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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Jun 09. 2020

철도 건널목

@ 시모키타자와


골목을 걷는다. 늦은 낮잠과 전날의 숙취로, 개운치 않은 기분을 조금이나마 바꿔 볼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2월의 짧은 해는 벌써 졌다. 무작정 밤길을 걷는다. 공기가 차갑다. 하얀 입김과 함께 주변의 풍경들이 그녀의 시야 속으로 어두운 물결처럼 밀려 들어온다.


뎅뎅뎅, 소리와 함께 내려온 노랗고 까만 줄무늬의 막대가 앞을 가로막는다. 철도 건널목에 멈춰서서 잠시 깊은 숨을 들이켰다 내쉰다. 괜히 몸이 어스스해져 패딩의 앞깃을 여며 보기도 한다. 덜컹대는 소음과 함께 사람들을 가득 실은 시부야행 전철이 지나가고, 앞을 가로막고 있던 기다란 바가 허공의 원 위치로 되돌아 간다. 일시 정지되어 있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다시 플레이되고, 그들과 함께 철길을 가로지르던 그녀는 순간, 먹먹해진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모든 길은 그 어디론가는 이어질테지만, 그 어딘가를 원하지 않는 그녀에겐 사방 모든 곳이 마치 불가능한 선택지인 듯 느껴졌다.* 그 때 천.만.다.행.히.도 그녀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짐짓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일상을 연기해내었고, 무심한 듯 시모키타자와의 밤은 깊어간다.




많은 작가들은 이중 생활을 했다. T.S. 엘리엇은 은행원이자 출판계 종사자였고, 프란츠 카프카는 보험회사 직원이었다. 스티븐 킹은 영어 교사였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재즈 클럽을 운영했다. 이렇게 전업 작가가 아니었던 일반인이 어느날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뒤 한쪽 구석, 가령 식탁과 같은 곳에 앉아 쓰는 것을 일컬어 일명 ‘키친 테이블 노블(kitchen table novel)’이라고 한다. 소설가 김연수는 이렇게 쓴다.


“키친 테이블 노블이란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 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


세상을 바꾸리란 어떤 거창한 희망도 없이, 어디를 향할 것이란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그냥 긁적여 나가는 것.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느꼈던 ‘ 애잔함’의 근원이리라. 무엇이 그들에게 무용한 소설을 쓰도록 이끄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도 무언가를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도쿄에서는 서울과는 다르게 심심찮게 철도 건널목을 만날 수 있다. 아마도 전쟁을 겪은 서울이 1950년대 이후 자동차를 중심으로 길이 형성되었다면, 도쿄는 1900년대 초에 만들어진 철길이 그대로 유지된 탓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이 철도 건널목은 횡단보도와는 다른 묘한 매력이 있는데 횡단보도가 빨간 눈빛의 신호로 사람의 횡단을 차단한다면, 철도 건널목은 기다란 막대가 내려와 몸짓으로 직접 막아 세운다. 보다 아날로그적이라고 할까. 횡단보도는 길을 건널때도 사람과 자동차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되는 반면, 철도 건널목은 신호음과 함께 바가 내려오거나 올라가 있는 동안에는 온전히 인도 혹은 철길로 유지된다.”


뜬금없는 고백이지만, 내게는 은밀한 욕망이 하나 있는데 그건 어쩌면 ‘철도 건널목’ 처럼 이미지와 텍스트가 교차하는 풍경 같은 것을 그려내는 일이다.서로 다른 독립적인 이미지와 텍스트가 각자의 흐름을 지닌 채 흘러와 만나 또 다른 음률을 들려주고, 새로운 풍경을 펼쳐낸 뒤, 다시 각자의 흐름대로 흐르게 하는 것.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게 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그런 것들을 쓰고, 짜깁고,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사유 이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미지의 세계에 끌리는 것은 지식에 대한 알 수 없는 어떤 은밀한 반항심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와는 반대의 이유로 텍스트에 끌린다. 비록 누군가에게 전달되지 않는 헛된 몸짓에 불과할지라도 희망은 상실의 자리에서 태어나는 법이니.


“나는 오직 내 영혼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고 했던 대사상가의 고백처럼 내가 구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나의 영혼 뿐. 불완전한 이 글과 이미지가 그러하듯 불안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 읽고, 쓰고, 무언가를 프레임에 담아본다.




*

"아무데로나 가려는 자는 그 어느 곳에도 가지 못하는 법.

그 어떤 항구도 목적지로 삼지 않은 사람에게는 바람도 아무 쓸모가 없다."

- 미셀 드 몽테뷰, <수상록>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칼 마르크스, <고타 강령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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