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조카 "삼촌.. 저는 지금 마음이 급한걸요.."
30년의 시간이 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통찰력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 걸까.
2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삶에 대한 무게가 체감될 때쯤 꼭 한 번씩 찾게 되던 삼촌.
마치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는 '전과'만 펼치면 다 해결되던 것처럼
그런 든든한 '전과'같은 존재가 삼촌이었다.
아쉽게도 삼촌과 그리 친하게 지내오지도 못했던 것은, 물리적으로 항상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애살 있는 성격이 못되었던 내 탓이 크다. 어쨌거나, 체감되는 무게가 커질수록 삼촌에게 연락하는 빈도가 더 잦아진 것은 사실이다.
왜 그토록 삼촌을 찾았는지 생각해보면 안정만 추구하는 부모님께는 들을 수 있는 인생에 대한 조언들,
그러니까 "남들 다 가는 평범한 길을 가고 각 시기에 해내야 하는 숙제들(취업, 결혼, 출산 등등)을 잘 해내라"는 말 대신 "잃을 게 없을 때 이것저것 많이 도전해 보고 인생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 돈을 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는 쓰고 잃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단다. 평생을 가지고 갈 자산을 남기는 일이야. 공부도 치열하게 해 보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들을 많이 하길 바란다"라는 조언들을 해주시는 분이셔서.
미혼이신 삼촌은 어쩌면 미혼이신 덕분에 삶에 더 여유가 있으신지도 모르겠다.
그 여유가 단지 경제적 여유뿐이라면 내가 그토록 삼촌을 존경하지는 않을 텐데, 삼촌의 여유는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다.
본업을 하시면서도 그와는 별개로 시간을 내어 아이들에게 태극권을 가르치신다거나, 투자를 하시면서 틈틈이 소소한 용돈을 따로 만들어 주변 지인들이나 가족들을 데리고 1박 2일 혹은 당일치기 여행을 간다거나(비용은 삼촌이 다 부담하신다..), 그 여행에 동행하는 사람들의 연령대나 체력, 계절과 경관 등을 고려하여 코스를 완벽하게 준비하시는 것까지.. 그런 정신적 여유가 나에게는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일 것이다.
이태원 코로나 사태로 또다시 전국이 시끄러워진 주말.
서울을 가야 할 일이 생겨 미리 삼촌께 연락을 드렸다.
"삼촌~혹시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시간 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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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비워 놓을 테니, 시간 정해서 연락 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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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만에 본 삼촌은 조금도 늙지 않으신 모습이었다.
해마다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만 되면, 얼굴 늙어가는 것에 가장 예민한 나, 사촌언니, 사촌동생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온 식구들이 해마다 나이 들어가는 게 눈에 보이는데, 도대체 왜 삼촌만 얼굴이 젊어지시는 거야? 관리받으실 분이 절대 아닌데?"
말을 뱉으면서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 사람의 인생이 얼굴에 나타난 결과라는 것을.
주말에도 확인했다. 아직 팔자주름이 삼촌의 삶에 침투하지 못했구나.
저녁식사를 하며, 삼촌도 삼성전자 주식을 사셨냐는 둥 요즘 이런이런 책 많이 나오는데 삼촌도 읽어보셨냐는 둥 오빠네 가족들이 과식하는 바람에 생긴 웃긴 에피소드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애살있게 연락하지 못했던 시간들을 메꿔보려 했다. 애살은 없어도 말은 많아서 다행이었다.
저녁을 먹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 하자고 하시겠지?
당연한 코스로 생각했는데 삼촌은 자연스럽게 잠실역 지하로 내려가셨다.
'집에 가셔야 하나 보다..' 생각하던 찰나, 삼촌은 지하상가에 있는 토스트와 생과일주스, 커피 등 이것저것 다양하게 파는 가게로 향하셨다.
7년째 돈 벌고 있는 조카가 식사 한 번만 사게 해 달라며 매달리는 나를 뒤로하고 저녁 값을 계산하신 삼촌이 커피 한 잔 살 기회를 내게 주신 것이다. 1,500원짜리 아메리카노 두 잔의 값을 지불하고, 삼촌과 나는 잠실역 지하광장 벤치에 앉았다. 카페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오픈된 공간에 앉아, 30년이라는 시간을 덜 보낸 조카와 그만큼을 더 보낸 삼촌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는 꽤 맘에 들었다.
사실 요즘 이러이러한 고민이 있다며 망설이던 이야기를 시작하자 삼촌은 시선을 바닥의 한 곳에 고정하셨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내 눈을 보고 있지 않아도 삼촌은 귀로 들어온 내 이야기를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보고 계시는 것 같았다. 마치 소리로 들어온 정보를 이미지로 전환하기 위해 바닥을 빈 도화지로 이용하려는 사람처럼. 그렇게 보였다.
즉각적인 해답을 갈구하는 나에게 삼촌의 말씀은 항상 무겁고 더디게만 느껴진다. 그건 늘 내가 가장 못하는 '인내'와 '꾸준함'을 필요로 하고, 당장 마음이 급한 나를 더욱 좌절시킨다. 이번에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삼촌의 마지막 말씀은 이랬다.
"시간이 없는 사람은 돈으로 메꿔야 하는 거지만, 너는 지금 시간을 기다리면 되지"
삼촌... 저는 지금 시간을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라는 말은 소용없는 말이란 걸 알기에,
무거운 마음을 안고 돌아와야 했지만, 삼촌의 말이 또 내게 어떤 생각의 전환을 불러일으킨 것인지,
다음 날 아침 머리를 감고 있는데 이런 낯선 생각이 스멀 올라오는 것이었다.
'한 치 앞만 보고 있었구나. 장기적 계획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