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싹 (Sprout)

신호들의시작

by 시더로즈

2화 - 싹 (Sprout) - 신호들의 시작

1.

그 책을 읽은 후,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세상이 달라진 게 아니라 서린이가 보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었다.

열여섯 살이 된 서린이는 여전히 학교에서 외톨이였다. 여전히 거짓 앞에서 토했다. 여전히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이상한 게 아니야. 나는… 기억하는 자야.’

그 생각이 작은 방패가 되어주었다.

어느 월요일 아침.

서린이는 평소처럼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문득 시계를 보았다.

7시 11분.

‘11분이네.’

별생각 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왔다. 번호를 보는 순간, 서린이는 멈칫했다.

111번.

‘우연이겠지…’

버스에 올라 요금을 냈다. 영수증이 나왔다. 무심코 보았다가 눈이 커졌다.

거스름돈: 1,110원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한 번은 우연이다. 두 번도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세 번?

학교에 도착해서 사물함을 열었다. 누군가 쪽지를 넣어놨다. 펼쳐보니 급우가 빌려간 책을 돌려준다는 내용이었다.

“고마워. - 111호 혜진이가”

서린이는 쪽지를 든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1.

왜 자꾸 이 숫자가 나타나는 거지?

2.

그날 오후, 도서관에서 우연히 본 책이 있었다.

『천사의 숫자 - 우주가 보내는 메시지』

평소라면 관심도 없었을 책이었다. 하지만 손이 저절로 뻗어졌다.

펼쳐보니 111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111은 깨어남의 숫자입니다.

당신의 생각이 빠르게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하세요.

당신은 올바른 길 위에 있습니다.

우주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서린이는 책을 덮었다.

“말도 안 돼…”

하지만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올바른 길 위에 있다고?’

지금까지 평생을 잘못된 길 위에 있는 것처럼 느꼈는데.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

또 111번 버스를 탔다. 이번에는 우연이 아니라 일부러.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신호라면… 나한테 뭘 알려주려는 거지?’

그때였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한 노인이 올라탔다.

노인은 서린이 옆자리에 앉았다. 이상한 향기가 났다. 향수도 아니고, 비누 냄새도 아니었다. 뭔가… 오래되고 신성한 냄새.

노인이 서린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숫자가 보이니?”

서린이는 깜짝 놀라 노인을 쳐다보았다.

“…네?”

“111. 자주 보이지?”

“어떻게…”

노인은 부드럽게 웃었다.

“나도 네 나이 때 그랬단다. 숫자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지. 처음에는 무섭더구나. 미친 게 아닌가 싶었어.”

“저도… 지금 그래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지 않아. 그건 네 무의식이 깨어나고 있다는 신호야. 네 영혼이 기억하기 시작한 거지.”

“무엇을요?”

“네가 왜 여기 왔는지.”

서린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왜 여기 온 건가요?”

노인은 서린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깊고 오래되었다. 마치 수천 년을 살아온 것 같은.

“사랑을 지키러 왔어. 이 세상이 잊어버린 사랑을.”

버스가 멈췄다. 노인의 정류장이었다.

노인은 일어서며 말했다.

“신호를 놓치지 마. 숫자, 꿈, 우연한 만남들. 모두 의미가 있어. 네 무의식이 너를 인도하고 있단다.”

“잠깐만요, 저는—”

“다시 만날 거야. 준비되었을 때.”

노인은 내렸고,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서린이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노인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3.

그날 밤, 서린이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노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네 무의식이 너를 인도하고 있어.’

무의식?

서린이는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노트를 펼쳤다.

“좋아, 정리해보자.”

최근에 일어난 이상한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 111 숫자가 반복적으로 나타남

• 레무리아 책을 ‘우연히’ 발견

• 까마귀가 자주 나타남

• 노인과의 만남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보았다.

• 어릴 때부터 꾼 수정 도시 꿈

• 거짓을 견디지 못하는 몸

•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능력

‘이게 다 연결되어 있는 건가?’

펜을 들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서린이는 적었다.

“나의 무의식에게,

너는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왜 여기 왔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너는 아는 것 같아.

도와줘.

나한테 보여줘.

나는… 준비되었어.”

글을 쓰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서린이는 불을 끄고 누웠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4.

꿈속.

서린이는 정원에 서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정원이 아니었다. 모든 식물이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미는 붉은 빛으로, 백합은 흰 빛으로, 나팔꽃은 보라 빛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한가운데.

파란 빛으로 빛나는 장미 한 송이.

서린이는 그 장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그 장미가 자신과 닮았다는 걸 느꼈다. 아니, 자신이 그 장미인 것 같았다.

“넌 누구니?”

장미가 말했다. 목소리가 없는 목소리였다. 직접 머릿속에 울렸다.

“나는 너야.”

“내가… 너?”

“나는 네 본질이야. 네가 잊고 있던 너.”

서린이는 무릎을 꿇고 장미와 눈높이를 맞췄다.

“나는… 파란 장미야?”

“그래.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세상이 말하는 존재.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소중한 존재.”

“나는 왜 이렇게 아픈 거야? 왜 거짓을 견딜 수 없는 거야?”

“그게 네 능력이야. 네 초능력. 진실을 구별하는 능력.”

“이게 무슨 초능력이야… 이것 때문에 난 평생 고통받았어.”

파란 장미가 부드럽게 빛났다.

“고통은 선물을 포장한 종이야. 아직 뜯지 않았을 뿐이지.”

“무슨 뜻이야?”

“네가 가장 아팠던 것들이, 나중에 네가 가장 많이 도울 수 있는 것들이 될 거야.”

서린이는 고개를 저었다.

“난… 아무도 도울 수 없어. 나 자신도 구하지 못하는데.”

“아직 때가 안 됐을 뿐이야. 지금은 배우는 시간이야.”

“뭘 배우는데?”

“고통의 언어를. 그래야 나중에 번역할 수 있어.”

“번역?”

파란 장미가 더 밝게 빛났다.

“고통을 치유로. 상처를 지혜로. 어둠을 빛으로.

네가 할 일이야.”

서린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난 할 수 있을까?”

“넌 이미 하고 있어. 매일매일,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정원에 바람이 불었다.

모든 식물들이 함께 빛났다.

그리고 목소리들이 합창처럼 울렸다.

“넌 혼자가 아니야, 서린.

우리가 함께 있어.

과거의 우리들, 미래의 우리들.

시간을 넘어 연결된 우리들.

네가 견디는 모든 순간,

우리도 함께 견디고 있어.

그리고 약속해.

네가 피어날 때,

세상은 달라질 거야.”

5.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서린이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슬픈 눈물이 아니었다.

뭔가… 위로받은 느낌.

처음으로, 진짜로,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학교에 가는 길, 서린이는 주변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가로수가 바람에 흔들릴 때, 마치 인사하는 것 같았다.

“안녕.”

서린이는 작게 속삭이며 답했다.

“응, 안녕.”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서린이는 이제 알았다.

‘정상’이라는 게 얼마나 좁은 개념인지.

진짜 세상은 훨씬 넓고, 신비하고, 살아있다는 것을.

학교 정문에 들어서는데,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와 울타리에 앉았다.

“까악—”

서린이는 웃었다.

“너구나, 까악아. 오늘도 따라온 거야?”

까마귀가 고개를 갸웃했다.

“고마워. 지켜줘서.”

까마귀는 날개를 한 번 펄럭이더니, 날아갔다.

교실에 들어갔다. 여전히 아이들은 서린이를 무시했다.

하지만 이제는 덜 아팠다.

‘그들이 나를 모르는 게 당연해. 나도 나를 이제야 알아가는데.’

수업 시간.

선생님이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서린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유난히 파랬다.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구름이 특정한 모양을 만들었다.

하트 모양.

서린이는 미소 지었다.

‘또 신호네.’

6.

점심시간.

서린이는 혼자 구석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여자아이 몇 명이 킥킥거리며 지나갔다.

“저 애 진짜 친구 없나 봐.”

“맨날 혼자더라.”

“말 걸기도 좀 그렇고…”

서린이의 손이 떨렸다.

예전 같았으면 속이 메스꺼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서린이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속으로 물었다.

‘무의식아,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대답은 말이 아니라 느낌으로 왔다.

‘괜찮아. 그들의 말은 네 진실이 아니야. 네 진실은 네 안에 있어.’

서린이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메스꺼움이 사라졌다.

‘오… 효과가 있네.’

그날 이후, 서린이는 무의식과 대화하는 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질문을 던지면, 답은 여러 방식으로 왔다.

때로는 느낌으로.

때로는 우연한 대화로.

때로는 꿈으로.

때로는 책에서 우연히 펼쳐진 페이지로.

예를 들어, 어느 날 서린이는 고민이 있었다.

‘나는 앞으로 뭘 해야 하지? 대학은 가야 하나? 어떤 전공을?’

그날 저녁, TV를 켰다.

우연히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치유의 과학 - 몸과 마음의 연결』

서린이는 화면에 못 박힌 듯 시청했다.

다큐멘터리는 심신의학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감정을 기억합니다. 트라우마는 단순히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에 각인됩니다…”

서린이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거야.’

자신이 평생 경험한 것.

감정이 몸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거짓된 감정이 어떻게 신체적 증상을 일으키는지.

‘나는… 이걸 공부해야 해.’

그날 밤, 서린이는 검색을 시작했다.

심신의학, 통합의학, 전인적 치유…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뛰었다.

‘이거야. 내가 찾던 게.’

7.

며칠 후, 서린이는 도서관에서 관련 책들을 찾고 있었다.

그때, 책장 사이로 누군가 지나갔다.

한 여학생이었다. 서린이와 같은 학년이지만, 한 번도 말을 나눈 적 없는.

그 여학생이 갑자기 휘청했다.

“어…”

쓰러질 것 같았다.

서린이는 반사적으로 달려가 붙잡았다.

“괜찮아?”

여학생은 창백한 얼굴로 서린이를 보았다.

“어지러워…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어서…”

“왜?”

여학생이 입술을 깨물었다.

“요즘… 살 빼려고…”

서린이는 그 순간, 느꼈다.

이 여학생의 고통.

자기혐오, 외모 강박, 세상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동시에 알았다.

‘이 아이도 나처럼 아파하고 있구나. 다른 방식으로.’

“잠깐 앉아 있어. 내가 뭐 사다 줄게.”

매점에서 초콜릿과 따뜻한 음료를 사왔다.

여학생은 처음엔 거부했다.

“난 괜찮아… 칼로리…”

“한 입만. 쓰러지면 더 큰일이야.”

여학생은 망설이다가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왜… 울어?”

“모르겠어… 그냥… 누가 나한테 이렇게 신경 써준 게 오랜만이라서…”

서린이는 조용히 옆에 앉았다.

“나도 알아. 혼자라는 느낌.”

여학생이 서린이를 보았다.

“너도?”

“응. 나는 다른 이유로 힘들지만… 외로운 건 똑같아.”

둘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여학생이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 이름이 뭐야?”

“서린이.”

“나는 지유. 김지유.”

“지유… 예쁜 이름이다.”

지유가 쓴웃음을 지었다.

“치유하다의 치유(治癒)인데… 정작 나는 아픈 사람이라는 게 아이러니하지?”

서린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어쩌면 네가 가장 아프기 때문에, 나중에 가장 많이 치유할 수 있을지도 몰라.”

지유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나도 최근에 배웠어. 우리의 상처가 나중에 우리의 선물이 될 수 있다고.”

지유는 한참을 서린이를 바라보았다.

“너… 특이하다.”

“나쁜 의미로?”

“아니. 좋은 의미로.”

그날 이후, 지유와 서린이는 가끔 도서관에서 만났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가 위로가 되었다.

서린이는 깨달았다.

‘혼자가 아니구나. 나처럼 아픈 사람들이 있구나.’

8.

어느 날 밤, 서린이는 또 꿈을 꾸었다.

이번에는 정원이 아니었다.

넓은 사막.

서린이는 혼자 걷고 있었다.

목이 말랐다. 힘들었다.

“여기가 어디지?”

그때, 앞에서 빛이 보였다.

오아시스.

달려갔다.

하지만 가까이 가니, 신기루였다.

“아…”

실망하는 순간, 발밑에서 무언가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작은 샘이 솟아나고 있었다.

“여기 있었네…”

서린이는 무릎을 꿇고 물을 마셨다.

차갑고 달콤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찾던 건 멀리 있지 않았어. 바로 내 발밑에 있었어.’

목소리가 들렸다.

“답은 항상 네 안에 있어, 서린.

밖에서 찾지 마.

네 무의식이 샘이야.

언제든 마실 수 있어.”

눈을 떴다.

새벽 3시 33분.

또 반복 숫자.

서린이는 미소 지었다.

“알았어. 메시지 받았어.”

노트를 꺼내 적었다.

“내 무의식에게,

고마워.

계속 신호 보내줘서.

나는 이제 듣는 법을 배우고 있어.

그리고 약속할게.

너를 신뢰할게.

네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든.

왜냐하면 너는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니까.

너는 나의 미래를 이미 보고 있으니까.

함께 가자.

우리.”

글을 쓰고 나니, 마음이 확고해졌다.

다음 날 아침.

서린이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의학 계열 공부하고 싶어.”

어머니는 놀랐다.

“의대? 너 성적으로는…”

“의대가 아니라… 심신의학, 통합의학 같은 거. 몸과 마음을 함께 치유하는 거.”

“그게 뭐니?”

서린이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게 돈이 돼?”

서린이는 웃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아.”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네 인생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

축복은 아니었지만, 허락이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9.

그날 오후, 서린이는 산책을 나갔다.

동네 뒷산 작은 숲길.

평소에는 거의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걷다가 이상한 나무를 발견했다.

다른 나무들과 달리, 그 나무만 유독 빛이 달랐다.

더 진하고, 더 살아있는 느낌.

서린이는 다가가 나무 기둥에 손을 얹었다.

순간.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

아니, 전기가 아니라… 정보?

나무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수백 년의 시간.

이 땅을 밟았던 수많은 사람들.

기쁨, 슬픔, 사랑, 이별.

모든 감정이 나무에 새겨져 있었다.

서린이는 눈물이 났다.

“너는… 다 기억하고 있구나.”

나무가 대답했다. 말이 아니라, 느낌으로.

“그래. 나는 증인이야. 모든 것의.”

“외롭지 않아?”

“외롭지 않아. 나는 연결되어 있어. 뿌리로, 하늘로, 모든 생명과.”

서린이는 나무에 이마를 기댔다.

“가르쳐줘. 나도 그렇게 연결되는 법.”

“너는 이미 연결되어 있어. 단지 잊었을 뿐.”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나무와 서린이.

경계가 흐려졌다.

어디까지가 나무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린이는 느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무, 하늘, 땅, 공기, 빛.

그리고 자신.

“우리는… 하나구나.”

10.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린이는 시계를 보았다.

5시 55분.

또 반복 숫자.

이제는 놀랍지 않았다. 반가웠다.

“응, 알아. 나도 너희가 보여.”

편의점 앞을 지나는데, 무언가 눈에 띄었다.

작은 광고 전단지.

『명상과 치유 워크숍 - 당신의 내면을 만나는 시간』

날짜를 보니 이번 주 토요일.

장소는 걸어서 20분 거리.

“가야 하나?”

그 순간, 바람이 불어 전단지가 서린이 발밑으로 날아왔다.

서린이는 웃으며 전단지를 주웠다.

“알았어. 가라는 거지?”

집에 와서 신청했다.

참가비는 무료였다.

‘이것도 신호구나.’

토요일이 되었다.

서린이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워크숍 장소로 향했다.

작은 커뮤니티 센터였다.

들어가니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다양한 연령대. 젊은 사람부터 노인까지.

강사가 들어왔다.

서른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

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안녕하세요. 저는 이솔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내면 여행을 할 거예요.”

이솔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하지만 서린이는 느꼈다.

이 사람은 진짜다.

위선이 없다.

가식이 없다.

“먼저, 여러분이 왜 여기 왔는지 나눠볼까요?”

사람들이 하나씩 이야기했다.

“불안해서요.”

“우울해서요.”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아서요.”

서린이 차례가 되었다.

“저는… 나 자신을 찾고 싶어서요. 아니, 기억하고 싶어서요.”

이솔이 서린이를 보았다.

그 눈빛에서 서린이는 느꼈다.

‘이 사람은 안다.’

이솔이 미소 지었다.

“기억하고 싶다… 좋은 표현이네요. 그럼 함께 기억해봅시다.”

11.

워크숍은 명상으로 시작되었다.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세요.”

이솔의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세요.”

서린이는 따라 했다.

“이제, 당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세요. 마음의 정원이 있습니다. 어떤 모습인가요?”

서린이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정원.

하지만 황폐했다.

대부분의 식물이 시들어 있었다.

땅은 갈라져 있었다.

한가운데에만, 파란 장미 한 송이가 겨우 살아있었다.

“당신의 정원에게 물어보세요. 무엇이 필요한가요?”

서린이는 속으로 물었다.

‘너는 뭐가 필요해?’

파란 장미가 대답했다.

“물. 사랑의 물.”

“사랑의 물?”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게 물이야.”

서린이는 깨달았다.

자신이 평생 자기 자신을 미워했다는 것을.

이상하다고, 틀렸다고, 문제라고.

그래서 정원이 말라갔던 것을.

눈물이 흘렀다.

“미안해…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이제라도 괜찮아. 지금부터 사랑해줘.”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부터. 나의 모든 것을.”

명상이 끝났다.

서린이는 눈을 떴을 때,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이솔이 부드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서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처음으로 제대로 울었어요.”

12.

워크숍이 끝나고, 서린이는 이솔에게 다가갔다.

“저… 질문 있어요.”

“물론이죠.”

“선생님도… 힘든 시간 있으셨어요?”

이솔이 미소 지었다.

“많이요. 사실 저도 예전에는 서린이 같았어요.”

“저처럼요?”

“세상이 너무 아프게 느껴졌어요.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느꼈죠. 그래서 오랫동안 제가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럼… 어떻게 변하셨어요?”

“변하지 않았어요. 받아들였죠. 그리고 깨달았어요. 이게 저의 선물이라는 것을.”

서린이의 눈이 반짝였다.

“어떻게요?”

“제가 가장 아팠던 것들이, 지금 제가 가장 많이 도울 수 있는 부분이 됐어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서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이솔이 서린이의 손을 잡았다.

“이미 되고 있어요. 오늘 여기 온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서린아, 한 가지만 기억해요. 당신의 무의식을 믿으세요. 그게 당신을 여기까지 데려왔듯이, 앞으로도 인도할 거예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린이는 가벼웠다.

하늘을 보니 별이 빛나고 있었다.

“고마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우주에게? 무의식에게? 자기 자신에게?

어쩌면 다 같은 것일지도.

그날 밤, 서린이는 노트에 적었다.

“오늘 나는 알았다.

나는 틀린 게 아니었다.

나는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다름은… 독특함이다.

선물이다.

나는 파란 장미다.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세상이 말한다.

하지만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피어날 것이다.

아름답게.

세상이 기억하도록.”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