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배 Oct 21. 2020

IT적 문서, 글쓰기

판교에서 문과로 살아남기 4장

나는 사실 첫 회사 생활을 광고 대행사에서 시작했다.

광고 대행사에서 10개월, 미디어렙사에서 6개월 정도를 보냈다.


광고계에서 문서를 작성하거나 글을 써야 하는 경우는 보통 제안서를 작성하거나, 광고주와 커뮤니케이션할 때이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은 바로 '힘 주기'이다.


우리는 광고주에게 잘 보여야 하기에 같은 지표도 더 잘 보이게 해야 하고, 예상 성과도 더욱 아름답게 표현해야 한다. 을은 항상 예쁨 받고 싶은 것 아닌가.


굳이 광고주와 대행사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보통 수많은 조사를 활용하여 에둘러 예쁘게 말하는 습관이 들어 있다.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 "잘 한 건 티를 내야 돼, 그래야 알아줘"

자기 PR의 시대라는 말을 밥 먹듯이 들어오며 우리는 그저 과장하고 꾸미는 것에 능숙해져 버렸다.


이런 배경을 갖고 IT 회사에 들어왔는데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다소 충격적이었다. 로봇 같았다.

효율성이 최우선이었고, 단숨에 의도가 보이는 것이 장땡이었으며, 이해가 어려우면 실패한 글이었다.


처음에 인턴 때 작성한 기획안을 들고 리더님께 갔을 때 들었던 말이 기억난다.


말을 꾸미는데 집중할 시간 1분을 아껴서 개선안 고민에 쓰세요.


효율성이 추구될 수밖에 없는 이 환경에서는 '예쁜' 것보다 '잘'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내가 이곳에 와서 말하는 법이 달라졌는지 말해보려고 한다.

처음 입사하여 "이 동네는 원래 이렇게 각박한가?" 싶은 주니어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싶다.

이 동네는 원래 이렇다.




1. 문서의 색을 뺄 것.


대학 생활 좀 해본 사람들은, 그리고 나처럼 광고업계에서 온 사람들은 문서에 색을 넣는 습관이 있다.

그래야 예쁘거든. 색뿐인가. 각종 도형과 효과를 이용해 문서를 최대한 미려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예쁜 문서는 만들어 놓고 나면 진짜 뿌듯하다.

엄청난 디자인적 재주가 있는 것 같은 자신감도 생기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러한 색을 빼는 것이 좋다, 아니 문서에 디자인 요소를 빼는 것이 좋다.

도형은 오로지 이해를 위한 보조 도구이다. 텍스트를 보조해주기만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이며, 텍스트를 읽기 쉬워야 좋은 문서이다.


그리고 디자인이 들어갔다는 것은 내용에 들어갈 노동력 일부를 디자인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보다 문제다.


당신의 노동력은 중요한 '리소스'이다.

IT 회사에서는 프로젝트에 착수하면 해당 프로젝트에 들어갈 공수를 md(Man-Day) 등으로 환산한다.

한 명의 노동력이 며칠을 고생했을 때 완료될 수 있을지 미리 어느 정도 산정하는 것이다.

당신이 기획자라면 당신이라는 리소스는 개선안 '기획'에만 쓰여야 한다.

문서의 디자인을 위해 리소스가 쓰였다면 당신 스스로 리소스를 낭비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답이 안 나오는 고민일지라도 좋은 내용에 대해서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하는 것이 좋다.

정 급하면 그냥 워드로 다다다 쳐서 보고해도 된다. 화면은 나중에 만들면 되지 않는가.

그러니 절대 문서의 디자인에 대해서 많은 공력을 투여하면 안 된다.

좋은 생각과 아이디어가 첫 번째이다.


아래 나의 대학생활 리포트를 예로 들자면 이렇다.

수많은 색과 디자인 요소만 남기고 말만 잘 보이게 하는 것.


이것이 처음에는 진짜 어렵더라.

이래도 되나 싶고 내가 생각한 고민이 괜히 더 가치 없어 보이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 회사에서는 이래도 됐다. 정말 글만 보시더라.

아이디어가 좋으면 문서가 아름다운지 아닌지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냥 이해만 되면 되지.




2. 최대한 컴팩트하게.


이 역시 지금도 매일 같이 듣고 있는 말이다.


할 말을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컴팩트하게 하라는 것.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IT 서비스는 이슈가 정말로 정말 정말 많다.

사용자들이 "아 이게 왜 안 되지?" 하면 모든 것이 우리의 이슈가 된다.

수많은 이슈의 도가니 속에서 이를 전달해야 하는 기획자들은 한 번 읽고 "아 이렇구나" 하게끔 해야 한다.

상부 보고를 해야 할 때나 혹은 개발자, 디자이너에게 전달할 때 단숨에 이해시켜야 한다.

사람을 이해시키느라 이슈를 처리할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기억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죽어도 두괄식, 무조건 한 줄 요약


나는 반드시 내가 전달해야 할 정보를 한 줄로 요약해서 서두에 적는다.

뭐 가령 아래 이슈가 있다고 하자. 이 이슈를 리더님께 보고해야 한다.



클라우드에 파일이 있다. 사용자는 1달이 지난 파일을 자동 삭제되도록 옵션을 걸어 놨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파일도 계속 보이고 있었다. 서버에 문의한 결과 저장소에서 만료 일자를 처리하지 않고 있었다. DB 저장소를 바꿨는데 만료 일자는 이전 저장소에서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니 만료 일자가 업데이트되지 않았고 사용자에게 모든 파일이 보였던 것이다. 해당 문제는 9월 10일부터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벌써 읽기 싫다. 이렇게 말하면 이슈를 말했는데도 이슈가 무엇이냐며 반론이 들어올 것이다.

일단 한 줄로 정리해야 한다.



클라우드에 파일이 있다. 사용자는 1달이 지난 파일을 자동 삭제되도록 옵션을 걸어 놨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파일도 계속 보이고 있었다. 서버에 문의한 결과 저장소에서 만료 일자를 처리하지 않고 있었다. DB 저장소를 바꿨는데 만료 일자는 이전 저장소에서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니 만료 일자가 업데이트되지 않았고 사용자에게 모든 파일이 보였던 것이다. 해당 문제는 9월 10일부터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요한 정보는 사용자에게 만료된 파일이 보인다는 것, 서버에서 저장소를 바꿨는데 처리를 안 했다는 것, 9월 10부터 발생했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서버 저장소 변경 작업으로 사용자에게 만료된 파일이 보이는 문제가 9월 10부터 발생 중입니다." 등이 될 것이다. 이후에 줄줄이 이유를 적으면 된다.


이렇게 한 줄로 정리하다 보면 본인도 이슈를 간결하게 이해하게 되고 소통에도 좋다.

나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뭐 노력은 하고 있는 편이다.



#형식에 얽매이지 말 것.


보통의 회사에는 말을 보낼 때 일종의 형식이 있다.

'안녕하세요'로 시작해 '감사합니다, OOO드림'으로 마무리되는 메일 같은 것 말이다.


이런 형식은 으레 그냥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마치 그것이 예의인 것도 같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면 이 말을 왜 계속하지 생각하게 된다.


아니 아까 안녕한다 그랬는데 왜 또 안녕한다 그래.

본문에서 감사한다 그랬는데 뭘 또 감사하다 그래.


필요 없는 형식들이 수많은 말속에 섞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결국 말의 효율성을 저해하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는 과감하게 배제하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내가 작성했던 release note (신기능 소개 글)를 바탕으로 한 번 이야기해보려 한다.

유출을 피하기 위해 기능은 대강 다른 것으로 교체했다.



그림 넣기 설정이 개선되었습니다.

직접 설정할 수 있는 효과가 다양해졌고, 크기 설정도 편집 화면에서 진행할 수 있습니다.

편집 시 크기만 선택하면 간단하게 현재 이미지 크기를 변경할 수 있고, 상세 설정을 변경하면 원하는 크기로 변경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그림 넣기 설정에서 다양한 편집 기능을 활용해 보세요.

(Image 설명)



나는 그냥 일전에 떠도는 여러 소개글을 바탕으로 형식을 재활용했다.

뭐가 바뀌었는지 간략한 소개, 자세한 설명, 많이 써보라~ 로 마무리되는 구조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여기에도 잘라낼 정보가 많았다.

이에 대해 사수님은 아래처럼 글을 수정해 주셨다.



이제 그림 넣을 때 편집을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효과를 선택할 수 있고, 원하는 크기로 이미지를 쉽게 변경할 수 있습니다.

(Image 설명)



사실 이게 다였던 글이었다. 그림을 넣을 때 편집이 가능해졌다는 것.

그런데 나는 기존 형식에 얽매여 '개선이 되었다', '상세 설명', '많이 써보세요~'로 마무리되는 구조를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말을 말이다.

상세한 내용은 이미지에서도 충분히 파악이 되는데 굳이 말을 버리지 못했다.


형식적 말을 버리면 어떤 글이든 간결해질 수 있다.

말을 틀에 넣으려 하지 않을 때 더 이해가 쉬운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이 내가 현재도 느끼고 배우는 중인  IT적 문서와 글에 대한 내용이다.

뭐 요약하면 결국 생각하는 것보다 훠얼씬 멋없게 하라는 것이다.


멋이 없어도 이해가 잘 되는 글과 문서가 이곳에서는 좋다.

조금은 정 없는 구석이기도 하지만 효율적 소통에 대한 욕심은 이 동네의 또 다른 매력 같기도 하다.

많이 공부하고 있다.


글이 마음에 들었다면 라이킷, 꾸준히 읽고 싶으시다면 구독 부탁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IT 서비스 벤치마킹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