 날씨 예보에서는 맑다고 했는데?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그 눈송이들이었다. 평범한 눈과는 달리 각각이 유독 크고 투명했으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패턴이… 새벽에 노트북에서 본 그 문양과 정확히 같았다.


“어떻게…”


강설이 중얼거리는 순간, 갑자기 현기증이 몰려왔다. 강의실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귀에서는 윙윙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설아!”


민혜 선배의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강설은 책상에 손을 짚으며 간신히 중심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차가운 기운이 솟아올랐다.


투명한 서리가 손가락 사이로 나와 책상 위에 작은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원 안에는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이 저절로 새겨지고 있었다. 창밖 눈송이들이 그리는 것과 정확히 같은 패턴으로.


“이… 이게 뭐야?”


강설이 놀라 손을 들어올리자, 서리로 만들어진 문양은 공중에서 잠시 빛나다가 사라졌다. 다행히 주변 학생들은 수업에 집중하고 있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민혜 선배만은 강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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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학교 카페테리아*


“정말 괜찮은 거야?”


민혜 선배가 커피를 마시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강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선배에게 이끌려 카페에 앉아 있었다.


“네, 정말 괜찮아요. 그냥 잠이 부족해서…”


“아침에 네 손에서 뭔가 나오는 걸 봤어.”


강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역시 들켰구나.


“뭐… 뭐가요?”


“투명한 기운 같은 거. 그리고 책상에 뭔가 그려지는 것도 봤고.”


민혜 선배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선배, 설마 제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야. 오히려 반대야.”


민혜 선배가 주변을 둘러본 후 목소리를 낮췄다.


“강설아, 혹시 너희 할머니가 특별한 분이신가?”


“네? 할머니요?”


“네 할머니 말이야. 혹시 이상한 능력이 있으시거나, 특별한 이야기를 해주신 적 없어?”


강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할머니… 어릴 적 할머니는 자주 이상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눈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세상을 지키는 비밀스러운 조직, 그리고 첫눈과 함께 나타나는 신비로운 힘에 대한 이야기들.


당시에는 그냥 재미있는 동화 정도로 생각했는데…


“왜 갑자기 할머니 얘기를…”


“나도 그런 능력이 있거든.”


민혜 선배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손끝에서도 차가운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투명한 서리가 테이블 위에 작은 꽃 모양의 문양을 그려나갔다.


“선… 선배도?”


“우리는 ‘설화회’라고 불러. 세상의 균형을 지키는 비밀 조직이지.”


민혜 선배의 눈이 진지해졌다.


“그리고 너는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그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


“무슨 말씀이신지…”


“프로스트 만다라를 다룰 수 있는 사람. 천 년에 한 번 나타난다는 진정한 계승자.”


선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페테리아 창문이 갑자기 얼어붙기 시작했다. 하얀 서리가 유리창을 따라 퍼져나가며 복잡한 문양을 그려나갔다.


“뭐야, 저게?”


다른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강설아, 이거 네가 하는 거야?”


민혜 선배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뇨! 저는 아무것도…”


그런데 정말로 강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이 동요할 때마다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민혜 선배가 강설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 순간, 카페테리아의 모든 창문이 한꺼번에 얼어붙으며 거대한 만다라 문양이 완성되었다.


학생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정말 제가 한 건가요?”


“응. 그리고 이제 숨길 수도 없을 것 같아.”


민혜 선배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저녁에 할머니를 만나봐. 그분이 모든 걸 설명해 주실 거야.”


“어떻게 저희 할머니를…”


“우리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거든. 너와 네 가족을.”


카페테리아 밖으로 나오자, 하늘에서는 여전히 이상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송이들이 만들어내는 패턴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큰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처럼.




*오후 6시, 기숙사*


“너 진짜 괜찮은 거야? 오늘 하루 종일 이상했어.”


유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강설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진아, 만약 내가… 정말 이상한 능력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래?”


“무슨 능력?”


“음… 눈을 조종할 수 있다거나…”


“와, 그럼 완전 엘사네! 겨울왕국!”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능력 있으면 좋겠다. 여름에 에어컨 대신 쓸 수 있잖아.”


강설도 따라 웃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이 모든 게 현실이라니.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할머니’였다.


“여보세요, 할머니.”


설아, 오늘 이상한 일이 있었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진지했다.


“어떻게 아세요?”


서울 전체에 이상 기운이 감지됐단다. 너로부터 말이야.


“할머니도 아시는 거예요? 이 모든 걸?”


오늘 밤 9시에 탑골공원으로 나와. 혼자서. 이제 모든 걸 말해줄 때가 됐구나.


“할머니…”


그리고 설아, 절대로 혼자서 능력을 쓰려고 하지 마라. 아직 위험해.


전화가 끊어졌다. 강설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송이 하나하나가 그녀를 부르는 것 같았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는 것처럼.




*오후 8시 30분, 탑골공원으로 가는 길*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종각역으로 향하는 강설의 마음은 복잡했다. 하루 만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컴퓨터 화면의 이상한 문양, 손끝에서 나오는 서리, 민혜 선배의 정체, 그리고 할머니의 전화.


‘내 인생이 이렇게 바뀔 줄이야…’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여전히 평범한 대학생 같았다. 안경을 쓰고, 후드티를 입고, 백팩을 멘 평범한 컴공과 학생.


하지만 이제는 뭔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차가운 기운이 그녀 주변에 맴돌고 있었다.


종각역에 도착해 지상으로 올라오니, 눈이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급하게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강설에게는 그 눈송이들이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고 친근했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탑골공원에 도착했을 때, 공원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평소라면 산책하는 사람들이나 운동하는 이들로 북적거렸을 텐데, 오늘은 마치 세상에 자신 혼자만 남은 것 같았다.


공원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파란빛이 보였다.


강설은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빛의 근원지에는 할머니가 서 있었다.


하지만 평소의 자상한 할머니가 아니었다. 그분의 손에서는 강설과 똑같은 서리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 서리는 공중에서 거대하고 복잡한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할머니…”


“이제야 왔구나, 설아.”


할머니가 돌아보았다. 그분의 눈이 파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모든 걸 설명해 줄 시간이 왔다. 프로스트 만다라의 진정한 계승자여.”


할머니의 손에서 완성된 거대한 만다라가 천천히 강설을 향해 다가왔다. 그 순간 강설의 머릿속에 천 년 전의 기억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티베트의 설산, 라마승 덴진, 일곱 개의 성역, 그리고 깨어나려 하는 혼돈의 힘.


“이제 시작이다, 설아.”


할머니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울려 퍼졌다.


“네 진짜 이야기가.”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