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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Mar 08. 2023

하고 싶지 않은 말들에 자주 잡아먹힌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하고 싶지 않은 말들 때문에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런데 그래야 하는 상황에 자주 봉착하게 된다. 타국의 사회적 관습과 언어에 완벽하지 않은 데다 민감성 지수가 높은 내향형 인간의 하루하루는 이런 것들로 채워져 있다. 






어떤 말을 꼭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다정하고 좋은 말들이 아니라서 망설여진다. 갈등을 만들어 낼까 봐 겁은 나지만 이미 내 안에서 문제의식의 싹이 자라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더 이상은 피할 수 없다. 주로 하우스메이트나 이웃에게 내가 느끼는 불편을 이야기해야 하거나 상대에게 어떤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변화를 요구해야 할 때, 혹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부탁해야 할 때, 등이 그렇다. 말을 꺼내기 전부터 이미 온몸과 마음이 불편하다. 안절부절못하는 상태가 된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  


왜지, 왜 그럴까? 나는 주로 타인의 예측불가능함을 못 견디겠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메일의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일이 너무 어렵다. 손 끝에 힘을 주고 의지를 담아 누르지 않으면 다 쓴 메일을 몇 시간 동안 내내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그건 내가 보낸 요청의 답을 확인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잔뜩 찡그린 얼굴로 실눈을 뜨고서야 겨우 답을 확인하곤 한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서 붉은색 알림은 내게 자주 공포를 선사한다. 사실 이런 경우 최악의 결과라는 게 대게 거절이나 예상치 못한 화 정도다. 거절은 개별적 사항에 대한 대응이고 나라는 사람에 대한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내가 '거부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부정적인 반응도 내가 예측할 수 없는 경우라면 걱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밀려오는 두려움을 감출 수가 없다. 


 


하고 싶지 않은 말들을 해내야 하는 일이 너무 괴롭다. 어떻게 잘 해내는지 모르겠어. 정답이랄 게 있을까. 웃으며 좋게 이야기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이미 내게 전해진 자극을 진정시키고, 무례하지 않은 말로 포장하고, 적절한 방식과 타이밍을 선정해서 전달하는 일에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소비된다. 왜, 권리를 침해당한 건 난데,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예의 있게 부탁해야 하는 것도 내 몫이 되는가에 대한 현타가 세게 온다. 이건 약자의, 여성의, 권력에 대한 문제일까?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을 상대를 배려하며 돌려서 말하는 애를 쓰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이 된다. 


게다가 나는 남들보다 감각이 예민하다. 누군가에게 별 것 아닌 일들이 내게는 커다란 자극이 된다. 냄새, 소음, 미묘한 뉘앙스와 제스처까지, 툭, 하고 뇌의 어느 부분을 건드린다. 뭐든 금세 알아차린다. 무던하고 싶어도 되질 않는다. 극내향의 인간은 사회적 에너지도 늘 바닥이다. 무엇인가 마음먹고 항의라도 할라치면 단전에서부터 기를 끌어모아야 가능하고, 그 모든 것을 끝내고 나면 이미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는 일상을 유지하기도 버겁다. 


모든 것을 감각하는 자아는 창의적인 일을 하는 데에는 유리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창작하는 사람들의 우울의 발병률이 높고 무드스윙이 큰 것은 괜한 확증편향이 아니다. 중독과 자살률이 높은 것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대부분의 창작자들은 그들의 수명을 갉아서 무엇을 만들어내는 중일 것이다. 




- 먹은 걸 제때 치워줄래? 

- 밤에는 제발 좀 조용히 해줘, 음악 소리가 너무 커. 

겨우 이런 (내게는) 당연한 말들을 수많은 자기 검열을 거치고 용기를 내고 마음을 먹어야 할 수 있다니, 가혹하다. 이방인으로서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상식>이라는 말을 내 사전에서 지웠다. 다른 나라 출신, 다른 세대, 다른 사회상 속에서 상식(common sense, 공통적 감각)이라는 단어가 결코 통할 수 없는 유니콘 같은 존재라는 것을 수많은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상식이 타인의 상식이 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는 사소한 함의 하나하나를 직접 설득하고 의사소통 해야 한다. 때로는 하고 싶은 말은 한글에서 영어로, 영어에서 다시 문법체크와 구글번역기를 통해야만 번듯해지기도 한다. 그 피곤이 이방인의 일상이다. 


다른 나라의 사회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톤 앤 매너를 성인이 되어 일일이 경험을 통해 깨닫는 일은 어렵고 고되다. '이 정도면' 하는 기준을 당최 알 수가 없을 때, 나는 바닥부터 시작하는 마음가짐으로 한글에서 영어, 때로는 더치까지 다른 언어들로 된 웹 문서들을 누빈다. 하지만 이젠 무엇이 되었건 난 더 이상은 못 참겠는데! 하는 마음이 터지기 전에 말을 꺼내야 한다는 것 정도를 배웠다. 작은 일들은 쌓여서 언젠가는 터지기 마련이고, 그러면 상대방은 영문 모르고 폭탄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해서. 어쨌든 그건 내게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많은 시행착오 끝에 깨달은 점은 직접 말해야 무엇인가가 바뀌더라는 것이다. 물론, 말도 안 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내 몫이 아닌 상대의 몫이니까. 나는 '그 누구도 함부로 예측할 수 없다'는 간단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도 이방인은 덜덜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숨을 가다듬고 문을 두드리거나 말을 건다. 

불편한 사람은 나고, 이걸 해결해 줄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까. 


괜찮을지도 모른다. 거창하게 마음먹은 의지가 우스워질정도로 쉽게 수용될 수도 있다. 

괜찮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더 괴로워질 것이 뻔한 상황은 절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익숙해질까. 이미 진이 다 빠져버려서 너덜너덜한데. 사는 게 이렇게 디테일하게 괴로울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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