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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채 Feb 07. 2018

나는 어쩌면 왕자였을지도 모른다

고아에서 낮술에 취해

#고아에서


‘전생에 왕자였던 건 아닐까?’

지그시 눈을 뜨고 인적 드문 바다를 바라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날이 발광하는 자기도취에 전생의 기억을 더듬는 인도를 만났으니… 정말 그랬던 것 같다. 뜬금없지만, 대낮부터 차디찬 맥주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해변의 테라스에 누워 있으니 그리 뜬금없지만도 않다.


벌써 일주일째다. 맘 내킬 때 일어나 해변을 산책하다가 맘에 드는 아무 해변 카페에 들어가 잉글리시 블랙퍼스트와 홍차 한 잔으로 브런치를 먹고, 느긋하게 이곳저곳 구경한 뒤 다시 바다 허리에 안겨 한 손엔 소설, 다른 한 손엔 맥주 한잔을 들었으니, 이대로 살며시 눈을 감으면 라즈꾸마르의 각이다. 실제 왕자라도 특권의 의무란 이렇게 한가하지 않은 법인데… 이런 호사가 없고, 한량 연기라면 메서드급이라 디키를 흉내 낸 리플리쯤이야 가소롭다. 고아는 굳이 긴 말이 필요 없는 낙원이다.


나도 여행의 한때 이곳에서 여독을 풀었다. 욕망을 해금하고 부족했던 육식을 즐기며 독한 칵테일에 취했다. 스쿠터를 빌려 이곳저곳을 다니기도 했다. 젊고 열정적인 안주나와 가족 바캉스 분위기의 칼랑구트를 거쳐 마지막에는 좀 더 한적한 바가 해변에 자리 잡았다. 육지로 움푹 들어가 숲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인데, 다른 해변에서 며칠간 쓴 비용을 모두 합쳐도 하루 체류 비용밖에 안 나올 만큼 비교적 고급한 편이었다. 주제를 모르고 사치스러운 기분에 잠시 움찔했지만, 고아에서 사치라고 해봐야 사실 상대적인 것이다. 앞선 곳들이 너무 저렴했다.


애초 비싸서 아끼기보다는 있어도 쓰기 어려운 인도 여행이었다. 바쁜 여정 중에 마땅히 구할 곳이 없어서 대강 끼니를 해결하고, 심지어 어쩔 수 없이 거르는 경우도 있었다. 인도식은 별미지만, 먹을거리가 다양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탈리는 포만감이 짧았다. 짜이는 원숙해질수록 썼다. 지갑은 두둑해도 항상 배고팠다. 그 부족한 부분을 모두 채워주는 곳이 인도의 휴양지들이고, 고아는 마침 긴 여정 속 잠시 앉아 종아리를 주무를 오아시스였다.


#고아에서


한편 고아는 독특한 매력을 품은 곳이다. 식민지 시대의 이국적인 도시로 포르투갈령이었는데 당대를 주도했던 도시들과는 또 다른 느낌을 풍긴다. 포르투갈은 포교 등 문화 전파에 있어 강압적이었고,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또한 가장 마지막까지 반환되지 못했던 땅이기도 한데, 그 땅을 되찾으며 인도의 자긍심을 되살린 곳이기도 하다. 그러한 모든 것을 품어 인도의 품에 돌아온 지금도 인도의 외딴 동네, 인도인 듯 인도 아닌 인도다.  


서양인이 많아 마치 유럽의 어느 휴양지에 온 기분도 든다. 며칠 머물 생각으로 들렀다가 가지고 온 물품을 장물로 처분해 버리고 체류 비용을 마련하는 장기 여행자들도 있다. 무서운 매력이 도사린다고 할까? 나 역시 순간 혹 하여 이곳에 머물며 평생 글을 쓰고픈 충동이 들었다. 나그네 쉴 곳에 천녀유혼의 손길이 유혹하듯 매혹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만약 여행 초반에 머문다면 이어지는 여행이 도리어 어려울지 모른다. 다른 곳으로 떠나기 싫어질 수도 있다. 반면, 적당한 위기의 시기에 혹은 여행의 말미에 유종의 미를 거두는 장소라면 무조건 옳다. 험난한 수행 끝에 무릉도원을 찾은 격이다. 힘을 회복할 수 있고, 뒤가 없다면 남은 모든 걸 쏟아낼 수도 있다. 타의적 검소함이랄까? 어차피 다른 곳에선 굳이 아끼지 않아도 검소해진다. 내 경우, 쓸 땐 쓰라는 평생의 교훈을 고아에서 처음 배웠다.


일주일 전만 해도 행색 초라한 배낭 여행자였는데, 불과 한 주 사이 태세 전환에 극적 반전이다. 인도의 반전은 원체 현란하다. 그 별세계는 어디 갔고, 이건 또 어떤 안드로메다인가? 그 사이 고생했던 기억도 신기루처럼 가물가물해지고, 지쳐서 여행을 접을까 흔들리던 마음에 활력이 되살아난다. (원래 기억이란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는다고도 하지 않던가!) 이렇듯 인도는 고되지만 여행의 발걸음을 끊임없이 재촉한다. 가만 보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던데 때론 배고픔을 잊고 홀리듯 거닌 곳들도 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난, 집으로 가기 싫다. 되도록 오래 인도로 머물고 싶다.


전생은 몰라도

며칠쯤 왕자가 되어보고 싶다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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