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 나는 스펀지가 되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몸과 마음에 와 닿는 모든 것을 쏙 빨아들일 수 있는 스펀지. 이유가 아마, 지금까지는 Output을 생각하지 않고 Input을 해왔는데 언젠가부터 Output을 염두에 둔 Input을 하기 시작해서일 것이다. Output에 대한 욕구가 올라갈수록 Input에 대한 욕구도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스펀지가 부러워진 요즘이다.
2.
퇴근하고 왔더니 오래간만에 초를 켜놓고 싶었다. 괜히 분위기를 잡고 싶었는지..
캔들은 찾았고, 캔들 라이터를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안 쓰는 물건들을 쌓아 놓은 창고방으로 가서 라이터가 있을 거라 짐작되는 곳을 뒤적뒤적거리다가 작은 수첩들이 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창고방에서 나올 때 내 손에 들린 것은 라이터가 아니라 세 권의 수첩이었다. 무얼 적어 놓은 지는 나도 모르겠다.
3.
라이터가 없어서 가스레인지 불을 이용했다. 생각보다 간단했다. 굳이 라이터를 찾으러 갈 필요도 없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 수첩을 하나씩 펼쳤다.
4.
내가 '글'이라는 형식으로 내 생각을 쓰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이과 출신에 공대생들의 세상에서 일하다 보니 문장을 쓰는 일은 드물었다.
모든 것은 숫자로, 핵심만 요약해서 간단명료하게! 이것이 내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에서 지켜야 하는 철칙이었다. 심지어 대학교 전공과목 시험 때는 길게 서술하면 점수가 깎이는 적도 있었다. 쓰는 일이 드물다 보니 잘 못썼다.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는 현상이 나에게는 일어나곤 했다.
5.
그래도 쓰고 싶었나 보다. 뭐라도 쓰고 싶었는지 수첩에다 짤막하게 끄적인 것들이 보였다. 대부분은 그냥 그때 했던 생각들이었다. 가령 "넷플릭스 suits가 영어 공부하기에 좋다네" 같은 것들. 스윽 훑어보다가 한 곳에서 멈췄다. 어떤 회사의 입사시험에 있는 논술, 작문, 면접의 어려움을 얘기하던 날 쓴 것으로 추측되는 메모였다.
2019.01.22.TUE
사촌언니랑 글쓰기의 어려움 얘기하면서.
"논술, 작문, 면접은 네 안에 있는 콘텐츠를 확인하는 수단일 뿐이지.
건축으로 치면 외관은 이쁘게 잘 덮었는데 문 열고 들어가니 무너지는 것처럼. 그럼 안된다고. 그런 것처럼 튼튼한 콘텐츠가 있어야겠지.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그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해왔는지. 어떤 책과 콘텐츠를 보고 듣고 읽어왔는지. 그걸 실제 결과물로 어떻게 내봤는지. 성과(시청률, 조회수, 뷰수, 이슈, 수상경력)가 있었는지. 이런 것들을 이력서, 논술, 면접으로 확인하는 거지. 평소에 많은 콘텐츠를 보면서 다양한 자극에 다양한 생각을 해 볼 것!"
부연 설명은 없었지만, 분명 언니가 내게 해 준 말임이 틀림없다.
2020년 6월에 Output에 마음이 쏠려서 스펀지가 되고 싶어질 나에게, 작년 1월의 언니가 넣어준 Input이었다. 1년 반 동안 내 안에서 무럭무럭 자랐나 보다. 지금 내 주변엔 섭취하였고 섭취 중인, 앞으로도 섭취하고 게다가 잘 소화하고 싶은 다양한 콘텐츠들로 가득하다. 내가 끌어모은 것들이다. 잘 쓰는 글은 아니지만 결국 이렇게 글도 쓰기 시작했고(글을 전혀 쓰지 않는 삶에서 글 쓰는 삶으로 들어가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려하고 있다. 언니의 말대로 내 안의 콘텐츠를 튼튼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6.
필요도 없는 캔들 라이터를 굳이 찾으려 창고방에 들어갔다가 수첩을 발견했다.
내가 수첩을 발견한 줄 알았건만, 천만에, 수첩이 나를 그리로 부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