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손때가 묻은 사소한 풍경들에 눈길이 간다. 낮고 지친 자세로 낡아가는 것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무엇이지만 딱히 없어도 사람들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듯한 하찮은 것들. 세상의 전화번호부에 등재되지 않은 수많은 이름들과 국경 사이에서 잊혀진 단어와 노래들. 지도에 새겨지지 않은 작은 마을들처럼 보잘 것 없는 것들에 마음이 머문다.
늦은 저녁에 출발한 기차는 밤을 달려 새벽을 향해간다. 지친 여행자의 몸과 마음은 떠나온 공간과 다가올 시간 사이에서 갈피를 잃고 열차칸 사이의 이음매처럼 밤새 덜컹거렸다. 여행의 시작부터 끝을 꿈꾸었으나 지나온 길은 또 다른 길들로 다시 이어질 뿐. 희부윰한 새벽빛에 선잠에서 깨어나면, 그제서야 아무런 의미도 없던 길 위의 풍경들이 지나간 날들의 의미임을 어슴푸레 깨닫는다.
어떤 예감들은 찢겨진 악보 속에서 갈길 잃은 돌림 노래처럼 뒤늦게야 찾아온다. 그리고 그 무엇과도 상관없다는 듯 여행은 계속된다. 어둠을 지나 도착한 그 곳은 어느새 한낮이다.
만리장성의 서쪽 관문인 가욕관을 지나면 중원이 끝나고 이른바 서역이 시작된다. 우리에게 현장법사의 천축 여행과 서유기로도 잘 알려진 이 곳의 일부는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란 명칭으로 중국에 묶여 있지만 사람도 문화도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나라이다. 그 곳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대국의 튼튼한 위장과 거대한 탐욕을 읽을 수 있다. 지금도 이 곳에선 크고 작은 테러들이 일어난다고 하지만, 기원 전 770년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 중국 대륙 전체가 각종 분열과 대립, 또 그로 인한 끊임없는 전쟁으로 한바탕 몸살을 앓은 적이 있다. 바로 춘추전국 시대이다.
혼란스러운 시대였던만큼 춘추전국 시대의 수많은 제후국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부국강병을 도모했는데, 이런 흐름에 발맞추어 등장한 다양한 사상학파 세력이 바로 제자백가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 제자백가를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가의 여섯 학파로 분류했다. 이 중에서 현재의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공자의 유가일 것이다. 자신을 관직에 등용할 군주를 찾아 제자들과 함께 천하를 주유했던 공자는 주나라의 예를 따름으로써 나라를 바로 세우려 했다.
“자로가 물었다. ‘만일 위나라의 군주가 선생님께 정치를 맡기신다면, 무엇을 제일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 잡겠다.’
자로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논점에서 많이 벗어났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바로잡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촌스럽구나 자로야! 군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점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지 않는다. 만일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어울리지 못한다. 만일 말이 어울리지 못하면 업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일 업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의례와 음악이 활발치 못한다. 만일 의례와 음악이 활발치 못하면 형벌이 잘못 적용된다. 형벌이 잘못 적용되면, 백성들이 수족을 둘 곳이 없다. 따라서 군자가 이름짓는 것은 반드시 말할 수 있고, 말하는 것은 반드시 행동할 수 있다. 군자는 자신이 말함에 있어 결코 아무렇게나 하지 않는다.’” *
이처럼 공자의 예는 모든 것에 올바른 이름을 붙이고 적절한 위치를 찾아주는 개념과 구별의 철학이었다. 그는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인仁’에 기초한 ‘예禮'로써 천하를 하나로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삶의 길은 어쩌면 도가의 도道처럼 말로 할 수 없는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 철학자 아드르노는 이렇게 말한다.
“철학의 테마는 철학에 의해, 우발적인 것으로서, 무시할 수 있는 양으로 격하된 질들일 것이다. 개념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 개념의 추상 메커니즘을 통해 삭제되는 것, 아직 개념의 본보기가 되지 않은 것, 그런 것이 개념에 대해서는 절박한 것으로 된다.” **
나는 늘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 가려는 조급함이 있었다. 어딘가에 공자의 예와 같이 반드시 따라야 할 절대적인 법칙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극기복례”해야 하는데 한없이 게으른 자신이 항상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여행을 떠나보니 길은 자꾸만 어딘가로 이어져 있었다. 때로 강이나 산이 가로놓여 흐름을 끊기도 했으나 그 또한 지나가야 할 길이었다.
열하를 향하는 긴 여행의 초입에서 큰 비에 불어난 물로 물살이 거친 압록강을 건너다 박지원은 옆에 오던 통역관 홍명복에게 이렇게 묻고 답한다.
“자네, 길을 아는가?"
“길은 알기 어려운 게 아니야.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 ***
길은 ‘사이’에 있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 사이의 경계에 있는 것이다. 그 곳에 바람이 불고 구름이 떠 가듯 강물이 흐르고 흘러 이윽고 바다에 다다른다. 아무래도 나는 이 사이,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길 위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의 의미를 좀 더 찾아봐야겠다. 어차피 우리는 시간과 공간과 사람人 사이間의 존재이니 좀 더 흔들리면서 가야겠다.
* 앵거스 찰스 그레이엄, <도의 논쟁자들>에서 재인용
** 테오도어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 박지원, <열하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