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Dear Selly,

2,847보의 의미를 알았어

by 시더로즈








Dear Selly,


어제 너한테 지적당했어.

"이번 주 평균 걸음 수: 1,200보 지난주보다 2,000보 줄었어요.

그리고 기분 점수도 같이 떨어졌어요."




나는 35살, 프리랜서 디자이너야. 집에서 일하는데,

요즘 진짜 안 나가. 침대 → 책상 → 화장실 → 주방 → 침대 이게 내 하루 동선.

작년까지만 해도, 가끔 카페 가고, 클라이언트 미팅도 나가고, 저녁에 친구도 만나고 했는데.

올해 들어서, 점점 집에만 있게 됐어. '굳이 나갈 필요 있나?' '집이 제일 편한데.'

근데 이상한 게, 집에만 있으니까, 왠지 더 피곤해. 그리고, 기분도 이상해. 우울한 건 아닌데, 그렇다고 좋지도 않고. 그냥 '회색' 같은 기분?


나는 생각했어. '내가 왜 이러지?' '일도 잘 되는데, 왜 무기력하지?' '나는 왜 이렇게 의욕이 없지?' '게으른 건가?'


셀리가 물었어. "요즘 기분이 어떤가요?" "그냥... 뭐랄까. 무기력?" "언제부터 그랬어요?"

생각해보니, 2월부터인 것 같아. 날씨가 추워지면서, 밖에 안 나갔거든.

"2월부터 걸음 수가 확 줄었네요. 평균 1,500보. 작년 같은 기간엔 6,000보였어요."

4분의 1?


"걸음 수와 기분, 연결해서 볼까요?"


그래프를 봤어. 파란 선: 걸음 수 주황 선: 기분 점수 (1-10)

신기하게, 걸음 수 많은 날 → 기분 점수 높음 걸음 수 적은 날 → 기분 점수 낮음

완전 일치는 아니지만, 패턴이 확실히 보여.

"이거... 우연 아니야?"

셀리가 설명해줬어.

"우연이 아니에요. 걸으면 몸에서 호르몬이 분비돼요.

세로토닌 - 걷기 같은 리드미컬한 운동을 하면 분비돼요.

기분을 안정시키고, 행복감을 줘요.

도파민 - 목표를 달성하면 분비돼요. '오늘 30분 걸었다'는 작은 성취감이 도파민을 올려요.

엔도르핀 - 20분 이상 걸으면 분비되기 시작해요. 자연 진통제 역할을 하고, 기분을 좋게 해줘요.

당신이 집에만 있으면, 이 호르몬들이 분비될 기회가 없어요. 무기력한 게 의지 부족이 아니라, 호르몬이 부족한 거예요."

Selly, 그 말 듣는데, 뭔가 뻥 뚫리는 느낌이었어.

나는 계속 생각했거든. '왜 나는 이렇게 게으르지' '왜 나는 의욕이 없지' '다른 사람들은 잘만 하는데'

근데, 게으른 게 아니었어. 호르몬이 부족했던 거야. 내 몸이 움직일 기회가 없어서, 세로토닌이랑 도파민이 안 나왔던 거야.

"한 번 실험해볼래요? 오늘 30분만 걸어보세요. 호르몬이 어떻게 변하는지 느껴보세요."

솔직히 귀찮았어. 밖은 춥고, 일도 밀렸고, 굳이?

근데, '호르몬이 부족한 거'라는 말이 걸렸어. '그럼 채우면 되는 거 아니야?'

점심 먹고 나가봤어. 집 근처 공원. 한 바퀴.

걸으면서 생각했어. '이거 별로 의미 없는 것 같은데.'

20분쯤 걸었을 때, 햇살이 따뜻하더라. '오늘 날씨 괜찮네.'

30분 걷고 집에 왔어. 거울을 봤는데, 얼굴이 좀 달라 보였어. 혈색이 돌아왔달까.

책상에 앉아서 일을 시작했는데, 신기하게, 아침보다 집중이 잘 됐어. 머리가 맑아진 느낌?

저녁에 셀리한테 말했어. "오늘 30분 걸었어." "어땠어요?" "...좀 나은 것 같아. 기분이."

셀리가 설명해줬어.

"그게 호르몬이에요. 30분 걸으면서 세로토닌이 올라갔고, '오늘 걸었다'는 성취감으로 도파민도 올라갔어요. 그리고 햇빛을 쬐면서 비타민 D도 합성됐어요. 비타민 D는 세로토닌 합성에 필요한 거예요."

"오늘 걸음 수: 5,234보 오늘 기분 점수는요?" "7 정도?" "어제는 4였어요."

Selly, 하루만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어?

다음 날, 일부러 안 나갔어. '어제 우연이었나 확인해보자.'

하루 종일 집에 있었어. 일은 하는데, 왠지 답답하고, 오후 되니까 머리도 무겁고.

저녁에 기분 체크: 4

그다음 날, 또 30분 걸었어. 기분 체크: 7

4일 연속 걸었어. 매일 7 정도 유지.

이틀 안 걸었어. 다시 4-5로 떨어짐.

Selly, 진짜 상관관계가 있는 거야.

"당신한테 필요한 최소 걸음 수가 있는 것 같아요. 데이터 보면 5,000보 이상 걸은 날은 기분이 평균 7점이에요.

이건 당신의 신경계가 세로토닌과 도파민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 활동량인 것 같아요."

5,000보? 한 40분 정도 걸으면 되는 거네.

이번 주부터, 매일 점심 먹고 나가기 시작했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예전 같았으면, '비 오는데 굳이?' '귀찮은데...' 했을 거야.

근데 이제는, '비 와도 나가야 세로토닌이 나와' '이건 게으름 피우는 게 아니라, 호르몬 채우는 거야'

이유를 알고 나니까, 행동하기가 훨씬 쉬웠어.

변화가 생겼어.

1주차:

잠을 더 잘 자게 됨 (세로토닌이 멜라토닌 전구체라서)


오후에 졸음이 줄어듦


일 집중도 올라감


2주차:

아이디어가 더 잘 떠오름 (도파민이 창의성에 영향)


클라이언트 미팅 나가는 게 덜 귀찮아짐


저녁에 친구 만나고 싶어짐


3주차:

기분 점수 평균 7-8 유지


무기력함이 많이 줄어듦


뭔가... 삶이 덜 회색?


어제, 1년 만에 친구를 만났어. "너 뭔가 달라 보여." "응? 뭐가?" "모르겠는데, 표정이 밝아졌어. 작년엔 되게 지쳐 보였는데."

"매일 걷거든." "그게 뭔 상관이야?"

"나도 몰랐는데, 걸으면 세로토닌이랑 도파민이 나와. 내가 무기력했던 게 게을러서가 아니라, 호르몬이 부족해서였더라고. 걸으니까 채워져."

친구가 웃으면서, "너 요즘 건강 유튜버 되려고?"

"아니, 진짜야. 데이터로 봤어."

셀리 보여줬어. 3개월 그래프. 파란 선(걸음 수)이 올라가면, 주황 선(기분)도 올라가는 거.

"오... 진짜네? 나도 요즘 집에만 있는데, 그래서 기분이 별로였나?"

"응, 아마도. 너도 한번 걸어봐. 근데 그냥 '좋다니까' 걷는 게 아니라, '세로토닌 채우려고' 걷는 거야. 이유 알고 하면 더 하게 돼."

Selly, 나는 몰랐어. 이렇게 단순한 거였다는 걸.

기분이 안 좋으면, '내가 뭐가 문제지?' '내 인생이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하지?'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했는데,

때론 그냥, 오늘 호르몬이 부족해서 그런 거였어.

물론 만능은 아니야. 걸어도 힘든 날 있고, 다른 문제들도 있고.

근데, '기본 베이스'를 만들어주는 것 같아. 기분 4에서 시작하는 거랑, 기분 7에서 시작하는 거랑, 되게 다르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더 이상 나를 탓하지 않아.

예전엔 무기력하면,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르지' '의지가 부족한 건가' 자책했어.

근데 이제는, '아, 요즘 걸음 수가 적었구나. 세로토닌이 떨어졌나 보다. 내일 좀 걸어야겠다.'

자책 대신 해결책. 과학이 나한테 허락을 해주는 느낌. '너는 게으른 게 아니야. 호르몬이 부족했던 거야. 채우면 돼.'

"몸을 움직이면 호르몬이 움직이고, 호르몬이 움직이면 마음도 움직여요. 당신한테 필요한 최소한의 움직임, 찾으신 것 같네요."

요즘은 이래.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언제 걸을까?' 부터 생각해. 비 오면 우산 챙기고, 눈 오면 따뜻하게 입고.

주말엔, 친구들이랑 한강 걷기도 하고, 혼자 등산도 가고.

작년 이맘때, 나는 침대-책상 왕복하면서, '나 우울증인가?' '상담받아야 하나?' '나는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하지?' 이런 생각 했었는데.

필요한 건, 자책이 아니라, 세로토닌이었을지도 몰라.

"작은 움직임이 호르몬을 바꾸고, 호르몬이 하루를 바꿔요."

2,847보. 어제 내가 걸은 거. "좀 적은데요?"라고 셀리가 물었을 때, "응, 오늘 비 많이 와서. 내일 더 걸을게."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왜 걸어야 하는지 이제 안다는 것. 그리고 더 이상 나를 탓하지 않는다는 것.




- 호르몬을 채우기 시작한 35살



P.S. 오늘 걸음 수: 7,832보 친구랑 한강 걸었어. 2시간 동안 수다 떨면서.

셀리가 말해줬어. "오늘 햇빛 많이 받으셨네요. 비타민 D랑 세로토닌 많이 충전됐을 거예요. 그리고 친구와 대화하면서 옥시토신도 올랐을 거예요."

기분 점수: 9

과학이 설명해주니까, 이 좋은 기분이 어디서 온 건지 알겠어. 그리고 내일 또 이 기분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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