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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확행 Jan 03. 2024

성적표를 공개합니다.

   

100점 만점에 68.75점 

허나, 상세 내용을 보면 나쁜 것만은 아니다!




2024년 1월 1일 저녁. 식구들이 식탁으로 모인다. 2023년을 어떻게 얼마나 잘 보냈는지 새해 댓바람부터 이야기는 나눠봐야 하므로.

“자! 이것이 2023년 계획표. 각자 살펴보고 얼마나 성취했는데 체크해 보자고”

딱 1년 전. 각자 계획표를 만들고 눈에 보이는 어딘가에 두긴 했을 텐데 그것이 1년 동안 잘 남아있기란 쉽지 않을 터. 오늘 이 순간을 위해 나답지 않은 꼼꼼함으로 챙겨놓은 작년 계획표를 꺼내자 식구들이 자뭇 놀란 눈치다.  



대한민국 채점 국룰에 따라 성취도 평가는 동그라미 세모 가위로 하기로 했다. 오래간만에 실물로 다시 보는 계획표를 들고 채점하는 마음으로 다들 진지한 눈빛이다.

“난 새해 계획 다시 안 세워도 되겠는데?”

남편이 피식 웃는다.




내가 본 남편의 2023년은 전반적으로 성공한 듯하다. 과중한 업무를 해 내느라 많이 고생했다. 건강과 관련한 식습관 개선 및 체중 감량은 언제나 그렇듯이 ‘꾸준하지 못하여 결국 실패’에 다 달았다. 거기엔 나의 책임도 적지 않은 것 같아 말은 안 했지만 마음이 뜨끔했다.



저축 늘리기와 유럽여행이 2023년에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감사하게도 가정 재정 건전성은 좋아졌고, 일하시느라 마음 놓고 여행 제대로 못 해보신 시어머님을 모시고 3주간 다녀온 ‘모자간 유럽여행’은 올 한 해 제일 뿌듯한 효도인 듯했다. 일의 우선순위를 잘 정하고, 집중력을 높이고, 현명하게 인내하겠다는 남편의 다짐은 '올해의 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동안 계속 실천해야 하는 ‘인생의 목표’이기에 이 항목은 다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큰 아이는 2023년 많이 성장했다. 본인이 원하는 키 170cm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곧 쑥쑥 크리라는 희망에 억지로 우유를 들이켰다. 가장 칭찬할 만한 것은 공부에 임하는 태도와 자세가 전반적으로 많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예전에 비하여 공부할 때 짜증을 내는 빈도나 공부량을 줄여보려고 잔머리 굴리던 횟수가 많이 줄어든 것은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좋아하는 농구에는 그 무엇보다도 진심을 담았고, 권투, 수영도 두루두루 열심히 했다. 여전히 공부할 때 손톱을 깨물고, 썼던 수건을 빨래통에 바로 넣지 않는 건 매우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농구 경기를 직관하러 갔고, 친구들끼리만 문 열 때 에버랜드에 들어가서 문 닫힐 때까지 놀아본 본인이 꼽은 ‘최고의 날’을 보낸 만족스러운 2023년이라 했다.

큰 아이 자가 평가. 동그라미, 세모, 엑스의 다채로운 결과.


허무맹랑한 계획이 많아서 성취율이 낮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던 둘째도 꽤나 잘 해내었다. 반려동물 키우기나 비행기에서 1박 2일 보내기 같은 실현 가능성이 낮은 항목들도 있었으나, 형아와 함께 열심히 복싱하고 농구했으며, 저체중이었던 몸무게도 이제 정상 범위로 진입했으니 괄목할 만한 성장이라 하겠다.



‘편식하지 않기’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X를 날린 둘째. ‘밥 빨리 먹기’에 대해서는 본인은 O, 나머지 가족들은 △ 혹은 X를 주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본인의 억울함을 한껏 어필했지만 결과는 번복되지는 않았다. 풀기로 했던 문제집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모두 완북한 것도, 귀가 시간을 잘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도 모두 칭찬받을 만하다.



나도 명목 점수는 60점이라 나쁘긴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나름 애쓰며 보낸 한 해였다. 계획하지 않았던 퇴사로 당황스러운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결혼 후 6개월의 출산을 제외하고는 거의 쉬지 않고 일해왔던 나에게 충전과 휴식이 주어진 감사한 해였다.



하루에 열두 번씩 쳐다보던 시계를 보는 횟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하루하루가 ‘오늘 클리어해야 하는 테트리스 같은 삶’에 긴장감과 스트레스가 많이 줄어들었다. 망할 번 했던 '일주일에 3일 이상 운동하기'는 퇴사 덕분에 성공하였고, 일주일에 글 한편 쓰기도 80% 정도 성취했다. 아이들 식사량 늘리기는 내 기준에서는 성공이었으나, 남편의 기준에서는 실패였으니 이건 세모로 해야겠다. 내 건강을 위한 노력 부분에서는 가족들의 평가가 그리 좋지 않아서 기분이 좀 나빴지만 나의 만족감을 넘어서 뭔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걸로.

총 8개 항목. 100점으로 만점에 68.75점. 옛날사람 티 내자면 수우미양가 중 양. 그래도 내용면에서는 나쁘지 않았던 걸로 합시다.

2023년. 우리 가족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나름의 성취를 이루었으며 무엇보다 가족 전체가 흔들릴 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 다행히 우리 가족에게 닥치지 않았다는 점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애쓴 만큼 얻었고, 기도한 것보다 더 많이 받았고, 감사해야 할 일이 더 많았음을 깨닫는다.



새해 계획을 다시 읽어본다. 아이들의 계획과 소망은 ‘건강하게 잘 자라나는 것’인 것이다. 원하는 중학교에 배정되고, 새로운 친구를 잘 사귀는 것. 열심히 공부해서 더 공부를 잘하고 싶은 마음. 드럼과 기타를 잘 치고, 3점 슛 성공률을 높이고, 가족들과 함께 여행 가고 싶은 아이들의 꿈. 그 모든 소망함과 해내는 과정이 ‘자람’이고 ‘성취’이다.

작은 아이의 2024. 너의 목표와 꿈을 응원한다!


2024년. 아이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하고 있어’라고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리라.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혹은 그만두어도 어느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극강의 자유의지에 내 게으름이 덜 발목 잡히길. 원래 하던 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타성을 매몰차게 거절하길.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고, 무탈한 일상에 감사하며, 나의 일상을 자주 기록하고 되돌아보며 살아가기로. 올해 성적표에는 ‘질적으로 성장하였음’이라는 코멘트가 남을 수 있도록 애써보기로.

뭐니 뭐니해도 새해 계획식 마지막 순서는 화이팅 외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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