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센토 Nov 28. 2021

짧은 축제

@ 오모테산도


E는 백화점의 입구에 사뿐히 들어섰다. 1층에서 화장품과 액세사리들의 유혹적인 향기를 들이마시며 잠시 기분 전환을 한 뒤, 본격적인 쇼핑을 위해 C 브랜드의 명품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맵시있게 제복을 차려입은 말끔한 남자 직원이 환하고 품위 있게 반겨준다. E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숨을 한번 가다듬고 등을 곧추세우고는, 겉으로는 무심한듯 전부터 눈독을 들여왔던 ‘그것’이 있는 곳을 향한다. 


마치 나비 한마리가 곧장 꿀을 탐하지 않고 꽃잎 주위를 잠시 맴돌며 춤을 추듯, 평소에는 쇼윈도 밖으로 스치듯 지나치기만 했던 은은한 푸른빛의 핸드백을 매어보기도 하고, 날렵한 라인의 신상 하이힐도 두, 세켤레 신어본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는 이 순간만큼은 세상의 주인공이 된 듯, 뭔가 짜릿한 쾌감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간다. 


이 황홀하고 아름다운 환상도 ‘그것’을 구매하기로 최종 결정하는 순간 막을 내린다. 몇 달 치의 자유를 담보로 맡긴 채 신용카드를 결제하고, 커다란 쇼핑백을 맨 채 점원들의 황송한 배웅를 받으며 문 밖으로 나선다. E는 어찌할 수 없이 밀려드는 달콤쌉싸름한 공허함을 오늘 산 ‘그것’을 입은 자신의 모습에 대한 상상과 아까 신어보기만 하고 내려놓았던 은빛 하이힐로 더욱 매력적인 나로 거듭날 ‘그 날’에 대한 그리움으로 달래 본다. 어느덧 환한 쇼윈도의 조명은 꺼지고, 짧은 축제의 시간도 끝이 났다.




발터 벤야민은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란 짧은 글의 서두에 이렇게 쓴다. “자본주의에서 일종의 종교를 볼 수 있다. 즉 자본주의는 예전에 이른바 종교들이 그 답을 주었던 것과 똑같은 걱정, 고통, 불안을 잠재우는 데 핵심적으로 기여한다.” 벤야민의 비유를 빌리자면 아마도 우리는 ‘돈’이라는 물신을 숭배하고, ‘소비’라는 제의에 참여하여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으로 이 ‘자본주의’란 종교를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유혹적인 제의에 참가할 입장권을 얻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직장에서 같잖은 권위에 복종하고 사소한 모욕을 견디기도 해야 하지만, 고대하던 그 날 - 충분한 돈만 있다면 1년 365일 연중 무휴인 - 이 오면 쇼핑을 통해 그동안 짓눌렸던 누추한 피로함을 한방에 씻어낼 수도 있다. 물론 이후 또 다시 신을 영접하고, ‘시장에서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는 영혼의 일부를 포기해야 하는 굴욕의 시간들을 겪여내야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자유를 희생한 댓가로 자본이 만들어놓은 황홀한 놀이터에서 쇼핑할 권리를 얻는다. 상품이나 서비스에 덧붙여진 브랜드들은 얼마나 매력적인 유혹인가. 루이비통, 구찌, 카르티에, 샤넬, 에르메스, 벤츠, BMW, 포르쉐... 그렇게 황홀한 제의에 참여한 우리들은 잠시나마 누추한 일상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커다란 마음의 위안을 얻어 다시 차가운 거리로 나선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설픈 착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