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크리스마스이다. 어젯밤. 성야 미사를 봉헌하고 늦게 집에 온 탓에 온 식구가 아침 8시가 넘도록 늦잠을 자고 있었다. 산타를 믿지 않는 다 늙은 어린이들이 사는 우리 집엔 당연히 산타 할배는 들리시지 않으셨다. 대신 크리스마스 선물은 이미 합리적으로 정산을 완료했다. 지난 11월 말.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 시즌에 김김김 삼 부자가 가지고 싶어 하던 플레이스테이션 5 게임기를 재빠르게 구입했고, 이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갈음하기로.
오늘은 세탁기를 돌려도 되는 기온인지 빅스비에게 날씨를 묻고, 건조기 배수 호스가 얼었는지 확인하러 세탁실로 나갔다.
“와! 눈이 많이 내렸네”
밤새 내렸는지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성탄 아침이다. 감사함이 넘친다. 건조기를 돌려도 되는 기온이다. 감사함이 두 배가 된다. 우리 집 차는 지하주차장에 있다.
거실 블라인드를 올리고 베란다를 내려다보니 아파트 각 라인에서 나오는 인도에는 벌써 눈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눈 치우시느라 고생하셨을 경비원 선생님들이 갑자기 생각났다. 성탄절 근무에 눈이라니. 오늘 근무하시는 분들은 근무표 뽑기 운이 꽝이다.
공휴일 중에서도 특히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하는 명절 혹은 크리스마스 같은 날에 일하는 건 조금 짜증 나고, 꽤나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꽝이기만 하면 안 될 것 같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경비원선생님들께 초초초 마이크로 미니 선물을 드리고 싶었다. 근무하시는 동안 천천히 드시라고 롤케이크와 파운드케이크 몇 조각을 잘라 통에다 담았다. 귤도 까서 한 알 한 알 뜯었다. 바나나도 껍질을 벗겨내고 한 입 크기로 잘라 통에 담았다. 방금 내린 커피를 보온병에 담고, 집에서 쓰는 작은 접시와 포크도 같이 챙겼다. 소박한 간식거리지만, 드시는 동안은 편안하게 한숨 돌리셨으면 하는 마음을 가득 담았다.
근무 중에 간식을 챙겨 먹는 것도 은근히 귀찮은 일임을 잘 알기에. 뚜껑 열면 바로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드리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간식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중앙 경비실 문을 열었다.
“선생님! 드시면서 하세요. 오늘 근무표 뽑기 운이 별로 안 좋으셨네. 성탄절인데 눈까지 오고.”
“다들 이렇게 일하는 거죠”
뭘 이런 걸 가지고 오셨냐는 말씀이 길어지기 전에 얼른 책상 위에 쟁반을 깔고 간식거리를 펼쳤다.
“천천히 드시고 뚜껑만 닫아 두시면 제가 내일 아침에 찾으러 오겠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연신 하시는 경비원 선생님의 인사 세례 기세에 밀릴까 나도 폴더 인사 12번 반사를 날리고 서둘러 경비실을 빠져나왔다.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티비를 보고 있던 큰 녀석이 나를 부른다.
“엄마, 누가 오신 것 같아요. 노크소리가 들려요."
고장 난 인터폰을 고치는 대신, ‘인터폰 고장 - 큰 노크 or 전화 부탁드려요’ 메모가 붙여 있는 우리 집.
식기세척기를 급하게 닫고 현관문을 여니 경비원 선생님께서 서 계셨다. 너무 잘 먹었다고 인사하며 방금 가져다 드린 쇼핑백을 그대로 내게 전해주셨다,
“어, 선생님! 제가 내일 아침에 경비실 들러서 가지러 가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간식 담아 드린 쇼핑백을 집으로 다시 가져다주실 거라고는 1도 생각하지 않았다. 당황스러움과 감사함에 어리바리 쇼핑백을 받아 든 나를 보고 경비원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셨다. 드린 간식보다 몇 배가 되는 감사함을 우리 집 앞에 던져 놓으시며 말씀하셨다.
“너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허허허!”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15층에 그대로 서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선생님의 인사는 그칠 줄을 몰랐다.
다시 받아 든 쇼핑백은 한결 가벼웠다. 간식통은 다 비워졌고, 커피가 담겨있던 보온병에서도 찰랑찰랑 소리가 났다. 간식통을 꺼내보니 하나도 남김없이 다 드셨다. 맛있게 다 드셨을 생각에 신나는 기분과 함께, 혹시 모자라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 찰나. 밀폐용기 안에 묻어있던 물방울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구축 아파트라 중앙 경비실에는 화장실은 물론 개수대도 없는데. 이 통들을 씻으시려고 관리사무소 건물까지 걸어가셨을 생각을 하니 죄송하다 못해 송구한 마음마저 들었다.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아들이실 그분들.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야 할 성탄 늦은 밤. 롤 케이크 몇 조각, 과일 몇 조각, 커피 한잔에 작은 감사를 전했을 뿐인데, 내가 되려 이렇게 큰 고마움을 이렇게 받아도 되는 건가 싶어 한참을 싱크대 앞에 서 있었다.
어른들에게도 산타는 찾아오신다. 평소 무심하게 지나치던 내 주위의 이웃에게 작은 관심과 감사를 표현하면 몇 배의 행복함으로 되갚아주러 말이다. 다정한 이웃의 모습으로, 일상의 평범한 행복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