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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Dec 15. 2021

스페인 독감

@ Madrid


흔들린다. 하루에도 열 두번, 넘어진다. 아까 넘어졌던 돌부리에 다시 걸려서. 한참을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온전한 착각이다. 세련되고 영악한 포즈로 잘 넘겼다고 생각했던 그 자리가 어느새 다시 내 앞에 서 있다. 채 익기도 전에 곪아버린 삶을 살다 돌뿌리에 걸려 넘어진 자리에서 고개 들어보니 아, 바로 너구나. 너였구나. 너를 풀어내지 않고는 그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는구나. 애써 외면하고 싶었지만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이 자리이구나.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서는 그 어디로도 흘러가지 못한다. 갈 지之자로 횡보하며 인생을 허비하고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영리한 것이 가장 큰 어리석음임을. 모든 길은 얄팍한 머리가 아닌 온 몸으로 열어 젖힐 수 밖에 없음을.




헛욕심을 부리다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두바이를 경유한 탓에 서울을 떠난 지 거의 20시간이 걸려서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호텔에 짐을 풀자 어느덧 오후 3시가 지났기에 늦은 점심을 먹고 프라도 미술관을 향했다. 제대로 본다면 꼬박 하루도 부족할 듯한 수많은 미술 작품들을 눈으로 겨우 훑어보기만 한 뒤, 숙소로 돌아와 쓰러져 잠들었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이었다. 시차 탓인지 일찍 잠을 깼고, 눈을 뜬 김에 - 내 체력을 잘 아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예상보다 마드리드의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습관처럼 사 마신 탄산수가 화근이 되었는지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스페인 독감*은 그렇게 찾아왔다.


이후 며칠 동안의 일정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고열과 오한으로 멋진 그림이고 톨레도 고성의 아름다운 풍경이고 간에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 앞의 스페인 요리들은 입 안의 톱밥 같았고, 거친 빵과 두툼한 고기, 짜디짠 빠에야 대신 뽀얀 쌀밥과 따뜻한 국이 그리웠다.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과 이별하는 일이었다. 익숙해져 있는 것들을 새삼스레 재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몸이 아프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안쪽을 향한다. 어쩌면 새로운 것을 보고자 하는 욕심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제서야 보는 것 또한 욕심이란 걸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무리한 욕심은 감기를 낳고, 감기는 자기 반성을 낳는다. 나는 오직 내 몸이 기억하는 나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모처럼 여행을 떠났는데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큰 마음 먹고 떠난 여행지에서 재수없게 비가 내린다고 투덜대지는 말자. 어차피 비는 그치고 날은 갤 테니, 혹 줄곧 비가 온다면 그 장소의 질감과 시간의 감촉은 그렇게 물기 머금은 당신만의 독특한 풍경으로 아로새겨질테니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몸이 있어야 마음이 있다. 그리고 때로 멈추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스페인의 감기가 내게 남긴 처방전 속 문구이다.  




* 사실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과는 상관없이 1918년 미국에서 발병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이다. 왜 그렇게 명명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물론 내가 걸린 감기와도 관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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