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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배 Sep 24. 2020

IT 회사 문과생의 일

판교에서 문과로 살아남기 1장

나는 서비스 기획자다.


IT 서비스를 기획한다. 그리고 판교에서 일한다. 그리고 문과다. 그리고 이제 갓 1년 차의 주니어다.


작년부터 이어진 나의 적응기는 정말 파란만장했다. 다짜고짜 외우고  없이 물어봤고 간신히 살아남았다. 아직도 적응 중이지만 이제 이곳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마냥 희미하진 않은  같다. “대애충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하고 이해를 하고 있는 수준이다.


안 그런 업무가 어디 있겠냐만, 이 업무는 정말 레퍼런스 찾기 쉽지 않다. IT 회사에 워낙 소수밖에 없고, 그들 중 정보를 공유해주고 있는 사람도 드물고 말이다. 나도 어찌어찌 알음알음 배워서 취업은 했지만, 들어오고 나니 내가 아는 건 정말 분자 단위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나만의 개인 프로젝트로 “판교에서 문과로 살아남기” 시리즈를 연재하려고 한다. 10편 정도를 써보고 싶다. 사실 나도 시니어가 아니라 그 이상 쓰면 지식이 거덜 날 것 같다.


첫 번째는 나의 일에 대한 개괄적 설명이다. 나는 뭘 하냐.


요약.

서비스 기획자는 생산자와 운영팀 사이에 ‘가교’이다.

기능의 정책과 스펙을 정의한다.

운영 팀의 요구 사항을 정리하여 생산에 전달한다.

생산 팀의 한계를 정리하여 운영팀에 전달한다.


솔직히 난 이런 밈이 좀 진부하고 재수 없다. “서비스 기획자가 뭘 하냐고? 그냥 뭐 다 하지.”


사실 우리는 다 하지 않는다. 요즘엔 꽤나 명확한 분리가 되어 있고 분업화도 잘 이루어지는 편이다. 뭐 우리 회사가 그런 걸 수도 있다.


나는 판교에서 한 메신저 서비스를 기획하고 있다. 우리 회사를 기준으로 내가 뭔 일을 담당하는지 말해주겠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인터넷 서비스 회사가 보통 어떻게 구성되는지 알아야 한다.


회사 구성 예시


IT 서비스는 크게 생산팀과 운영팀으로 나뉜다. 말 그대로다. 서비스를 만드는 곳이면 생산, 만들어진 서비스를 팔고 마케팅하고 고객을 응대하는 곳이 운영.


그런데 기획자의 업무를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 바로 여기 있다. 그 어느 쪽에도 명확하게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비스를 이렇게 만들어 주세요~ 하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만들 수는 없다. 서비스를 잘 홍보하기 위해 여러 시장 상황을 살피지만, 딥하게 그것만 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일은 마치 ‘가교’와 같다.


한쪽에서 만들기만 하고, 한쪽에서 운영만 하면 아이러니하게 서비스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열심히 뚝딱 해서 서비스를 만들었다고 하자. 일단 보이는 부분은 아름답다. 오 잘 된다. 그런데 곳곳에서 문제가 나타난다.



개발자&디자이너: 구성원들끼리 실시간으로 송수신할 수 있는 메시지 서비스입니다!

???: 우와 좋네요, 지원 플랫폼(PC&모바일)은 어떻게 되나요?

???: 우오 그럼 유료인가요 무료인가요?

???: 회원 가입 안 하고는 못 쓰나요?



참 좋은 기능이라도 만들고 나면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나온다. “이건 왜 안 되고, 이건 왜 돼요.” “이런 방식으로도 될 거 같은데 이 때는 어떻게 해요?” 등등.


기획자는 이를 ‘정의’ 하는 역할을 한다. 흔히 “정책을 정의한다.” “스펙을 정의한다.”라고 표현한다.


아마 기획자는 공감될 것이다. 회사에서 제일 많이 듣는 말이 “그래서 스펙이 뭔데??”이다. 스펙은 일종의 기능에 대한 ‘정의’ 설명서이다. 영어로는 specification, 명세서 정도가 되겠다.


스펙 문서 예시

이 기능이 뭔지, 누구한테 어떤 방식으로 제공될지에 대해서 결정하는 것이다.


이 작업이 완료되면 상세한 화면에 대한 설계로 넘어간다. 실제 이러한 기능이 이러한 화면에서 제공되었으면 좋겠다는 일종의 의견을 제공하는 것. 우리는 뭐 “화면을 그린다.”라고도 말한다. 설계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다.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이 무엇이냐? 바로 커뮤니케이터이다. 나는 이게 정말 가장 큰 역할이라고도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 ‘이해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기획자는 생산팀과 운영팀의 말을 대강 이해해서 양 쪽에 전달해줘야 한다. 뭐 이런 식이다.


CS팀: 이번 기능이 모바일에서만 제공되어서 아쉽다는 의견이 들어왔어요.

사업팀: 흠 이게 추가되면 사업의 소구 포인트가 될 수도 있겠어요, 개발 가능할까요?

기획자: 네 잠시만요, 개발자님 일전에 이 기능이 PC에서는 클라이언트 리소스가 충분치 않아서 진행하지 못했는데요, 다음 배포 버전에는 추가할 수 있을까요? 불가하다면 스펙 볼륨을 좀 줄여 볼게요.

개발자: 아 네, 가능할 것 같긴 한데요. 이거 디자인하고 마크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기획자: 아 네넵, 디자이너님 이 기능 기존에 없던 것이라 새롭게 가이드하고 마크업 진행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저희 사용 중인 창 중에 비슷한 게 있긴 한데요. 이걸 수정하면 변경 범위 최소화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디자이너: 네 그러네요, 이 화면 활용해서 다시 가이드드릴게요.

기획자: 감사합니다.



실제 이런 식이다. 지금은 운영팀 사이드에서 선 제안이 들어온 경우이지만, 반대로 개발자 사이드에서 제안이 들어오기도 한다. 가령 이것까지 지원은 불가하다, 이건 다음 버전에 제공하면 어떻겠냐 하는 등이다. 이 때도 기획자는 그들의 요구 사항의 원인까지 이해해야 하고 그것을 운영팀에 전달해줘야 한다.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말이다.


결국 양쪽에서 들어오는 여러 말들을 이해하고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비스 전반에 대해서 대단히 얕게 알고는 있다. 개발 지식도, 마케팅 현황도, 시장 점유율도, 디자인 용어도 대단히 얕게 알고는 있다. 공부했다기보다는 그냥 대화하다 보니까 이해가 되더라.


뭐 여기까지가 문과가 IT 회사에서 하는 일의 개괄적인 내용이다. 결국에 우리는 기술자는 아니라 생산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문과도 아니라 사업을 전개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 애매한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 난 그게 이 직무의 매력이라고 본다. 뭐 하나 소속된 게 없지 않은가.


당신이 기획자를 꿈꾼다면, 그것이 전문직은 아니라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냥 여기저기 발을 담그고 정리를 해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이해는 확실한 사람이다. 알아야 하는 것은 불분명할지라도 ‘이해’ 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당신은 생산자와 사업자 그들을 완벽히 이해해야 하는 사람이다.


되게 매력적인 사람이 아닐까.

“뭐 불분명해요~ 그래도 여기저기 잘 듣고 정리하고 이해는 잘해요~” 기획자는 프로 ‘언더스탠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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