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밤의 꿈
할머니의 거대한 만다라가 강설을 감쌌을 때, 세상이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천 년 전, 티베트 고원
차가운 산바람이 라마승 덴진의 가사를 휘날렸다. 그는 설산 정상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앞에는 복잡하고 아름다운 만다라가 눈으로 그려져 있었다.
"스승님,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뒤에서 젊은 승려가 다가와 말했다. 덴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서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알고 있다, 텐진. 혼돈의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구나."
"다른 성역의 수호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덴진이 일어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서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 구름 속에서는 무언가 끔찍한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리의 시간이 다 되어간다."
"그렇다면 마지막 봉인을..."
"그래야겠다. 비록 내 목숨을 걸더라도."
덴진이 손을 들어올리자, 주변의 눈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빛나기 시작했고, 그것들이 모여 거대한 만다라를 형성했다.
"후세의 누군가가 이 힘을 계승하게 될 것이다."
덴진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퍼져나갔다.
"그때까지... 세상을 지켜라."
마지막 만다라가 완성되는 순간, 온 세상이 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현재, 탑골공원
"아!"
강설이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여전히 탑골공원에 서 있었지만, 주변 풍경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공원 전체가 얼어붙어 있었다. 나무들은 얼음 조각상이 되었고, 땅은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공중에는 수십 개의 작은 만다라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놀랐구나."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분의 모습도 달라져 있었다. 평소의 자상한 할머니가 아니라,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피부는 탄력이 있었고, 눈은 더욱 맑고 깊었다.
"할머니... 이게 다 뭐예요?"
"네가 보고 경험한 것은 덴진의 기억이다. 천 년 전 마지막 봉인을 만든 라마승 말이야."
"덴진이요?"
"그래. 그리고 너는 그의 환생이다."
할머니의 말에 강설의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환생이라니? 이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럽고 현실감이 없었다.
"그런데 덴진은 남자였는데, 저는 여자예요."
"영혼에게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 네 안에 흐르는 것은 덴진의 의지와 힘이야."
할머니가 손을 뻗자, 공중에 떠다니던 만다라 하나가 그녀의 손바닥 위로 내려앉았다.
"프로스트 만다라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균형을 지키는 신성한 힘이야."
"세상의 균형요?"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위협하는 존재들이 있다. 혼돈교단이 그 중 하나지."
할머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들은 천 년 전 덴진과 다른 수호자들이 봉인한 '무(無)의 눈보라'를 해방시키려 한다."
"무의 눈보라가 뭔가요?"
"모든 것을 원시 혼돈 상태로 되돌리는 힘이다. 만약 그것이 풀린다면..."
할머니가 말을 멈췄다. 그러자 주변의 얼음들이 갑자기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누군가 온다."
할머니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묻어났다.
"벌써?"
공원 입구 쪽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사람 모양이었지만 완전히 검은색이었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과 나무들이 시들어 말라갔다.
"혼돈교단의 추적자들이다."
할머니가 강설의 앞에 섰다.
"아직 능력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너를 노린 거야."
검은 그림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서는 어둠이 흘러나와 주변의 얼음을 녹여버리고 있었다.
"할머니, 어떻게 해야..."
"침착하게 들어라, 설아."
할머니가 등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알려주는 대로 해. 먼저 마음을 비워라."
"마음을 비운다고요?"
"그래. 컴퓨터 프로그래밍할 때처럼 생각하지 말고, 그냥 느껴라."
강설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상하게도 할머니의 말을 듣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이제 손을 앞으로 뻗어라."
강설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손끝에서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좋다. 이제 네 마음속에서 가장 평온했던 순간을 떠올려봐."
강설은 어릴 적 할머니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던 날을 떠올렸다. 하얀 눈밭에서 할머니와 함께 웃으며 놀던 그 평화로운 순간을.
그 순간 그녀의 손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투명한 서리가 손끝에서 나와 공중에 작은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원 안에는 복잡하지만 아름다운 문양이 저절로 새겨져 나갔다.
"와..."
강설이 감탄하는 사이, 그녀가 만든 만다라에서 부드러운 빛이 퍼져나갔다. 그 빛이 닿은 곳에는 다시 얼음꽃들이 피어났다.
"훌륭하다. 첫 번째 만다라 완성이야."
할머니가 미소지었다.
하지만 검은 그림자들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10미터도 남지 않았다.
"할머니, 저것들은 어떻게..."
"네가 방금 만든 만다라를 그들에게 던져라."
"던진다고요?"
"그래. 마음속으로 '물러가라'고 명령하면서."
강설은 반신반의하며 자신이 만든 작은 만다라를 검은 그림자들을 향해 날렸다. 동시에 마음속으로 외쳤다.
'물러가!'
순간, 작은 만다라가 빛을 발하며 커져갔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들과 부딪치는 순간, 강력한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끄아아악!"
검은 그림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갔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다시 푸른 풀들이 돋아났다.
"대단하다, 설아."
할머니가 박수를 쳤다.
"첫 시도치고는 놀라울 정도야."
"정말... 제가 한 건가요?"
강설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손끝에서는 미세한 서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할머니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혼돈교단은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들은 네가 각성한 것을 알았으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설화회에 정식으로 입단해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야 해."
"설화회요?"
"세상의 균형을 지키는 비밀 조직이다. 네 선배 민혜도 그 중 한 명이고."
강설은 오늘 낮에 카페에서 만난 민혜 선배를 떠올렸다. 그녀도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저처럼 프로스트 만다라를 쓸 수 있나요?"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있지만, 진정한 프로스트 만다라를 구사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너는 특별한 존재다, 설아."
할머니가 강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그만큼 책임도 크다는 걸 명심해라."
오후 11시, 기숙사
"어디 갔다 왔어? 연락도 안 되고..."
유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강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오늘 일어난 일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할머니 만나고 왔어."
"할머니? 갑자기 왜?"
"그냥... 할 얘기가 있어서."
강설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환생, 프로스트 만다라, 혼돈교단, 설화회... 하루 만에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서웠다. 이제 평범한 일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게.
휴대폰에 문자가 왔다. 민혜 선배였다.
[민혜 선배: 설아야, 내일 오전 10시에 학교 뒤편 카페 '윈터가든'으로 와. 설화회 사람들을 소개해줄게.]
[민혜 선배: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위험해.]
강설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눈송이들이 예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마치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손을 창문에 대자, 유리창에 작은 서리꽃이 피어났다. 강설은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구나.'
그때 갑자기 창문 너머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강설이 놀라 창밖을 내다보니, 멀리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기숙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돈교단의 추적자였다.
강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들은 이미 그녀의 거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그림자가 사라진 후, 강설은 커튼을 꽉 당겨 버렸다.
'내일 설화회에 가면... 모든 게 달라질 거야.'
그녀는 마지막으로 평범한 대학생으로서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내일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
새벽 3시
강설이 잠든 사이, 기숙사 주변에는 희미한 보호막이 쳐졌다. 할머니가 원격으로 설치한 방어막이었다.
하지만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는 또 다른 존재가 있었다.
검은 후드를 쓴 인물이 기숙사 옥상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이 붉은 빛으로 빛났다.
"드디어 깨어났구나... 프로스트 만다라의 계승자여."
그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이제 진짜 게임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