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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May 14. 2021

도망가자, 빛이 스며들 때까지

feat. <도망가자> 선우정아 & <도망치는 마음> 서늘한 여름밤





도망치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뭐랄까, 뭐든 잘 믿지 않고, 그래서 늘 나머지 발 한쪽은 깊게 담그지 않으며, 언제든 도망칠 궁리를 한다. 그것은 일이든 인간관계든 국경이든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언젠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을 때, 믿었던 무엇인가에 뒤통수를 너무 세게 맞았을 때, 그런 기억들이 모여 이런 나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도망치는 마음이 일종의(아니 완연한) 회피라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직접 부딪히고 맞서 싸워서 해결하거나 이겨나가는 방법이 아니라는 점에서 최선의 해결책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그 순간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차악쯤은 되지 않을까. 




서늘한 여름밤님은 무엇이 되었건, 도망칠 수 있을 때 그럴 수 있는 에너지가 있을 때 도망치라고 했다. 그것이 더 나은, 이를테면 나를 잃지 않는 방법이라면 도망쳐도 상관이 없다고.


선우정아 님은 함께 있어주겠다고, 네가 마음이 편한 곳에 가서 언제 까지든 네 곁에 있겠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네 얼굴에 빛이 스며들 때가 되면, 그때 손 잡고 씩씩하게 다시 돌아오자고.




https://www.youtube.com/watch?v=Q1fxfy2i6Ww

freeze - flight - fight 그중에 도망치기


https://www.youtube.com/watch?v=fNrhdZwhj-c

도망가자, 그 다음에 돌아오자 씩씩하게.




나는 자주 도망치고, 도망친 자신을 비난했다. 맞서 싸우지 못하고, 은근슬쩍 꼬리를 내리거나 발을 빼는 나를 꾸짖었다. 그러니까 무엇이 되지 못한 거라고, 끝을 보지 못한 거라고, 다음에도 그런다면 결국 너는 계속 이렇게 어중간한 인간으로 살게 될 거라고 스스로를 저주했다. 아니, 본인을 도닥여줘도, 끌어안아줘도, 위로해줘도 모자랄 판에, 나는 그렇게 나에게 모질게 굴었다. 언제나. 그래야 되는 줄 알았지.


이번에도 나는, 남들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만 귀를 기울인다. 내가 나에게 할 때는 씨알도 먹히지 않던 말들이, 남들이 해주면 그런가 보다 한다. 도망쳐도 괜찮지, 그게 나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안 되겠으면 우리 같이 도망치자, 너랑 나만 손잡고 어디든 가서 숨을 쉬자, 그리고 괜찮아지면 그게 언제든 그때가 되면 돌아오자. 하는 말들.  




다음에는 도망치지 않기로 수없이 다짐해도, 결국 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그런 것처럼 보이면) 자주 도망을 쳤다. 그게 잘못이었는지, 잘한 일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른다.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기는 했지. 자주 도망치고, 도망쳐온 곳에서 또 새로운 시작을 했다. 끝을 자주 보지는 못했어도, 시작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거면 됐지. 아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좀 멈춰 서 있다고 해도, 내가 나를 비난하지는 말자고 생각한다. 무서우면 심지어 뒷걸음질 칠 수도 있는 거라고. 도망치는 것은 비겁할 수는 있어도 나쁜 짓은 아니라고. 때로는 도움이 되기도 한다고. 내가 나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나를 용서해줄 사람이 없는 세상이잖아.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으면, 버티면 그만인 거라고.






작은 소망이 있다면, 언젠가 누군가의 손을 잡고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얼굴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내가  곁에 있어줄 테니 우리 어디든 가자고, 뭐든 괜찮을 거라고, 실컷 웃고 울다가 다시 씩씩하게 돌아오자고. 얼굴이 빛이 스며든다니, 어떻게 그런 표현을 썼을까. 그늘진 얼굴에 빛이 스며드는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다. 그런 말을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이 되어 주고 싶다. 언젠가는. 

아닌가, 너무 큰 소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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