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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Feb 18. 2022

라멘과 맥주 한 잔

어떤 평행우주에서는 






가끔 일을 마치고 라멘집에 들어가면, 묘하게 익숙한 기분이 된다. 


곳곳에 노랗다 못해 붉게 느껴지는 조명과 대나무로 된 레스토랑 바와 테이블, 커다란 일본어로 설명이 적힌 벽에 걸린 메뉴판, 곳곳에 놓인 청색 섞인 도자기와 아기자기한 장식품, 고양이 인형 마네키네코까지 지나쳐 자리에 앉고 나면, 천장 어디쯤에서 흘러나오는 일본이나 한국 가요 같은 것들이 한순간 뿌옇게 흩어지면서 나를 일본 여행에서 들렀던 어느 라멘 가게로 데려가는 것 같다. 오키나와의 라멘 가게라던가, 혹은 오사카 역의 어느 튀김 우동집 같은. 따끈하게 데워진, 그래서 저녁이 되어도 좀처럼 식지 않는 후덥지근한 밤공기와 함께 걷는 가벼운 차림의 여행객으로. 


진짜 일본의 가게처럼 '이랏샤이마세'로 손님을 맞이하지 않아도, 어쩐지 일본식이나 아시안식의 발음이 섞인 영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게는 라멘집이 더치 바 보다야 좀 더 아늑한 느낌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습도나 냄새, 언어, 흐르는 음악과 움직이는 사람들이 풍기는 분위기 같은 것들이 모여 결국 하나의 씬이 되고 만다. 나는 그 안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들어앉아 주변을 구경하는 주인공이 된 느낌이랄까.

그렇게 구석에 앉아 가만히 돌아가는 주변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초현실적인 기분이 되는 것이다. 


밴쿠버나 뉴욕, 베를린, 세계 어디든 라멘집을 가면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겠지. 적당히 섞인 현지인과 아시안의 비율. 현지인들의 서툰 젓가락질이나 각자의 언어로 혹은 완벽하지 않은 영어로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지금 평행우주의 어딘가를 떠도는 기분이 된다. 인생은 다 그저 그런 인생이야, 별 다를 것 없어. 여기나 저기나 결국 다 같아. 왜 어떤 기분은 현실 같지 않지. 애초에 행복은 내 것이 아닌 걸까. 부유하는 기분, 그래서 저기 서 있는 나를 위에서 들여다 보고 있는 기분. 





사실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날이라고 해서 한식당에 가는 일은 잘 없다. 대체로 가정식은 웬만하면 거의 내가 직접(그리고 싸게)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까. 고추장이나 간장 베이스 국물이라면 어느 정도 맛도 낼 줄 안다. 결국 사 먹게 되는 거라면 내가 만들 수 없는 것들이어야 하는데, 대게는 한국식 치킨이 그에 해당한다. 아마 직접 튀겨내기엔 기름값과 노동력이 더 들 것이다. 그런 가운데 종종 생각나는 것이 또 사골 국물이다. 집에서 내내 뼈를 고을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아무래도 자주 채식하는 하우스메이트들과 살다 보면, 원래도 잘 먹지 않는 고기 먹는 횟수가 더 줄어들기도 하고. 


유독 힘든 날, 도저히 집에 가서 새로 일 인분의 식사를 만들어 낼 기운도 의지도 없는 날엔 가끔 라멘집에 들렀다. 작은 테이블에 앉아 닭과 돼지 뼈를 여덟 시간 고아 만들었다는 진한 사골 육수로 된 돈코츠 라멘을 먹고 작은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몸이 뜨끈하고 나른해지면서 뭐든 다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했다. 이만 원이 아깝지 않지. 고생했다, 나 자신. 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만큼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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