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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bae lee Apr 09. 2021

미쿡공돌이에서 VC가 되기까지 (6)

삼성을 이렇게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편은,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류의 글입니다. :) 최대한 담담하게 써 보겠습니다.


2010년 고민이 깊어갈 때쯤, 어느 날 갑자기 LinkedIn 을 통해 불쑥 메세지 하나를 받았습니다.



삼성전자에서, 정확히는 Samsung America 에서, 이렇게 불쑥 예고 없이 행사 홍보를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제 추측컨데 실리콘밸리에서 일하고 있는 Kim Lee Park Choi 등등 다 포함해서 우리말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전부 spray and pray 를 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아무튼, 정확히 뭐가 좋은지 몰랐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BADA platform, 지금은 Tizen 으로 바뀌어 주로 스마트TV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삼성의 "자체적인" OS 플랫폼 홍보를 하러 미국땅 까지 와서 저런 행사를 하는구나 싶었고, Apple 직원이자 iPhone 사용자였지만 공짜 행사 공짜 밥을 준다는데 why not? 하면서 참석하겠다고 이메일로 신청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일이 되어서는 (제가 실제로 바빴는지 아니면 막판에 안 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든지간에) 막판에 불참하겠다고 메세지를 보냈었네요.



그랬더니 또 저 분에게 이메일이 왔습니다.


인생은 사실... "There is no free lunch" 라고 항상 Ken 이 이야기를 해 왔었는데... 딱 이 케이스였네요.


지금은 저 이메일 서명에 있는 "Strategic HR Team" 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만, 당시에는 관심이 없었으니 눈에 들어 오지 않았던 것 같고, 오직 밥 사주겠다는 이야기만으로 와 닿았어서, 또 다시 why not? 하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단 둘이서 점심을 하게 되었구요.


만나서 받은 느낌은, 그냥 평범한 아저씨였고, 그래서 "저는 이러이러한 사람입니다 한국국적이구요 아직 군대 안 갔지만 이러이러해서 지금 애플에서 대충 이런 일을 하고 있어요" 라고 열심히 자기 소개를 한 후에, 밥을 잘 먹고, 경쾌한 마음으로 헤어졌었네요.

이 날은 6월 15일 이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2주 뒤에, 개인메일로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이 연락을 받고 (나쁘지 않은 의미에서) 머리를 탁! 하고 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 이래서 저 아저씨가 나한테 밥을 사 주려고 했던 거구나.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기도 하는군. 흠... ' 하지만 이 때는 6월 이었고, 아직 제 마음은 100% 귀국에는 전혀 맞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갈등이 많았었습니다.


그 후 이메일들이 많이 오갔고, 모두 여기에 올려 보겠습니다.


(제 옛날 피츠버그 시절, 지금은 없어진 전화번호를 또 보니 감회 새롭네요.)


8월까지는 본의였든 아니었든 간에 제가 튕기는 스탠스로 포지셔닝 되었나 봅니다. 물론 진짜 바빴을 수도 있습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어쨌든 이 글을 쓰는 덕에 이렇게 계속 옛 메일을 찾아 보고 사건의 전후과정과 진실 그리고 당시의 추억과 sentiment 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어서, 이 글을 쓰는 즐거움이 또 이런 곳에서 계속 오네요.)


그리고 또 지금 보니 9월초에 저렇게 인터뷰를 제안한 건 분명히 다른 회사 어느 누군가를 또 원격 면접을 보기 위해 부킹을 해 놓은 슬롯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중요한 건 아니구요.



여전히, 저게 100% 사실이었는지 아닌지는 지금도 가물가물합니다. 아무튼 충분히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하려고 했던 게 전달이 되었던지, 아니면 저 쪽에서는 옳거니 싶어 입질이 왔구나 싶었던지, 바로 다음 날 회신이 옵니다.





자, 이 1차 전화 인터뷰에 대한 이메일 기록은 없지만, 이 날의 기억만큼은 제 머릿 속에 완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애플의 Mariani One 건물에서 일하면서 임원과 평사원 구분 없이 모든 임직원들은 문을 닫고 일할 수 있는 5평 정도 크기의 1인 개인오피스를 썼습니다. 한국 기준으로는 초호화 럭셔리이죠. 뭐 넓은 미국땅이고 또 덩치 큰 대기업이니까 가능했다고 봐야겠죠.


서부 시간으로 저녁 때 일과를 마치고 문 닫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집에서 전화를 받은 것도 아니고, 현 직장 사무실 내에서 다른 회사와의 인터뷰를 전화로 본다는 사실 자체가 제겐 뭔가 죄스러웠고 조바심이 크게 났습니다. 등골이 아주 약간 서늘한 상태에서, 목소리 떨리지 않기 위해 가다듬으며 "이인배 입니다 안녕하세요" 라고 운을 떼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통 테크니컬 인터뷰는 (아무리 전화인터뷰 라고 해도) 코딩개념 질문을 몇 가지 할 수도 있을 테니, 머리를 팽팽 돌릴 준비를 어느 정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인터뷰 질문의 시퀀스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순서가 약간 뒤바뀌었을 수 있습니다.)


Q1. 소속 부서 이름이 뭐에요?
Q2. 소속 부서에 엔지니어 몇 명이 근무하고 있나요?
Q3. 부서장 full name 이 뭐에요?
Q4. 부서장의 보스 이름이 뭐에요?
Q5. 그 분은 몇 개 팀이랑 몇 명의 엔지니어를 거느리고 있나요?
...


중간 부터는 속으로 '어? 뭔가... 이상한데...' 를 느꼈습니다. ㅎㅎㅎ... 그리고 후반부터는 '... ㅇ ㅏ ... 이들은 지금 조직도를 reverse engineering 하려고 하는구나' 라고 느끼며, 삐져 나오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엄청나게 어려운 질문들을 하실 줄 알았는데. 관심이 있는 건 지금 내가 일하는 회사가 어떤 상황인지만 관심이 있구나. 물론 그게 수치스럽게 와 닿았다거나, 가소로웠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핀트가 완전히 맞지 않은 일종의 이상한 인터뷰였고, 예상 못한 이런 스토리 전개가 살짝 충격이었다는 게 너무나 기억에 남은 날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 내용을 아예 커버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주로, 어떤 툴이나 환경에서 코딩을 하고 있냐고 묻거나, 현재 개발하고 있는 시스템의 구조가 어떻게 되고, 그 중에서 어떤 부분 개발을 하고 있느냐는 류의 질문도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략 이런 아키텍처/구조가 있는데 나는 주로 어떤 레이어 쪽의 개발, 정확히는 코드의 개선과 보수, 그리고 새로운 반도체 (같은 크기지만 용량이 더 크고 나노미터 공정은 더 첨단버전) 를 삼성 도시바 등에게 공급 받으면 잘 호환이 되도록 새로운 tech component adoption 을 위해 해야 하는 일들에 주니어 레벨로 관여 한다, 등의 non-confidential 위주의 대답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 저는 스마트폰을 만드는 무선사업부 조직과 면접을 본 건데, 그래서 이 분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밖에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는 그런 비하인드 과정과 배경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간략히 표현하면, 반도체사업부에서 반도체 칩 제품에 포함되어 있던 펌웨어를 그 동안 쓰다가, 다른 방식, 즉 더 이상 내재되지 않은 그런 방식의 (컴퓨터로 치면 베어본 같은?) 칩을 가져다 쓰고 이를 위해 해당 코드를 본체의 OS 내에 심고 싶었기 때문에, 무선사업부 입장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더 low-level 분야 코딩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관련해서 실무자들이 '본인들은 잘 모르는 분야에서 일을 하는 사람'을 앉혀 놓고 인터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였습니다. 그래서 핵심은 이 사람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를 가늠한다기 보다는 어쨌든 조직을 bootstrap 해서 세팅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저 같이 스펙 상으로 매칭되는 그리고 사기꾼 같지는 않은 사람들이 무조건 필요했던 거고, 저는 이런 걸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타이밍과 운 좋게 면접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몇 주 뒤에 다시 인사과 와의 논의, 정확히는 이제 스피드데이팅이 시작됩니다.

저도 이제는 연말이 다가 오고, 병무청에서 허락한 데드라인인 2010년 말일까지는 확실히 상황이 정리되어 다음 행보가 정해져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인사과의 "티타임 합시다" 는 이메일에다가 "빨리 진도 좀 뺍시다" 는 푸쉬를 하게 되었네요.




12월 말에 비행기를 타려면, 몇 주 정도는 살림 정리 및 미국친구들과의 이별을 고하는 시간이 필요할 거고, 그러면 퇴사일을 12월 중순, 그리고 11월 말엔 무조건 offer signing 까지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인사과에서 그렇게 진도를 맞춰 주겠다고 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11월 12일에 2차이자 최종이 된 임원 인터뷰를 봤습니다. 해당 인터뷰 절차도 매우 간소했는데, 왜 "간소" 라는 표현을 썼냐면... 너무 짧고 답은 정해져 있던, 형식적인 절차에 가까운 걸로 판명...


당일에 (휴가를 내고? 아프다고 병가를 쓰겠다고 했었나?) Samsung America 오피스로 찾아 가서, 화상컨퍼런스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 회의테이블에 앉아서, 바다 건너 수원에서 접속하신 그룹장 (상무급 아저씨) 그리고 인사과 수장 (부장 or higher) 분과 어색한 상견례 및 아주 짧은 Q&A 한두개 (ex. "......... 삼성에 왜 들어 오고 싶은가?") 만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1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느낀 화상콜이 끝나고, 휴 하고 한 번 숨을 내 쉬자 마자, 옆자리에 같이 앉아 있던 (출장 나온 인사과 과장님이) 종이를 한 장 밀며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 준비해 왔는데 잘 좀 고려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라고 바로 비공식 offer 를 출력해 와서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또 속으로 '... 뭐야 이번 인터뷰도 나만 몰랐던 작전의 결과였어?' 라는 생각이 지나갔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오갔던 대화는 대략 이랬습니다. (이 부분은 각색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마치 차린 찬이 별로 없어 송구하다는 양) "현업에서는 사실 꼭 모시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저희는 아무래도 한국이다 보니까... 실리콘밸리랑은 좀 차이가 많이 날 수 밖에... 그래서 이렇게... 머쓱..."
(마치 이런 협상 경험이 많은 노련한 인터뷰이인 양) "아 예. ... 이해합니다... 뭐 그러면 제 생각에는... 최대한 잘 배려 해 주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치 큰 선심을 써 주셔서 감사하다는 양) "아 예. ...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고 잘 고려해서 나중에 다시 최종적으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좀 더 기다린 후에, 제가 마지막 initiate 를 합니다.

11월말이 다가왔고, 답을 들어야 겠으니까요.



이 메일을 받았을 때, 저는 뛸 듯이 기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안도의 한숨이 크게 나왔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미래는, 다음 행선지는 이렇게 결정 되었구나, 싶었습니다.


사실, 삼성이랑 이야기를 했던 기간 내내 거의 동시에 LG전자와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른 경로를 통해 인사과와 연락을 받았고, 마찬가지로 무선사업부 연구소 포지션으로 모실 수 있겠다는 그런 반응 하에, 어떻게 할까 저울질을 계속 속으로 했고, 막판까지 keep 했다가 삼성으로부터의 offer 를 받은 후에는 과감하게 버리는 카드로 (LG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활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LG에서 스마트폰 사업을 접는다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또 한 가지는, 삼성은 처음부터 "우리는 병특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 라는 tone 이었는데, LG에서는 "올해 TO는 다 소진되어 없는데, 일단 입사부터 하면 나중에 새로 TO를 받을 때 해결해 주겠다" 는 이메일 내용도 있었네요. 그래서 안 그래도 매력도가 더 낮았던 브랜드였는데, 별로 와 닿지 않는 그런 차이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메일을 찾아 보니, LG와의 대화는 7월까지의 내용만 검색되고, 더 못 찾겠어서... 어쨌든 제 맘속에는 별로 갈 생각이 없는 회사였는데 당시에 관계자 분들을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하다는 말씀밖에는 다시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모쪼록 용서를...)




내용이 장황했네요.

어쨌든.


사건의 전개는 당시에 이렇게 흘러갔었고, 이렇게 저는 삼성전자에서 병역특례를 약속 받고 취직이 확정된 상황에서 한국으로 귀국을 하게 됩니다. 혹자는 "넌 대단한 실력의 놈이었나보다, 삼성에서 병특 하는 거 어렵다고 하던데" 라고도 해 주셨고, "군대같은 직장에 군대 해결하러 잘 들어갔네" 라고 대부분 생각해 주신 것 같습니다. 제 마음 속으로도, 10년의 기간 동안 나는 미국인이나 다름 없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다시피 정체성을 다져 가며 미국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데에 전혀 문제 없도록 최적화 해 놓은 인생이었는데, 이렇게 한국회사에 들어가 직장인 생활을 하게 되는구나, 인생 별거 없네, 회귀를 할 운명이었네, 라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어쨌든.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코 앞에 닥쳤으니, 더 이상 움츠러들지 말고, 가슴 펴고 앞으로 나아가야겠죠. 마음 단단히 먹고, 모국으로 돌아가서, 어차피 정해져 있는 3년이라는 기간 동안, 나는 최선을 다 하면 되고 또 잘 살아 남아서 문제 일으키지 않는 순탄한 근무 생활을 하면 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습니다. 하면 되지 않을까. 사람이 못 할 일도 아니고. 최전방 또는 전쟁터에 끌려 가는 것도 아닌데. 내가 맞추면 되겠지. 이런 생각을 계속 하며, 저는 아름다웠던 2년 반의 샌프란시스코 생활과 살림과 친구관계를 정리하고, 다음을 또 기약하며,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 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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