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에서 문과로 살아남기 5장
회사에서 올 한 해를 정리하는 기획자의 날을 진행한다.
기획자들이 모여서 어떤 일을 했고 담당했던 파트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공유하는 날이다.
거기서 나는 ‘재택근무로 시작된 신입사원 적응기’ 를 한 번 말해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워낙 특수한 상황에 입사해 재택 근무로 1년을 보낸 신입사원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나에게도 올 한해를 정리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아 승낙했다.
맞다. 나는 코로나 시대에 신입으로 입사했다.
올 해 1월 2일에 첫 출근 했고, 1월 23일까지 업무에 대해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1월 28일 ~ 2월 19일까지 신입사원 연수를 갔다 왔다.
여러 교육을 통해 의지가 강력한 상태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내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한지 업무일 기준으로 4일이 흘렀고,
2월 25일 코로나로 인한 재택 근무가 시작되었다.
사무실 자리에 익숙해지기 전에 집으로 쫓겨났다.
이 생활은 어느새 9개월 째 지속되고 있다. 지금은 이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부침이 많았다. 스트레스로 인해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일반적인 ‘적응’의 과정과 확연이 달랐던 이 ‘적응’은 많은 고통을 주었다.
나의 적응기는 달리 보면 ‘비대면 직장생활’에 대한 적응 과정이었다.
코로나가 통제 가능해진다면 이 특수한 근무 환경은 사라질 수 있다.
그래도 ‘비대면 직장생활’ 이라는 커뮤니케이션 방법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롯이 컴퓨터를 매개로 커뮤니케이션 한다는 것.
마주하지 않고 업무를 하고 구성원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
이 속에서 배운 것들은 특정할 수 없는 미래에 좋은 레슨이 되지 않을까.
첫 재택근무가 시작했던 시기 첫 업무는 내 담당 파트의 CS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CS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기에 비는 시간에는 기존 설계서를 읽으며 스펙을 미리 보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씀 주셨다.
회사에 있던 짧은 기간 동안은 비교적 잘 수행했던 것 같다.
회사라는 공간적 긴장감은 이러한 공백 시간도 의미 있게 쓸 수 있는 텐션을 만들었다.
그러나 코로나가 시작되고 무질서한 삶과 함께 적절히 무너졌다.
회사에 출근할 때, 정확하게는 회사라는 공간을 향해 갈 때는 일종의 루틴이 있었다.
아침 7시 반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씻고 준비를 해서 10시~10시 30분까지의 시간을 맞춰 출근을 했다.
나는 이러한 루틴을 즐기는 편이었다.
없는 루틴도 만들어서 일정한 시간의 흐름을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좋아했다.
정연한 삶이 주는 안정감을 좋아한다.
잠도 잘 오고 다음 날에 대한 적당한 예상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택이 시작되고 자연스럽게 알람을 껐다.
10시 전에만 일어난다는 생각으로 가능한 최대로 게을러졌다.
매일 같이 정돈되지 않은 마음과 몸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환경적 긴장감이 사라지니 공백 시간에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담당했던 과제도 스펙인이 되지 못하면서 여러 복잡한 생각이 극심해졌다.
설계서를 읽다 말고 나는 이러고 있어도 될까. 이렇게 조직에 기여를 못 해도 될까…
오랜 시간 그냥 이렇게 기다려도 될까… 하며 스스로 자책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받은 일도 못 하겠다며 반납하기도 했다.
시공간적 무질서가 만든 혼란은 점점 나를 갉아 먹게 하고 결국 아프게 했다.
스트레스로 왼쪽 뇌 신경에 이상이 생겨서 얼굴 반쪽을 움직일 수 없이 아픈 상황이 된 것이다.
그제서야 빠져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말을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었다.
이런 지점에서 아프고 힘들다 라는 상태의 공유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리더님과 면담을 하고 현상태 공유 드렸고, 이후 많은 신경을 써주셨다.
적절히 업무를 주시며 무력감에서 서서히 빠져나갈 수 있게 해주셨다.
팀원 분들도 많이 걱정해주시고 출근이 있는 날에는 티타임을 청해주시기도 했다.
억지로 루틴도 만들었다.
아침엔 8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씻고 자리에 앉았다.
정돈된 상태를 가능한 선에서 유지해야 사무실 언저리쯤 되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 힘들었던 때는 오후에 매일 출근했다.
의지가 박약이라 내 바깥의 환경이 어느 정도 긴장감을 주어야 진짜로 긴장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질서는 실제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또한, 공백 시간에 할 일을 세분화했다.
1. 스펙을 읽고 카테고리 별 분리
2. 나만의 용어 사전 만들기
3. 하나의 업무 당 하나의 작은 일기 적기
4. 다른 분의 업무 메일 읽고 가상으로 대응 해보기.
이런 식으로 할 일을 정해 놓자 스펙만 읽다가 그 시간이 다변화 되는 것을 보았다.
하루하루가 지나며 자연스레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무질서한 시공간은 나에게 고민을 하게끔 하는 최선의 환경이었고, 그걸 억지로 제거하며 괜찮아졌다.
몸도 좋아졌고 말이다.
때로는 지독한 구속이 되는 ‘질서’이지만, 선택적 질서는 좋은 생각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말을 해야 안다.
심리적인 문제가 조금씩 해소될 즈음, 처음으로 과제를 시작했다.
매주가 참 떨리는 기간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적어도 되나 고민하고, 이렇게 그려도 되나 고민하며 만들고 공유했을 때 정말 심장이 쿵쾅댔다.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첫 설계서는 최대한 그럴 듯하게 하는 데 초점을 맞췄던 것 같다.
광고홍보학과를 졸업하고 웹대행사에서 10달, 광고매체사에서 6달을 보낸 나는 본래 그럴 듯 하게 보여지는 것을 상당히 주목하는 편이다. 그림이 좋아야 고객사가 예뻐하니까.
형식에 대단히 주목했다.
아 이전 설계서는 이러이러한 구성이구나. 여기 여기를 내 과제에 맞춰서 끼워 맞추면 되겠다.
이 설계서랑 제일 비슷한 것 같네. 이거를 교체해서 하면 되겠다.
기존의 것과 최대한 비슷하면 될 것 같았다.
기존 자료들 여기저기서 말을 막 붙여왔다.
뭐랄까 아는 척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나 이렇게 이렇게 공부하고 쓴 거에요… 하며 과시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하야 탄생한 첫 설계서는 대단히 장황했다.
맥락에 상관 없는 말을 하고, 필요 이상의 뜬금 없는 케이스를 정리하고, 디스크립션이 굳이 필요 없어도 적고, 다 말하고 나면 무슨 소린지 모를 설계서였다.
왠지 플로우 차트도 들어가야 할 것 같고… 정책도 들어가야 할 것 같고… 그래서 기존 정책을 괜히 적고…
내부 리뷰 때 내가 말을 하면서 망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여러 피드백이 나왔다.
이 시기에 진행했던 파트 리뷰가 참 도움이 많이 되었다.
아직까지도 두고두고 적어두고 보는 몇 가지 피드백들이 있다.
1. 내 사고의 과정을 설명하지 말고, 들어야 하는 내용을 말하기
난 문서의 플로우를 내 머리 속 생각의 흐름대로 짰다.
“이런 문제가 있어 이렇게 개선하면 좋을 것 같은데 이런 이슈가 있어 고민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개선해도 좋을 것 같은데 이런 이슈도 발생할 것 같습니다.”
개선안도 이슈도 내 고민도 잘 알아보기 힘들었다.
내 설계를 설명하는 것이지 고민을 말하고 대화하자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슈를 말하고 싶은 건가, 개선안을 말하고 싶은 건가.
보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문제를 이렇게 개선한다.’는 확고한 논리이다.
좋은 개선안을 확인하는 것이 첫번째이고, 좋은 개선안에 맞춰 이슈를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개선안 큰 덩이, 이슈 작은 덩이로 다시 정리했다.
물론 맞는 정리라는 것은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들어야 하는 내용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머리 속 사고대로 동일한 중요성을 부여하면 이도 저도 아닌 문서가 된다.
2. 개선 배경은 사용자의 Needs를 적는다.
나는 작업을 잘게 쪼개서 편하게 하려고, 개선 배경과 방안을 대단히 좁은 범위로 작성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충 적기도 했다.
(카톡의 ‘새로운 채팅방’ 기능을 예시로 들겠다.)
기존 메시지방에서 새 메시지방을 만들 수 없다.
기존 메시지방에서 새 메시지방을 만들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답을 정해 놓은 배경과 방안이다.
이미 방안에서 답을 설명해 버렸기 때문이다. 기존 메시지방에서 새 방을 만들겠다고.
결국 답이 기존 메시지방 멤버를 선택해 새로운 메시지방을 만드는 것이라 한들, 미리부터 사고의 폭을 좁힐 필요는 없다.
다시 생각해보면 사실 저런 배경으로 인입되지 않았을 것이다.
“기존 메시지방 멤버 한 두 명만 빼고 방을 만들 때 귀찮아요…” 혹은 “기존 메시지방 멤버 중 일부만 선택해서 빠르게 방을 만들고 싶어요” 이다.
Needs의 관점에서는 배경이 ‘기존 메시지방 멤버 중 한 두명을 제외하거나 추가하여 방을 만들 수 없다, 매번 메시지방 만들기로 가서 한 명씩 선택해야 한다.’ 가 될 것이다.
이에 맞춰 개선 방안도 “기존 메시지방 멤버 중 한 두 명을 제외, 추가하여 메시지방을 만들 수 있도록 한다.”
사실 이 때는 방안까지 세부적으로 다 나온 상태에서 개선 배경을 고쳤다.
만약 앞단에서 이것을 정하고 세부 영역으로 나아갔다면, 보다 명확한 개선안을 비교적 편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귀찮은 마음으로 간단하게 넘어가는 ‘개요’의 영역이 꽤나 중요한 방안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논리는 확실히 정해 놓고 피드백 듣기.
기능의 이름을 정하던 시기가 있엇다. 앞서 말했던 ‘새로운 채팅방’을 예로 가상으로 설명하자면, 그냥 새 메시지방을 만드는 것이니까 ‘+새 메시지방’ 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얕게 생각한 것은 매번 회의 때마다 피드백을 받으며 바뀌었다.
+를 빼는 게 좋을 거 같다 그러면 뺐다가, 만들기를 붙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면 붙였다가, 다시 떼었다가, 매번 휘둘리며 바뀌었다.
내가 내 논리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레이블이 좋다, 왜냐하면 무엇 때문이다.” 를 생각하고 들어갔다면 선별적 수용을 하고 대화를 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듣기만 한 것이다.
그 때 들었던 말이다. “내 논리를 확실히 정하고, 내가 제일 잘 아는 상태에서 피드백을 들어야 합니다. 본인이 이 부분에서 가장 전문적인 입장이 되어서 수용해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기억에 많이 남는 말이다.
피드백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꼭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도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피드백은 아니었지만) 혼자서 발표해보고 리뷰 진행하기.
코로나와 함께 우리는 화상회의를 적극 이용했다.
커뮤니케이션의 55%를 차지하는 비언어적 요소가 제거되고 나니, ‘말’ 그 자체가 상당히 중요하더라.
보통 우리가 대면 회의를 하면 그룹 ‘다이내믹스’ 라는 것에 빠지게 된다.
눈짓으로 저 사람이 질문을 하겠구나 하며 발의자가 말을 조절하는 것
그 과정에서 핑퐁하듯 자연스레 대화가 진행이 된다.
그런데 화면공유를 하니까,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요소가 빠지게 되고 오롯이 피피티 화면만 보게 되었다.
대중을 못 보니 설명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읽어 나가고 중간에 틈을 주어 질문이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읽어 내려 가기에만 바빴다.
그래서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설명을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스크립트를 조정하고, 쉬는 구간을 넣었다.
이 과정에서 이상한 장표가 잡히기도 하고, 조금은 명확한 전달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듣는 사람은 크게 뭐가 다른지 몰랐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의 기분상 내가 설명을 한다는 느낌이 들 수 있도록 읽어보는 과정은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대화’가 본격적으로 많아지기 시작한 시점이 9월인 것 같다.
디자인, 개발 리뷰가 끝나고 마침 다른 과제도 중간에 들어와서 정말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뭐 이 시기가 아니어도 대화는 항상 있어 왔다.
모든 것은 오롯이 ‘메시지’로만 이루어졌다.
멀리 있는 사람과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당연히 ‘메시지’ 아니겠는가.
이 ‘메시지’로 일한다는 것이 꽤 많은 문제를 파생시킨다.
신입에게는 더 그렇다. 메시지로 말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이 어떨지 전혀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첫 대화를 메시지로 시작하다 보니 메시지의 어투를 실제 사람의 성향으로 치환 시키게 된다.
이 메시지 어투는 대부분 엄격하게만 보인다.
실제로 ‘안녕하세요오~요것 좀 여쭤보고 싶어서용!’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상대방을 상당히 엄격하고 단호한 사람으로 여기게 되면 지레 겁을 먹게 된다.
여기서 더 말하고 물어봐도 괜찮을까…? 하며 말을 집어넣기도 한다.
안 그래도 질문을 잘 못 하는 한국인 특성 상, 얼굴 한 번 보고 물어볼 수 없는 이 상황은 질문을 한 개 두 개 속으로 삭혀 안 하게 만들어 버린다.
말을 삭히면 혼자 알아서 하기 마련, 보통 더 오래 걸리고 옳지 않은 편이 많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즘에도 꾸준히 노력 중인데, 일단 상대방의 메시지를 내가 맘대로 기분 좋게 읽어 본다.
상대방이 웃으면서 보냈겠지 하며 그냥 멋대로 생각한다.
우스운 얘기지만 이러면 그래도 자신감이 생긴다.
엔터는 뻔뻔하게 누르기로 했다.
그래봤자 하나의 메시지이다.
메모장에서 할 말을 잘 정리했다면 입력창에 넣자 마자 바로 엔터를 누르는 습관을 익히는 중이다.
보통 입력창에 적어 놓고 엔터를 누르기 전 고민이 가장 많아진다.
그것이 질문이건, 다른 종류의 말이건 괜찮을까? 하는 생각에 망설인다.
그래서 “엔터를 바로 누른다.” 라는 원칙을 정했다.
할 말은 메모장에서 두괄식으로 잘 정리하고, 입력창에 넣으면 엔터는 바로 누른다.
질문도 알아 듣기 힘들면 더 답하기 싫어 진다는 생각이다.
잘 정돈하여 읽으며 이해가 쉽다면 그나마 낫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메모장에서 필히 두괄적으로 정리하고 옮겼다면 바로 엔터를 누른다, 메일도 그렇다.
하지만 메모장에 적어나가기 전 스스로 아예 참작하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꾸준히 연습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아울러 단순한 질문과 답의 영역을 초월한, 고차원적 판단의 대화도 꾸준히 연습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 상황에서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표현 방식을 바탕으로 대화를 할 때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같은 것들 말이다.
이상이다, 전문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정말 개인적인 이야기다.
인생에 대해서도 큰 레슨이 되었던 한 해였던 것 같다.
그것이 업무에 대한 것이든 개인적인 문제든 결국 ‘말’이 구성하는 것이구나… 하며,
좋은 ‘말’이 무엇일지 많은 탐구를 할 수 있었던 한 해였다.
아마 죽을 때까지 더 배울 거 같다. 사실 아직도 적응은 끝나지 않았다.
노력해야지. 지금은 꽤 행복… 아니 버틸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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