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제 목소리에 영 기운이 없더라. 별일 없냐고 안부 전화했는데, '그저 그래!'라고 이야기하는 네 이야기가 '하루하루가 쉽지 않아'라고 들렸던 건 내 기분 탓이었을까?
업무 때문에 정신이 나달나달 해졌을 것이고, 미친 듯이 일하다가도 갑자기 놓친 아이들 준비물이나 일정 때문에 또 머리가 새하얗게 될 것이고, 하루하루 눈에 띄게 줄어드는 체력 때문에앉았다 일어나면서 너도 모르게 아고고 소리를 내고 있을 너. 그리고 이제는 회사 가지 않지만 별반 다르지 않은 나.
내년 겨울에는 우리끼리 여행 가자.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가는 여행은 시간도 없을뿐더러 이제 비행기 오래 타는 것도 신나는 일이 아닐 테니, 동해 정도 가뿐하게 건너 삿포로로 가서 겨울 정취를 원 없이 만끽하고 오자.
인천-삿포로 직항은 2시간 반인데 왜 구글맵은 5시간이라 말하는 걸까?
너, 내가 목욕탕이랑 찜질방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지? 난 사우나나 탕 안에 들어가서 그 뜨거운 열기를 들이마시며 숨을 쉬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 얼굴은 차갑게, 몸은 뜨겁게 즐기는 노천온천! 그건 할만하더라. 온 세상이 눈으로 덮인 작은 산속 마을 조잔케이의 유명한 온천들 중에 호헤이쿄 온천으로 가보자. 리뷰에 진심인 우리 한국인들의 나쁘지 않은 후기들은 믿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지.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고 내 머리 위에 눈이 소복소복 쌓일 만큼 아주아주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보자. 집에 두고 온 남편과 아이들 생각은 1도 안 날 만큼 이게 마냥 딴 세상인 것처럼 그저 '아~좋다. 너무 좋다~!'만 연발하면서 말이지. 머리에 쌓인 눈이 녹아 얼굴로 흐르는 그 '눈 녹은 물'의 기분 좋은 차가움을 아주 여유 있게 즐겨보자고.
바깥으로 흘러나온 온천수가 하얀 김을 뿜어 내며, 눈을 녹여내며 그렇게 흘러내린다.
온천을 마치고 나와서 허기진 배는 바로 인도 카레로 달래자. 내가 먹어본 인도 카레 중에 가장 맛있었던 카레가 바로 이 호헤이쿄 온천에서 먹었던 카레리라는 것! 밀가루 냄새 1도 나지 않으며, 그 부드럽고 쫀득한 난의 식감이란! 오리지널 인도 커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투 머치 인도스럽지 않아 부담감 없이 즐길 수 있는 그 맛! 내가 오죽하면 이 '난'만 좀 사갈 수는 없을까 5초 동안 고민했다는 건 굳이 숨기지 않을게.
호헤이쿄 온천 커리. 맛있음이 사진에 다 담기지 못했다.
삿포로까지 갔는데 맥주를 빠트릴 순 없지. 이제 부어라 마셔라 하고 싶지도, 할 수도 없는 우리의 에이지. 짱구 아빠처럼 식사하며 맥주 딱 한잔이 우리 스타일이다. 삿포로 맥주 박물관은 예의상 한번 둘러봐주고, 맞은편에 있는 괜찮은 식당에 들어가서 삿포로 클래식 생맥주를 꼭 한잔하자. 노란 맥주 위에 살포시 올려져 있는 생맥주의 거품을 천천히 음미하며,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바깥 풍경을 하염없이 쳐다보자고.
대낮에 맥주 한잔 하며 눈 쌓인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괜찮은 여행 모먼트이다.
40대가 되면 진로고민 따위는 없을 줄 알았는데 어제 통화 중에 난 또 새삼 느꼈다. 무슨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며 살아가야 하는 고민은 끝도 없다는 걸. 40대 아줌마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이 드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행복한지. 어떻게 살아야 멋진 50대 아줌마가 될 수 있을지. 남편과는 할 수 없는 그 긴긴 이야기들을 끝없이 끝없이 펼쳐내어 보자.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이렇게 야무지게 무심한 너의 남자에 대하여. 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가끔은 너무 본인답게 나를 사랑하는 방식 때문에 자뭇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나의 남자에 대해서. 각자의 케이스들을 아주 상세하게 분석해 보고, 또한 전혀 논리적이지 않게 완전 서로의 편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해 주자.
삿포로 클래식 맥주이면 어떤 이야기든지 다 들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절로 생긴다.
아무리 나를 위한 여행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또 엄마이고, 주부이고, 직장인이기에 이놈의 가성비를 따지지 않을 수 없어서 털게를 산더미만큼 쌓아놓고 먹는 호사는 솔직히 무리인 듯싶다. 몇 마리 맛만 보기로 하자.
너나 나나 음식 앞에 두고 무언가 많은 행동을 해야 하는 것에 관심도 없고 젬병인 것을. 털게는 다음에 너네 남편이랑 딸내미들이랑 와서 많이 먹고 가거라.
마지막 날엔 어디 멀리 나가지 말고 시내 구경이나 여유 있게 하자. 홋카이도 대학 캠퍼스에 가서, 아무도 밟지 않은 새 눈을 뽀득뽀득 밟아보고, 오도리 공원을 쭉 거쳐서 삿포로 TV 타워 앞에서 사진 찍는 것으로 관광객의 본분을 상기시켜 보자.
관광객이라면 <삿포로 TV 타워> 같은 도시 명물들 앞에서 꼭 사진을 찍어줘야 한다.
나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것 같다. 3박 4일 정도는 엄마 없이 잘 지낼 수 있게 어서어서 너의 딸내미들을 키워라. 너무 머지않는 날에 꼭 가자. 27년 우리 우정에 잊지 못할 겨울 추억 하나 남기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