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너무나도 가고 싶었던 회사에 입사를 한 나는, 매 순간 행복했음과 동시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느라 늘 지쳐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과했던 신입의 패기에 나 혼자 에너지 소모를 넘치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대학시절 내내 붙어 다녔던, 20대의 절반을 공유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늘 활발했고 생기가 넘쳤고 투명하게 솔직했으며,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그런 사람이었다. 친구와 함께 있을 때면 나도 가식이 없었고 솔직했고 밝았고 행복했다. 가끔 나에게 삐진 친구가 토라져 있을 때면 "떡볶이 같이 먹어줄게"라는 말 한마디로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 그렇게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던 20대를 소소하고 특별하게 같이 보내고 있던 하루하루. "나 요즘 왜 이렇게 턱 쪽이 아프지?"라는 친구의 말의 빈도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턱 쪽이 아프다는 말이 "나 몸이 안 좋아"라는 말로 변하기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매일 통화를 하던 시간은 아예 사라져 버렸고 근근이 이어오던 메시지들의 답장도 점점 간격이 길어졌다. 친구의 아픔과 나의 회사에 대한 과한 열정이 만들어낸 공백이었다.
몸이 안 좋아진 친구는 결국 입원을 하게 되었다. 봄 빛이 서글프게 따사롭던 날. 음식씹을 힘이 없다는 친구를 위해 두유를 사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친구는 내가 알고 있던 모습 그대로 밝고 씩씩했다. 생각보다 많이 아파 보이지 않는 모습에 한시름을 놓으며 오래간만에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 보따리 들을 풀어내었다. 즐거웠던 수다를 끝내고 그동안 나도 모르게 내속에 쌓아두었던 친구에 대한 미안함도 덜어내고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또 무신경한 시간들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한참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친구한테서 카톡이 왔다. 다음 주에 볼 수 있겠냐는 연락이었다. 하지만 일이 너무 바빴고 하필 그 주가 나의 생일주였기 때문에 많은 선약들이 잡혀있었다. 미안하다고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음 주 주말쯤에 보자고 약속을 잡았다.
스산한 봄추위가 감도는 새벽 2~3시경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눈이 번쩍 떠졌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친구의 오빠였다. 전화를 받기 전부터 손이 떨렸다. 직감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거라는 것을. 마음을 추스르고 전화를 받았다. 울음이 가득 찬 목소리의 오빠는 친구의 사망 소식을 담담하게 나에게 전하였다. 태어나 처음 겪는 충격에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다. 눈물이 미친 듯이 흘렀다. 정신을 차리고 집을 나서려는데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친구가 너무 불쌍하고 친구한테 너무 미안하고 오만가지 감정으로 인해 사정없이 흐르던 눈물은 통곡으로 변하였다. 세상 떠나가라 울어도 그 사무친 감정들은 해소가 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친구가 아무렇지 않게 누워있었다. 그냥 잠을 자는 것 같았다. 화장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친구를 가까이에서 보겠냐는 친구네 부모님의 요청을 들어드릴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멀지 감치 떨어진 곳에서 친구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빛나던 20대를 같이 보낸 친구를, 추억을 준비가 되지도 않은 채 잃어버렸다.
친구를 보내기 전 나는 다른 친구들과의 약속들도 그다지 중요시 생각하지 않았었다. 조금만 귀찮다고 생각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약속을 파했고, 친구들이 부탁 부탁을 해도 안 나가는 날이 많았다. 다음날 피곤할 것이라고 느껴지면 그 약속은 바로 잡지도 않았다. 하지만 허망하게 친한 친구를 보내고 난 후 간사하게도 나는 모든 친구들과의 약속이 소중해졌다. 나도 친구들도 당장 내일 못 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 친구를 보러 바로 갔었더라면
밤늦게라도 찾아갔었더라면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친구를 보내지 못했다. 모든 친구들에게 친구를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리를 해서라도 친구들과의 약속을 나간다. 나는 더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다. 약속은 미루는 것이 아니다. 내일 보면 되지? 내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된다.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만나야 한다. 내일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얼마 전 친구의 기일날 친구가 좋아하던 보라색 꽃을 들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고 왔다. 사진 속 해맑게 웃고 있는 친구의 모습은 우리가 한창 반짝였던 그날 그대로였다. 처음으로 남자 친구를 소개해줬다. 아마 옆에 있었다면 엄청 이런저런 궁금증을 빠르게 쏟아 냈을 텐데. 혹시나 친구가 궁금해할 이야기들을 내가 짐작하여 미리 다 얘기해 주었다. 몇 점을 주었을까? 내 친구의 남자 친구로 통과를 시켜줬을까? 선선한 바람이 슬프게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가끔 친구의 존재가 흐려질 때가 있다. 친구의 기일을 잊어버리고 친구의 생일을 잊어버리고. 슬프다. 문뜩 무심한 나 자신에 서글프다. 잊어지고 옅어진다. 옅어지는 생각을 진하게 덧칠하는 순간 또 한 번 울컥한다. 보고 싶다. 소소한 전화 한 통을 길게 나누며 잘 자라고 말하고 다음날 아침인사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싶다. 매 순간이 소중했는데 알지 못했다. 너무 늦게 잃고 난 후에 알았다.
가족, 친구 나의 일상에 공기 같은 존재들의 소중함을 매일매일 기억하자. 당연한 건 1도 없다. 내가 카톡을 보냈을 때 답장이 오는 것을, 전화를 걸었을 때 나의 전화를 받아 주는 것을, 퇴근 후 소주 한잔에 스트레스를 같이 풀어내는 순간을 모두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다. 되돌리고 싶다. 친구의 메시지를 받았던 그 순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