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는 현실이 발목을 잡기 시작하다
애플에서의 경험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timing-wise the best place to be at for a guy like me" 이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저렇게 표현을 하는 이유는, 전편에도 '첫 단추' 라는 표현을 썼었는데, 말 그대로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어서 입니다. 소위 신입사원급으로서 회사가 J커브를 그리며 더욱 더 성장을 하던 상황에 틈새직업을 얻어서 첫 직장경험을 해 보게 된 거니까요. 애플을 간절히 원했던 것도 아니고, storage firmware 라는 분야에 사명감을 갖고 뛰어든 것도 아니고, 단지 '군대를 최대한 미루고 싶으니 어디든 제발 붙여주라'는 심정 속에서 지원했고 합격한 회사였기 때문에.
암튼, 애플의 상황은 위 그래프처럼 이미 iPod & Mac 사업이 안정적으로 성장 중이었고, 그 위에 iPhone 이라는 새로운 제품군을 대박을 터트린 직후였으니, 몇일 전 상장을 한 쿠팡 기준으로 비유를 하자면 이커머스가 이미 터진 상태이고 그 위에 로켓배송을 얹기 시작했을 때의 사업 가속도가 붙는 느낌이랑 비슷하지 않았을까 해요. 암튼 세상을 바꾸는 태풍 속에서 월급 받아 가면서 일을 하고 있다는 그런 자부심과 보람이 저를 포함 모두에게 항상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항상 회사 내에서는 주위를 둘러 보며 '다들 A급 이상 S급 실력자들 같은데 나는 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고 아닌 것 같고...' 라는 두려움과 압박감을 느끼게 해 주었던, 그런 직장이었습니다. 이 속에서 내가 인정받고 잘 하려면 기본기는 물론이고 +alpha 의 비장의 뭔가를 내가 갖춰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뭘까, 라는 진지한 고민을 갖게 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정말 즐거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팀 사람들 보다 더 입맞과 유머코드가 잘 맞는 옆팀 사람들 (=반도체공급사들을 상대하던 Engineering Program Manager 라는, 기술도 이해하지만 좀 더 관리/기획/운영 업무에 가까운 일을 하던 좀 더 "less geeky" 한 사람들)과 주로 점심을 같이 먹고 오피스 전우애를 쌓기도 했고, 어떻게든 칼퇴근을 해서 1시간 20분짜리 회사 셔틀을 타고 샌프란 다운타운에서 다른 테크회사에 일하는 대학교 동창들과 해피아워 맛집 뽀개고 돌아다니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주말에는 틈만 나면 샌프란이라는 그림같은 데스티네이션시티, 내가 사는 주소지, 정말 할 게 많다고 여겨졌던 그런 미국 대도시의 삶을 즐기는 데에 온전히 집중하고 살았습니다.
추억에 남는 경험을 꼽자면, 사실 정말 많지만, 샌프란에서 회사까지 70km 되는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몇 번 해 봤던 것이 top 으로 꼽힙니다. 네, 70km 입니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4시간을 천천히 달리며 중간에 몇 번 쉬고 자전거복 윗도리 뒷주머니에 넣어 놓은 에너지바를 먹으며 달려서 출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미친 짓 같았는데, 그리고 자전거에서 내릴 때 두 다리가 펑크난 것 처럼 땅으로 무너질 뻔 했는데 (미국영어 표현으로 I was bonked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뜻입니다), 나중에는 익숙해 져서 엉덩이만 뻐근하고 괜찮더라구요. 그 정도로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대학교 때부터는 유학생들이나 한국인들이랑은 굳이 어울려 지내지 않았고, 술 억지로 먹기 싫다는 그런 강박관념 때문에 솔직히 일부러 한국인이 아닌 척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졸업하고 나서도 사실 한국인들이랑 별로 어울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고, 그래서 한인 프레젠스가 높지는 않은 샌프란에서도 아무 문제 없이 완전히 로컬화 되어 미국인들 틈바구니에서 정말 재밌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우리말을 쓰지 않고 살았고 김치는 커녕 한국음식을 한달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했던 그런 변절자+교포3세 같은 캐릭터 였다고나 할까요...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긴 하네요.)
그러던 어느 날, 아마 2010년 중순 이었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10년 동안 항상 마음 한 켠 어두운 곳에 숨어 있던 걱정이 불쑥 앞으로 튀어나와서 제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나 정말 계속 이렇게 살까? 아니면 미국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까?'
선택지가 없는 대부분의 상황은 별로 스트레스를 주거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 같지 않습니다. 반대로,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생각과 마음의 부담을 주게 되는 것 같고요.
저는 미국에 오래 살게 되었지만 평생 한국국적 보유자였고, 수 년 전 지원했던 카투사는 아깝게도 떨어졌었고 (토플점수가 너무 높게 나왔던 거라로 스스로를 위안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 보니 병역의 의무 때문에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 가던가 아니면 다른 길을 찾던가 해야 하는 여느 대한민국 국민과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보통 유학생들은 사회 재적응 런웨이를 남겨 두기 위해 1학년이나 2학년 때 주로 휴학을 하고, 현역 등의 복무를 다녀 온다고 들었습니다. 요새는 또 코로나 때문에 자원입대 지원자 수가 너무 늘어나서 오히려 입대하고 싶은 타이밍에도 입대를 하지 못 한다고 들었고...
암튼 석사까지 취득을 했었기 때문에 (정말로 돌이켜 보면 일석이조 였죠) 만 27세가 되는 해의 마지막 날까지 병역의무가 자동으로 연장되어 있던 상태였고, 그게 2010년 12월 31일이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2년 반 정도 애플에서 일을 할 수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애플에서는 입사하자 마자 취업허가였던 OPT에서 취업비자인 H1B로 전환을 한 상황이었고, 또 (지금은 좀 가물가물하지만) 3년 + 3년연장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혹시 몰라 2010년 초에 일부러 빨리 리프레시를 한 번 해 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얹어, 저는 매니저인 Ken 에게 사실 2009년 부터 슬쩍 영주권 스폰서십에 대한 의사를 떠 보기 위해 이야기를 한 번 해 본 상황이었습니다. Ken 은 취업비자가 이미 있는데 굳이? 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 같지만, 어쨌든 2010년엔 HR을 통해서 신청을 결국 넣어 주기로 했고, 또 normal track 이 아니라 expedited track 으로 넣어 줬던 것 같네요. 제가 은근히 강하게 졸랐었나 봅니다. 그래서 제가 HR에게 안내를 받기로는 1~2년 정도 내에 보통 영주권 최종단계가 마무리 된다고 이야기를 들어 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머릿속과 마음이 전에 없이 불안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진짜 인생에서의 중대한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습니다.
즉, 회사 덕에 앞으로는 가만히 있으면 영주권자가 되어 (물론 회사에게 다년 간 충성을 다 해야 하는 그런 의무가 남게 되겠지만) 탈 없이 안정적으로 캘리포니안으로서 안착해서 눌러 앉을 수 있을 수 있게 된 별로 부담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사실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나를 정말 가만히 놔 둘까? 라는 상상을 하게 되면서, 전혀 답을 모르겠는 걸 깨달아서 였던 게 컸었습니다.
미국 정부와 미국 직장은 나보고 있어도 된다고 하고 합법적으로 체류하게 해 줄 수 있게 되는 건데, 문제는 완전히 영주권자가 되기 전에 모국에서 허락해 준 기한이 만료가 되는 거죠. 즉, 여권상의 유효기간이 끝나 버리게 되는 겁니다. 외교부에서는 병무청이 허락해 준 만큼만 복수여권을 발급해 줬었습니다.
그래서, '이 불안함과 궁금증을 해소를 하려면, 그럼 나는 샌프란의 한국 영사관에 연락해서 물어 봐야 하나?' 라는 생각이, '근데 그런 질문을 한다면 "네 저는 사실 한국 돌아가기 싫어서 이런 머리를 굴리는 중이에요" 라는 티를 내게 되는 것 아닌가?' 가 되지 않나? 로 이어지고, 결국 '내가 만일 배를 째고 2010년을 넘겨서 미국에 잔류하게 되면, 나중에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나는 그 땐 이미 빨간줄 레코드 보유자가 되는 것인가' 까지 생각의 진도가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주변 친구들에겐 당연히 공유를 했었습니다. 미국 친구들은 "야 너 우리가 봐도 별로 한국적이지도 않은데 왜 굳이 돌아가냐 그냥 눌러 앉아라 가지 마" 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너가 정 불안하고 필요로 하면 위장결혼도 내가 해 줄게 크크" 라고 이야기 했던 친구도 실제로 있었습니다. 마음은 너무 고마웠고 또 듣는 순간 0.X초 흔들렸었지만, 서로의 인생을 그렇게 쉽게 장난질 치듯이 involve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거절을 하기도 했었네요.
회사 사람들에겐 이런 고민을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진짜로 이해를 하지 못할 것 같았고, 이미 회사에선 도와줄 방법을 다 제공해 준 상황이기도 했으니까요.
결국 부모님의 설득 끝에, 저는 한국으로 돌아 가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의 당시 생각으로는, 지금 너무 잘 되고 있는데, 이걸 버려야 하나? 포기해야 하나? 아깝지 않나? 라는 미련이 정말 컸습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만일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거라면, 어떤 후폭풍과 미래의 이불킥 후회가 있을까, 를 생각해 보았고, 자칫하면 인생이 꼬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싫어하는 것을 피해 가기 위해 선택한 길이라는 걸 남이 봐도 티가 날 수도 있는 그런 결정, 그리고 결국 내가 스스로 평생 잊지 못할 그런 결정, 그런 무게의 짐을 안고 과연 평생 떳떳하게 살 자신이 있을까?'
지금 A 와 B 를 놓고 고민을 했을 때, 기회비용이 뭘까를 따지는 방법이 있는 것 처럼, 저는 배 째고 미국에 눌러앉는 옵션과, 다 내려 놓고 귀국을 하고 군대이슈를 해결한다는 옵션 중에서, '후회비용'이 뭘까를 저는 따졌던 것 같네요.
애플로 시작한 bay area 에서의 개발자 커리어를 내려 놓고 귀국을 해 버린다면 너무 아깝겠지만, 반대로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저는 당시에 또 할아버지 할머니 네 분이 모두 살아 계셨기 때문에 만일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그런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참으로 후회가 막심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또는 미국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예를 들면 회사에서 잘리거나 또는 스스로의 건강 문제 등이 생겨서 미국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 하게 되고 한국에 돌아가서 더 저렴한 의료비를 내며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만일 나의 선택 때문에 스텝이 꼬이게 되면 심적으로 너무 힘들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우리말을 할 때 혀가 꼬일 정도로 미국 사회에서 살아남아 보고 싶었고 할 수 있는 한 해 보고 싶었던 저로서도, 그 어떤 방법을 적용하던간에 미국에 억지로 남는 건 장기적으로 현명한 선택이 아닌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천만다행인 결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이인배라는 한쿡인이 과연 한국 사회에 재적응을 잘 할 수 있을까는 차치하고서라도, 병역문제를 진짜로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의 관점에서는, 문제해결의 출발점이 뾰족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공대 출신 개발자였기 때문에 병역특례라는 제도는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병특 자리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감이 전혀 없었구요.
대학교의 job fair 에서는 한국기업을 사실 보기는 힘들었고, 그런 식으로 채용을 하러 오지는 않고 오히려 설명회를 따로 개최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만나러 삼성, LG 등의 대기업에서 미국으로 나온다는 이야기는 졸업 한참 후에 듣게 되었어서, 연결지점이나 실마리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 참, 1학년~3학년 여름방학 땐 서울로 돌아와서 LG전자 그리고 삼성SDS에서 인턴십을 하긴 했었네요. 그런데 딱히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었습니다. 일단 저랑 맞지 않는 부서들에서 대학생 나부랭이로서 주로 번역알바만 해 드리는 식의 1달 인턴십을 하고 나왔었기 때문에, 별로 good lead 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구세주같이 최고의 타이밍에 나타나 준 그런 이직의 기회가 찾아 옵니다.
바로 한국의 삼성전자입니다.
애플의 경쟁사 그 삼성전자 맞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쓰는 걸로 하고, 삼성전자에 어떻게 정확히 취직을 하게 되었는지의 이야기는 한 편 전체를 할애할 만한 interesting 한 스토리임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