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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Nov 19. 2021

그래, 지구는 둥그니까

@ Suseo


아무런 할 일이 없던 남자는 어느 날, 지구는 둥그니깐 '그냥 똑바로 걸어 가 볼테다' 라고 외치곤 지구본을 사서 직선을 하나 긋는다. 그런데 길을 떠나기 위해 걸어갈 방향을 바라보니 다른 집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행을 시작하지 못한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는 종이를 꺼내 필요한 것들을 적기 시작한다. 사다리, 밧줄, 우산, 구급낭, 겨울옷, 장화, 등산화 등등..


그러나 남자의 여행은 아직도 시작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을 너머, 숲 너머엔 강이 흐르고 있고, 그가 그은 직선에는 다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가 필요한데, 배를 가져가려면 수레가 필요하고,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 기중기가 필요하고, 기중기를 실을 배가 필요하다. 그렇게 필요한 물건들은 점점 늘어만 가고, 그것들을 모두 갖추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함을 계산하게 된 남자는 슬픔에 잠긴다.


"이 모든 것이 이 남자를 매우 슬프게 했다. 왜나하면 그는 그동안 80세나 되었고, 그가 죽기 전에 돌아오려면 서둘러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선 커다란 사닥다리를 한 개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사다리를 올랐다. 누군가 '터무니 없는 짓'이라며 만류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다리를 오른 그는 사다리를 끌어올리고, 저편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




어느 헌책방이었다. 먼지 쌓인 책들을 뒤적이다 페터 빅셀의 동화책을 집어들있다. 황갈색으로 변한 낡은 책장을 넘기다, 이 책 속의 이야기가 언젠가 사춘기 시절 읽었던 낯익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단돈 이천원을 주고 책을 사 왔다.


그 책에 담긴 첫번째 이야기가 바로 앞의 ‘아무 것도 이젠 더 할 일이 없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아무런 할 일이 없는 남자'의 모습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시작해야 하는데 계속 떠나지 못하는 이유들이 하나 둘씩 생겨난다. 떠나기 전에 필요한 것들이 자꾸 떠오른다. 그래서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슬프게도 날은 저물어 간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아무런 할 일이 없는 남자'의 모습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시작해야 하는데 계속 떠나지 못하는 이유들이 하나 둘씩 생겨난다. 떠나기 전에 필요한 것들이 자꾸 떠오른다. 그래서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슬프게도 날은 저물어 간다. 아무리 완벽한 여행 장비를 갖추었다 해도, 발걸음을 옮기지 않으면 여행은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 


"시작이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건 처음부터 너무 거창한 무언가를 생각하기 때문일게다. 특히, 나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너무 큰 그림을 그리고 헛 욕심만 내고 달려 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가상의 완전함에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하는 경향이 있다. 멋진 책 한 권을 뚝딱 써낸다거나, 세상을 놀라게 할 장편 영화를 제작한다거나 같은 일들. 혹은 꽉 막힌 변기처럼 답답한 회사를 바꾸고 싶다거나, 말도 안되는 부조리로 넘쳐나는 세상을 변화시킨다거나 하는 일들. 그렇게 우리는 한껏 부풀려진 천재와 영웅 신화에 세뇌되어 뱀 앞에서 얼어붙은 한 마리 개구리처럼 지레 겁을 먹고 시작도 못한 채 진이 빠져 버리고 만다. 


엄청난 그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으니, 또 그렇게 될 가능성이 낮은 듯하니 제풀에 지쳐서 혹은 꿈이 깨질까 두려워, 혹은 일말의 가능성은 남겨두고 싶어서 시작하지 않는 것일까. 힘겹게 노력해도 안되는 것만큼 꼴사나운 것도,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했는데 실패하는 것만큼 두려운 일도 없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내 인생 하나 어찌하지 못하는 내가 세상을 바꾼다는 것 따윈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러나 어떤 시작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시작은 거창하지 않아도 아니다. 작게 시작하는 것이 좋다. 크고 원대한 것을 하려 하지말고 일단 쪼개어보자. 역사하는 철학자 윌 듀란트의 시작은 작은 소책자에서 시작되었다.


1921년 ‘리틀 블루 북(Little Blue Books)’ 시리즈의 발행인 줄리어스가 우연히 뉴욕의 한 장로 교회에서 진행하던 윌 듀란트의 수업을 듣게 되었고, 그의 강의를 책으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다른 일들로 바빴던 윌 듀란트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줄리어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그에게 선금을 주며 철학자 한 명씩에 대한 소책자를 쓰게 만들었다. 이렇게 11권의 소책자가 모여 1926년 마침내 ‘철학 이야기’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 책의 성공을 발판 삼아 윌 듀란트는 총 11권의 대작 ‘문명이야기’의 집필에 착수할 수 있었다.   


완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시작의 비결이다.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하는 시작은 어쩌면 아주 작은 것들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는 일. 매일 읽고, 쓰고, 생각하고, 그리는 일. 낯선 곳으로 떠나고 사진을 찍는 것. 그것들을 연결하고 편집하여 형상을 부여하는 일. 무엇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묶어 한 권의 작은 책을 만드는 일.


사실 우리는 모두 이런 시작의 이야기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삶의 진실은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작한다고 말하지 말고, "그 무거운 궁둥이를 들고 나가" ** 시작하라.




* 페터 빅셀, <책상은 책상이다> 중 “지구는 둥글다”의 줄거리


**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첫번째 단계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 이제는 그 무거운 궁둥이를 들고 나가 영화를 만들어라.” - 로버트 로드리게즈,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십 분짜리 영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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