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회의 사자
*오전 9시 30분, 학교 뒤편*
강설은 ‘윈터가든’ 카페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아침부터 계속해서 손끝에서 미세한 서리가 피어오르고 있어서, 장갑을 끼고 나왔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어젯밤 검은 그림자를 본 후로는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유진이 몇 번 괜찮냐고 물어봤지만, 뭐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설화회… 정말 갈까?’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혼돈교단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따뜻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쳤다. 민혜 선배가 구석 자리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선배 혼자가 아니었다.
-----
“설아, 여기!”
민혜 선배 옆에는 두 사람이 더 앉아 있었다. 한 명은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차분하고 우아한 인상이었다. 다른 한 명은 비슷한 나이의 여자로, 밝고 활발해 보였다.
“소개할게. 이쪽은 린 오빠, 설화회 서울 지부 베테랑 요원이야.”
린이라고 소개받은 남자가 일어서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린입니다. 많이 들었어요.”
목소리가 예상외로 따뜻했다. 첫 인상은 차가워 보였지만, 말할 때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쪽은 서연이. 나랑 같은 학년이야.”
“안녕! 드디어 만났네!”
서연이라는 여자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끝에서도 미세한 기운이 느껴졌다.
“앉아, 설아. 많이 놀랐을 텐데.”
강설이 자리에 앉자, 린이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밀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어젯밤 일 들었어요. 첫 번째 만다라 구현에 성공했다고?”
린의 눈에 관심 어린 빛이 떠올랐다.
“네… 근데 어떻게 그걸…”
“할머니께서 연락 주셨거든요. 설화회는 서로 정보를 공유해요.”
민혜 선배가 설명했다.
“그런데 정말 대단해. 보통 첫 각성 후에 제대로 된 만다라를 만들려면 최소 일주일은 걸리거든.”
서연이 감탄하며 말했다.
“저도 처음에는 손톱만한 얼음조각밖에 못 만들었는데!”
“서연이는 아이스 블레이드 전문이에요.”
린이 부연 설명했다.
“칼 모양의 얼음을 만들어서 전투하는 스타일이죠.”
“그럼 다들 저처럼 얼음을 다루는 능력이 있는 건가요?”
강설이 궁금해서 물었다.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씩 달라요.”
린이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투명한 기운이 나와 공중에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마치 피겨스케이팅의 궤적 같았다.
“저는 아이스 트레이스라고 해요. 움직임의 궤적을 얼음으로 남겨서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방식이에요.”
“와, 예뻐요.”
강설이 감탄했다.
“린 오빠는 원래 피겨스케이터였거든. 그래서 움직임이 특히 우아해.”
민혜 선배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럼 민혜 선배는 어떤 능력이신가요?”
“나는 아이스 가든. 얼음꽃을 피우는 거야.”
민혜 선배가 손바닥을 펼치자, 작은 얼음꽃 하나가 피어났다. 정말 실제 꽃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설아 너의 프로스트 만다라는 차원이 달라.”
린이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얼음을 다루는 능력자지만, 만다라를 그릴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만다라가 그렇게 특별한 건가요?”
“만다라는 단순한 공격 기술이 아니에요.”
린이 설명했다.
“그것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거든요. 우리가 만드는 건 그냥 얼음이지만, 당신이 만드는 만다라는…”
“규칙을 바꾸는 거야.”
민혜 선배가 끝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어젯밤에 네가 만든 방어 만다라는 단순히 공격을 막은 게 아니라, 그 공간에서 ‘혼돈은 존재할 수 없다’는 규칙을 만든 거였어.”
강설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이 그런 대단한 일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마.”
서연이 위로하듯 말했다.
“우리가 도와줄 거야. 설화회는 가족 같은 곳이거든.”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으로, 눈매가 날카롭고 전체적으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마스터님!”
린과 민혜, 서연이 모두 일어서서 인사했다.
“앉아들 있어라.”
남자가 강설 옆 의자에 앉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설화회 서울 지부장 설악입니다.”
“안녕하세요. 강설입니다.”
설악이라는 남자의 첫인상은 위압적이었지만, 눈빛은 따뜻했다.
“많이 놀랐을 텐데, 어떤 기분인가?”
“아직도 현실 같지 않아요.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
“평범함은 때로는 선택이 아니라 은혜지.”
설악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한때는 평범한 회사원이었거든.”
“정말요?”
“20년 전, 나도 너처럼 갑작스럽게 능력이 각성됐어. 그때는 설화회도 지금보다 훨씬 작았고, 혼돈교단도 더 활발했지.”
설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그래서 우리는 더 강해져야 했어.”
“혼돈교단은 정확히 뭘 원하는 건가요?”
강설이 물었다.
“세상을 원시 상태로 되돌리는 것.”
설악이 대답했다.
“그들의 교주는 ‘무극’이라고 불리는 존재야. 그는 질서와 문명을 혐오한다. 모든 것이 혼돈 속에서 자유롭게 존재해야 한다고 믿거든.”
“그게 나쁜 건가요?”
“혼돈은 자유가 아니라 파괴야.”
린이 말했다.
“무극의 혼돈 세계에서는 약한 자들이 먼저 죽어. 질서가 없으면 강자만이 살아남거든.”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는 거야.”
민혜 선배가 덧붙였다.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
설악이 시계를 보더니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설아, 내일부터 정식 훈련에 들어갈 거야.”
“훈련이요?”
“네 능력을 제대로 조절하는 법부터 배워야 해. 지금은 감정에 따라 능력이 무작위로 발현되고 있잖아?”
맞는 말이었다. 강설은 어젯밤부터 계속해서 손끝에서 서리가 나오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린이 담당 트레이너가 될 거야.”
“제가요?”
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스터님, 저는 아직…”
“너만큼 기초가 탄탄한 사람이 없어. 그리고…”
설악이 강설을 보며 미소지었다.
“프로스트 만다라의 계승자에게는 최고의 선생이 필요하거든.”
-----
*오후 2시, 학교 도서관*
강설은 혼자 앉아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설화회, 혼돈교단, 프로스트 만다라, 훈련…
그리고 린.
‘피겨스케이터 출신이라고 했나?’
린의 우아한 손동작이 자꾸 떠올랐다. 그가 만든 얼음 궤적의 아름다운 곡선도.
‘내일부터 그 사람이 선생님이라니…’
왠지 떨렸다. 좋은 의미로.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혼자 앉아서 뭘 그렇게 생각해?”
뒤돌아보니 린이 서 있었다.
“린… 씨?”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 나이도 비슷하고.”
린이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 많이 놀랐을 텐데, 괜찮아?”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이 모든 게 정말 일어나고 있는 일인가 싶어서.”
“나도 처음에는 그랬어.”
린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피겨스케이팅을 하다가 갑자기 얼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됐을 때의 기분…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
“언제 각성하셨어요?”
“3년 전. 전국대회 중에 갑자기 링크 전체가 얼어붙어서 난리가 났었지.”
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이후로 선수 생활은 끝났어. 능력을 숨기면서 경기할 수는 없었거든.”
“아쉽지 않으셨어요?”
“처음에는 화가 났지.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어서.”
린이 강설을 바라봤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 이 능력이 있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됐거든.”
강설은 린의 말에 위로를 받았다. 자신만 이런 혼란을 겪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일부터 훈련 시작할 건데, 힘들 거야.”
“어떤 훈련인가요?”
“일단 능력 조절부터. 지금처럼 무의식적으로 서리가 나오는 걸 막는 법부터 배워야 해.”
린이 강설의 손을 보았다. 아직도 장갑 사이로 미세한 서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기본적인 만다라 패턴들을 익히고, 전투 응용법까지…”
“전투요?”
“혼돈교단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어젯밤처럼 또 공격해올 수 있어.”
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설아, 이건 장난이 아니야. 정말 위험할 수 있어.”
“알아요.”
강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도망칠 수는 없잖아요. 어차피 이미 그들이 절 노리고 있는 걸.”
“용감하네.”
린이 미소지었다.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그 말에 강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린의 진심 어린 눈빛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천만에. 우리는 이제 파트너잖아.”
-----
*오후 6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강설이 기숙사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주변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그녀의 숨이 하얗게 나오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따뜻했는데…’
그때 그림자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혼자구나.”
강설이 뒤돌아보니, 어젯밤 기숙사 옥상에서 봤던 검은 후드의 인물이 서 있었다.
“누… 누구세요?”
“너를 데리러 온 사람이야.”
후드 인물이 손을 들어올리자, 주변이 완전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설이 만드는 자연스러운 얼음과는 달리, 이것은 차갑고 어둡고 불길했다.
“혼돈교단!”
강설이 깨달았다.
“정답이야.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검은 얼음이 강설의 발목을 감쌌다. 움직일 수 없었다.
“조용히 따라와. 무극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강설이 패닉에 빠진 순간, 머릿속에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착해라, 설아. 네 안에 덴진의 기억이 있다는 걸 잊지 마라.’
강설이 눈을 감고 마음을 집중했다. 그러자 천 년 전 덴진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떻게 만다라를 그려야 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너무 늦었어.”
후드 인물이 강설에게 다가왔다.
바로 그 순간, 강설의 두 손에서 강력한 빛이 터져나왔다.
“프로스트 만다라!”
공중에 거대한 만다라가 그려졌다. 어젯밤보다 훨씬 크고 복잡했다. 그리고 그 만다라에서 나오는 빛이 검은 얼음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
“불가능해! 아직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않았는데!”
후드 인물이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설아!”
뒤에서 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달려오면서 우아한 얼음 궤적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늦었구나.”
후드 인물이 중얼거리더니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괜찮아?”
린이 강설에게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네… 다행히.”
강설이 자신이 만든 만다라를 올려다봤다. 아직도 공중에서 빛나고 있었다.
“대단해. 이게 정말 두 번째야?”
린이 감탄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덴진의 기억이 깨어나고 있는 거야.”
린이 진지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각성하고 있어. 이건 좋은 신호야.”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신호이기도 했다. 강설의 능력이 빨리 성장할수록, 혼돈교단의 공격도 더 거세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부터 내가 너를 보호할게.”
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혼자 다니면 위험해.”
강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로 평범한 일상은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섭지만은 않았다. 린이 옆에 있어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