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좋은 물건도 스토리가 없으면..."
“그러니 너는 건축을 하는 게 좋겠다고 피셔가 말했다. 건축이라... 이구는 문득 모은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 잡혔다. 건축은 땅 위에 시를 짓는 일입니다. 이구는 르꼬르뷔지에의 말을 주문처럼 외웠다.”(「건축이냐 혁명이냐」, 정지돈)
에픽디자인랩의 최형욱 소장이 공간을 디자인하는 법은 조금 다르다. 노트북을 켜기 전에 종이와 펜을 준비하고 글을 쓴다. 비어있는 공간을 이야기로 채우는 작업이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갖다 놓아도 스토리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공감하지 못합니다." 글을 쓰는 디자이너 최형욱 소장을 성수동 에픽디자인랩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공간디자인을 전문으로 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전에는 작품 활동 위주로 했었다. 조명디자인, 가구디자인, 전시 컨설팅 등 다양하게 활동하다가 에픽디자인랩으로 이름을 바꾸고 나서부터는 공간디자인을 전문적으로 했다. 2009년에 디자인 바이러스(에픽디자인랩의 전신)를 만들 때도 공간디자인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디자인 바이러스라는 말뜻 자체를 디자인을 바이러스처럼 전파시키자는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제품디자인과 전시기획, 공간연출 등 다양한 디자인을 했을 뿐이다.
본격적으로 공간디자인을 표방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원래 전공이 공간디자인이었다. 사업을 하는 와중에 대학원 거치며 공간디자인을 공부하다 보니 공간디자인 전문가라는 메리트를 가지고 있는데 전혀 활동에 비중을 두지 못하고 있더라. 전시에 참여하고 나서도 아쉬움이 생겼다. 디자이너로서만 참여했기 때문에 ‘전시 기획까지 했다면 더 좋은 모습으로 작품을 전시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커졌다. 그래서 공간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스튜디오를 만들자는 생각을 했고, 에픽디자인랩을 만들게 된 것이다.
공간에 집중한 뒤에는 만족스러웠나.
아무래도 전하고자 하는 스토리가 확실히 전해졌다. 기존에 하던 작품 디자인 같은 경우에는 나만의 이야기를 남에게 던져주는 것에서 그친다면, 공간디자인은 스토리를 담아서 공유를 하는 것이다. 공간에 들어오는 클라이언트나 관람객에게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소통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생긴 것 같다.
어려운 점도 많았을 텐데.
일단 공간은 규모가 크다. 그 안에 조명, 가구 등 디테일하게 건드려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에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더 많다. 작품디자인이 나만의 스토리를 전파하기 위한 작은 카테고리라고 한다면 공간은 그 안에 스토리를 담기 위해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하는 것 같다. 스토리에 맞는 조명과 색채를 구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다.
이름을 에픽(서사문학)이라고 지은 이유가 궁금하다.
제품을 다루던 팀원들을 다 분산시키고 온전히 혼자 있을 때, 책을 좀 읽었다. 소설, 인문학, 잡지 등을 읽으며 새롭게 느꼈던 건, '공간은 비어있다'는 것이다. 공간(空間)이라는 단어 자체가 비어있다는 뜻이고, 디자이너는 그 빈 공간을 연출하는 것인데, 빈 공간 속에 비주얼만 담으면 안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예쁜 공간이 아니라 클라이언트와 소비자가 스토리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에픽이라고 지었다.
스토리를 즐길 수 있는 공간?
*로이터 사진전을 예로 들자면, 자크 데리다의 *시선의 권리를 디자인 콘셉트로 차용했다. 우선 7개로 나누어진 섹션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단어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한다. 사진전이기 때문에 사진과 사진을 보는 행위에 대해 생각을 한다. '사진으로 담고자 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사진을 일차원적으로 서서 사진을 바라봐야 할 것인가', '사진까지 도달하는 나의 시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관람객이 과연 이 사진을 보고 뭘 가져갈 수 있느냐' 등 다양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시선의 권리'라는 단어다. 그 이후에는 관련된 책을 찾게 되고 '시선의 권리'라는 개념을 말한 자크 데리다 같은 프랑스 철학가가 나오게 된다. 그런 식으로 먼저 우리들만의 스토리를 만들어서 클라이언트와 소통을 한 뒤에 결정짓게 된다. 그렇게 시선의 권리, 탈원근적 시선, 시선의 흐름, 중첩의 시선, 깊이의 시선, 주목된 시선, 연속된 시선이라는 7가지 섹션을 만들고 전시 구성을 하는 것이다.
*로이터 사진전: 세계 3대 통신사의 하나인 로이터통신사의 보도사진 전시전. 600여 명의 로이터 소속기자가 매일 1600여 장씩 제공하고 있는 사진과 로이터가 보유한 1300만 장의 자료 중 450여점을 큐레이션한 대규모 전시. 로이터 사진기자는 사실 전달의 기능적 측면을 중요시 하되, 사진가로서의 세계관을 투영시켜 보도사진을 찍는다. 그 결과 다양한 시선의 보도 사진이 세상에 나왔다.
*시선의 권리: 프랑크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주장한 개념. 데리다는 해체주의를 내세우며 전통서구철학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시선의 권리는 사진을 최종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수많은 해석과 시선의 권리만 존재함을 말한다. 결국 남는 것은 시선의 독재가 아닌 시선의 다양함이기에 수많은 해석 중 누구도 우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산에서 작업했던 다락호텔 역시 '시선의 권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들었다.
그렇다. 다락호텔 대표님이 원했던 단 하나의 바람은 '색다른 해운대의 뷰'를 보여주는 거였다. 다락호텔이 위치해있는 맞은 편에 조선호텔이 있었고, 두 호텔이 같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청 고가의 호텔과 함께 똑같은 뷰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같은 감정을 줄 수 없지 않냐는 말씀을 하셨다. 마치 다락방에 온 것 같은 아늑한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클라이언트의 요구가 있어서 바다가 한눈에 담기는 뷰의 강점을 살린 안락한 느낌으로 디자인을 했다.
인테리어에 스토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득하나.
커뮤니케이션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이 디자인을 이렇게 적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비쥬얼적인 답보다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은지'를 많이 묻는다. 대화를 통해 클라이언트만이 가지고 있는 아이덴티티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렇게 발견한 클라이언트의 색채와 분위기를 디자인으로 구현하는 시도를 한다. 그래서 에픽디자인랩은 디자인 작업, 도면 작업을 하기 이전에 글로 푸는 작업을 먼저 한다.
디자인을 글로 푼다?
내가 생각하는 디자이너는 글을 쓰는 사람인 것 같다. 스토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글을 써야 한다. 그래서 컴퓨터 먼저 켜기 전에 종이와 펜부터 놓고 여러 책을 펼쳐보며 연구를 한다. 대부분의 회사는 바로 컴퓨터로 작업을 진행하는데, 그런 작업을 우리는 후반 작업에 두고 비중도 적은 편이다. 대신 스토리를 만드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한다.
스토리가 왜 그렇게 중요한 걸까?
기본적으로 공간은 비어있고 없는 것이다. 그곳에 스토리가 들어가고 사람이 들어가고 소품이 들어가면 실존하는 공간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물건을 갖다놓고 아무리 좋은 마감재를 써도 그 공간만의 브랜드만의 스토리가 없다면 예쁜 공간에서 끝나버린다. 그런데 스토리가 뒷받침이 된다면, 공감을 얻기 때문에 소비자나 관람객이 이해하기가 좋다. 공감이 있어야 공간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스토리가 들어가면 공간의 드러나지 않는 면을 생각하는 건데 디자인적인 제약이 있진 않나.
그런 부분에서 김대현 팀장의 역할이 크다. 각자가 생각한 이야기를 다 풀어놓고 스케치를 진행하는데 각자의 아이디어가 다르다. 나는 유기적인 것에 관심이 있다면 김대현 팀장은 트렌디하고 컨템포러리한 감각이 있어서 내가 벗어난 이야기를 하면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예쁘장하게 다듬어지는 것 같다.
상업 공간 같은 경우에는 스토리보다 매출을 올려주는 디자인을 원할 것 같다.
요즘 같은 경우에는 콘셉트 자체를 앞세우기도 한다. 전시를 할 때도 콘셉트가 있으면 소통할 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에 관람객에게 더 잘 전달된다. 예전 같으면 콘셉트를 잡아도 콘셉트에 대한 이해가 클라이언트에서 끝나는 경우도 많았는데, 요즘에는 찾는 분들이 이야깃거리, 화젯거리, 단어 하나하나를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더라. 관객의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
지금 시대에 디자이너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디자이너가 없는 시대가 됐다. 디자이너의 역할이 점점 좁아지는 것 같다. 4차 산업혁명 때문에 이제는 건축가도 없어지는 시대가 왔다고도 말한다. 소비자가 곧 디자이너인 시대가 되면서 과연 디자이너의 역할이 어디까지 뻗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니 결국에는 공간에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그림만 예쁘게 그려주는 사람은 너무 많지 않나 생각한다. 디자이너는 예쁘게 그려주는 사람 이전에 커뮤니케이터여야 하지 않을까.
커뮤니케이터?
귀를 열어두고 클라이언트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들은 것을 글로 쓰고 디자인으로 구현하는 것이 커뮤니케이터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클라이언트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생각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디자이너 같다. 그게 디자이너가 가져야 할 전문성이 아닐까.
에픽디자인랩을 찾아오는 클라이언트에게 조언을 한다면.
답안을 가져오지 않으면 좋겠다. 만약 클라이언트가 완성된 레퍼런스를 가지고 오면 프로젝트를 맡지 않는다. 남들은 배부른 소리라고 하는데, 배부른 게 아니라 이미 정답이 그려진 상태에는 내가 욕심이 나지 않는다. 클라이언트는 공간을 왜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솔직한 대답만 가져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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