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글)
저는 어제 부로 저의 직장인 케이큐브벤처스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예정보다 빨리 떠나게 되어, 제가 시작한 ’케이큐브 이야기’ 연재를 더 해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그만 두게 되었는데, 돌이켜 보니 너무나 짧게 거쳐 가지만 개인적으로 너무 의미가 큰 직장에 대해, 회고 차원에서 몇 자 적어 보고 싶었습니다.
(실은 전 부치고 차례 지낼 필요가 없어서 이렇게 글이나 끄적대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작년부터 이번 달까지 1년 반 정도를 다녔던 케이큐브벤처스는 벤처캐피탈, 즉 창업투자회사 입니다. 사전적 의미에 좀 더 가깝게 설명을 하자면, 한국벤처캐피탈협회(KVCA)의 회원사로 등록되어 있으며 중소기업창업지원법의 틀 내에서 정한 방식대로 스타트업에 투자를 하는 업이 본업인 회사이고, 이를 외부의 돈을 굴려 수익을 내는 것이 1차적 목표인 펀드 비즈니스이기도 합니다. (벤처캐피탈이라고 부를 수 있는 회사는 크게 ‘신기술금융사’ 그리고 ‘창업투자회사’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위키 페이지나 구글 검색을 활용하시면 좋습니다, 제가 아는 다른 투자자들 중에는 이런 좋은 블로그 #1, #2를 운영하시는 분들도 또 있구요.)
하지만 케이큐브는 단순한 금융회사가 아니라, 초기 기업에 전문으로 투자를 하는 전문성 있는 벤처캐피탈이며, 또한 카카오의 자회사이기도 합니다. 카카오의 김범수 의장님께서 2012년에 좋은 뜻을 품고 회사를 설립하셨고, 현재 카카오의 대표이시기도 한 임지훈 대표 (소프트뱅크벤처스코리아 출신이셨고 오래 전부터 개인 블로그를 통해 한국의 벤처캐피탈에 대한 전반적 좋은 이야기를 많이 쓰신 분이기도 하지요) 의 적극적인 투자 하에, 지금은 다 합해서 1000억원 이상의 전체펀드를 운용하는 회사가 되었습니다. 좋은 소프트웨어 위주의 스타트업들에게 최대한 빨리 투자해서 빨리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분들이 바삐 투자현장을 뛰어 다니는 평판 투자사이며 (기억해 주세요!) 서비스, 게임, 하이테크 회사들에게 그 간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또한, 저희가 투자를 했다가 카카오에게 인수된 키즈노트라는 서비스도 있고, 또 초기에 투자해 드린 회사 중에는 이제 상장사도 한 곳 나올 예정이라, 아무튼 여러 모로 인정받고 있고 또 세상에 좋은 기여를 하고 있는 회사라고 봐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팔 안으로 굽는 피투자사들 자랑은 나중에? :)
케이큐브벤처스에서 심사역으로 17개월 근무 하면서, 저는 참으로 많은 성장을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원래 공돌이 (즉 컴퓨터를 다루던 전산쟁이/프로그래머/geek 등) 출신이고, 케이큐브에 입사하기 직전까지 나름 코드를 짜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이제는 기계와 대화하는 것은 그만 하고 사람들과 일을 해 보고 싶었던 강한 욕구 때문에, 무작정 지원을 해서 “뭔가 너무 일이 매력적으로 보였고, 또 똑똑한 대기업 직원들이 빨리 뛰쳐 나와서 마음 편하게 창업을 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데에 이바지하고 싶어요!” 라는 각을 세워 케이큐브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같고, 또 그 만큼 제가 적응과 증명을 해야 할 필요가 컸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업무를 소화하기 위해 예전의 제 스킬셋들을 버리고 투자심사+사후관리 등의 역할을 맡아서 해 내어야만 했으니까요. 초반의 부족했던 저를 잘 키워 주신 저희 파트너 분들께 큰 감사와 애정을 표합니다.
(제가 원래 했던 일은 정확히는 펌웨어 개발, 즉 하드웨어를 직접 다루는 소프트웨어를 짜거나 유지/보수를 하는 일이었습니다. 컴퓨터공학 전공을 따라서 어쩌다가 아이팟을 만드는 부서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삼성으로 이직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계속 플래시메모리 스토리지 관련 개발업무를 주로 했었죠. 요새 젊은 사람들 주로 배우는 언어들 말고, 또 스타트업 분들에게 조차 약간 고대어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C, Assembly, 이런 언어로 RTOS/커널 단에서 깨작대었었죠. 임베디드 환경에서 저장해 놓은 바이트들 중에 데이터 깨지는지 테스트하고, 새로운 반도체 공정이 나오면 공급 받아서 호환성 검증을 하는 등, 바로 zero와 one과 대화하고 씨름하는… 엄청나게 low level 프로그래밍 이었습니다. 그걸 6년이나 했다니… 스스로도 참 대견합니다. 물론, 너무나 좋은 경험이었고, 덕분에 실리콘밸리에서 일해 볼 계기와 또한 흘러흘러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된 자격을 얻게 된 것이라, 당연히! 후회는 없습니다.)
케이큐브에서 투자팀의 심사역 역할로서 했던 일들은… 실로 다양했습니다. 수많은 회사들의 사업계획서 검토, 그 중 일부 면대면 미팅, 투자유치발표회 참관, 네트워킹, 경진대회 서류심사, 계약진행 (협상 및 날인 등), 보고서 작성, 그리고 투자 후 담당 회사에 대한 사후관리… 정도가 메인 업무들 이었다고 보시면 되구요, 그 외에 당연히 해외출장 (회사 검토가 되었든 컨퍼런스 참석이 되었든) 등의 역할도 저희들은 돌아 가며 수행했었습니다. 곁들여서, 회사 직원분들의 이메일 인터넷 등 컴퓨터 관련 문제가 있었을 때 도우미 (공돌이 출신이다보니 ㅎㅎ), 아직 한국에 출시되지 않은 VR기기 등 선진 문물 early adopting (저희는 그래서 사무실에 HTC Vive가 6월부터 있었습니다!), 케이큐브 패밀리데이 때 배경음악 깔기 담당 등… 상황에 따라 참 다양했던 것 같습니다.
케이큐브에서 근무하면서 얻었던 제일 큰 것을 꼽아 보자면, 당연히…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함께 살림을 꾸려 나갔던 회사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케이큐브에게 투자를 이미 받으신 “케이큐브 패밀리” 대표님들도 한 분 한 분 다 엄청난 분들이시기 때문에, 너무나도 든든했습니다. 또한, 업무를 위해 밖을 돌아 다니면서 인사 드리고 자주 뵙게 되어 친해지고 또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다른 투자사 분들, 스타트업 분들, 그리고 스타트업 생태계를 위해 종사하시는 다른 조직이나 기관 분들 등 모두가 참 스쳐 지나가고 인연의 다리를 놓을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네요. 세상 많은 일들이 그렇겠지만, 투자라는 게 혼자 고민만 한다고, 그리고 혼자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항상 주변 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에게 먼저 도움을 주려고 해야 나중에 잘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돈을 다루는 분야이다 보니, 저의 그것과는 좀 이질적인 동기를 품고 들어 오신 분들도 일부 있던 것 같고, 또 큰 돈이 오가는 와중에 견물생심이라고, 그러다 보니 크고 작은 사건사고도 종종 있기는 합니다. 자나깨나 양심체크.)
그 외에, 제가 누릴 수 있었던 참으로 귀중했던 특혜랄까요, 아무튼 그 다음으로 좋았던 점이라면, 정말로 다양한 분야와 사업에 대해 고민하시는 분들의 속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었던 점이 어마무시한 직업 특수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사업을 왜 하시는지, 어떤 장점을 살려서 시장을 공략 하시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사업기밀을 존중해 드린다는 전제 하에) 공유 받을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공감대가 생기는 사업아이템이나 창업 멤버 분들이라는 판단이 들면, 같이 고민을 나누어 볼 수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잡아서 접할 수 있다 보니,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직업이 또 있겠나 싶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재미있고 다르고 신나는 경험이었습니다. 또 이를 기반으로 팀을 설득해서 투자까지 이루어 내고, 장기적으로 그 작았던 회사가 크게 성장하시고 목표한 바를 성취하시는 것을 옆에서 목격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참 흥미롭고 보람있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물론 이런 건 모두에게 맞는 성격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얕고 두루두루 알고 싶고, 빨리 새로운 것을 접할 수 있고, 중요한 포인트들을 캐치하고, 또 머리를 비워 다음 미팅에 들어가고, 이걸 반복할 수 있고 즐겨야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체질에 매우 맞지 않아 고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이 근무경험 덕분에, 저는 제가 좋아하기만 했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돌아가는 판인지 몰랐던 게임업계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고, 엄청나게 똘똘하셔서 세상보다 몇 발자국 앞서서 선도적인 기술을 만들어 가시는 석학 분들도 많이 만나 뵐 수 있었으며, 어떻게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최고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지에 대해 매일 밤 고민하시는 분들의 노력의 흔적도 매 번 느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특히 심사역이 될 수 있는 대상인 20, 30대 직장인들에게) 그 어디서도 얻기 힘든 기회이자 위치, 즉 vantage point 라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일반 직장에 다니는 사람 치고, 다른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특히 아무리 작아도 일개 회사의 대표 역할을 하시는 분을 쉽게 만나서 “지금 하시는 일 어떠세요? 뭐가 비밀 특제소스 이신가요?” 에 대한 답을 쉽게 따 낼 수 있을까요? 생각해 봐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당장 투자를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만일 내가 ‘아 저 사람은 뭔가 노하우나 인사이트가 있는 사람 같으니 찾아가서 이야기를 청해 봐야겠다’ 라고 마음을 먹었다면, 무작정 연락을 해서 만나기 쉽지 않을 텐데요, 아무래도 “투자자” 라는 명함을 들고 다니다 보면 그런 기회를 또 더욱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굳이 새삼스럽기도 하지만, 이를 개인적인 reputation을 위해 알아서, 그리고 내가 외부인에게 회사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인연을 쌓아 가야 맞는 접근이 되겠지요. 자리가 사람을 잠깐 만들어 줄 수는 있어도, 오래 가지는 못하는 법이죠.)
어려웠던 포인트들도 있었습니다만, 제일 큰 부분 하나만 꼽자면, 예를 들어, 너무나 좋은 의도를 가지고 사업을 시작하셨고, 이야기를 조금 들어 보자 마자 공감대와 도움이 되어 드리고픈 마음이 즉시 들게 해 주신 분들이 꽤 많이 계셨는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함께 해 드릴 수 없어서 아쉬운 거절의 말씀을 드려야 했던 상황들이 꽤 많았습니다. 특히 “너무나 잘 되어야 할 서비스 같은데, 죄송하지만 투자는 어렵겠습니다” 라고 의사를 전달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 말을 받아 들여야 하는 대표님들의 맥은 얼마나 풀릴까, 심지어 갑갑함을 넘어 화가 날까, 내가 좀 더 빨리 소식을 전하는 게 맞았을까, 아니면 어떻게든 되게 만들어서 투자를 조금이라도 해 드릴 수 있도록 추가의 노력을 더 들여야 하는 게 맞는 건가, 등 오만 가지의 생각이 교차를 합니다. 특히 스타트업의 경우 초기 자금이 너무나도 절실하기 때문에, 돈이 생겨야 사람도 뽑고 일을 할 수 있는 경우가 태반이라, 만일 투자가 무산된다면 큰 타격이 아닐 수 없겠죠. 투자자 입장에선 ‘이번 건에 투자를 못 해도 다른 더 좋은 건만 찾는다면 우리의 성과 OK 수익도 OK’ 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 쉽지만, 반대편 테이블의 입장에선 절대 그렇지 못한 부분이라… 항상 마음의 짐이 컸습니다.
어쨌든 이 모든 걸 짧은 기간 동안 많이 겪으면서, 단순히 지식습득 외에도 사람 대하는 법 및 다양한 장소와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법이 좀 더 체득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1년도 넘겼겠다, 이제 슬슬 더 붙는 재미와 탄력을 조합해서 최소한 몇 년간 더 잘 해보고 싶었는데, 또… 갑자기 찾아 든 바람 때문에 예정보다도 훨씬 일찍 빨리 떠나게 되었네요. 너무 짧아서 또 또 아쉽지만, 그래도 sweet & succulent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경험을 뒤로 하고… 본의 아니게 이미 너무 여러 차례 직장을 바꾸어 본 사람이라 그런지 - 이사 자주 다니고 나면 요령이 생기듯 말이죠 - 이제 두려움 같은 건 없어졌지만, 그래도 아직 내일과 미래에 대한 두근거림은 여전 하네요.
아무튼 회사를 옮기는 이런 타이밍 아니면 이렇게 한 번 짚고 넘어가기 힘들 것 같아서, 주절주절 휘몰아 써 봤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로 하고, 조만간 또 새로운 글을 올릴 수 있도록 잠깐 쉬었다가 다시 브런치로 복귀 하도록 하겠습니다. 몇 주 몇 달 후가 될 지는 모르지만요… :)
모두들 좋은 한가위 되시길! #긴글읽어주셔서매우감사 #케이큐브또한감사 #케이큐브패밀리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