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에 비친 인천 | 굿모닝인천 8월, Vol. 344
숙골로 사람들
2008, charcoal on canvas, 335×163cm
제물포역 뒷동네 ‘물이 많은 골짜기’ 숙골로, 도화동. 때론 고단한 삶에도, 재개발의 거센 바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털거덩 털거덩’ 지하철 1호선 열차 지나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들린다. 제물포역 북부, 도화동 사람들에게 그 소리는 요란한 소음이 아니다. 따스한 추억과 삶이 깃든 일상의 언어이자 음악이다.
신인철(53) 씨는 1999년 제물포역 뒤편으로 왔다. 결혼해 막 가정을 이룬 때다. ‘열심히 잘살아 보자’, 아내와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다. 인천대학교가 가까이 있고 유동 인구가 많아 장사하기 좋으면서도,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지점에 제물포역이 있었다. 부부는 ‘컬트락’이란 간판을 걸고 호프집 문을 열었다. 밤낮이 바뀐 삶이었다. 그사이 아들 하나 딸 둘, 아이들이 태어났다. 살아내야 했다. 10년 정도를 버티다 더 큰 가게를 마련했다. 지금은 어엿하게 2층짜리 음식점과 카페를 운영한다.
“힘들었죠. 다시 하라면 못 해요. 그때는 젊었잖아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지만 얼굴은 웃고 있다. 세상에 쉬운 밥벌이가 어디 있으랴. 하나 잘 자라준 자식들을 떠올리면 살아온 삶이 하나도 힘들지 않다. “모두 어려운 시기를 겪었는데, 다들 잘살고 있겠죠.” 그리움도 문득 밀려온다. 인천대학생들이 ‘무서운 형’이라고 부르던 호프집 젊은 사장님 얼굴엔 세월의 주름이 파였다. 어느덧 한 가정을 이룰 나이가 됐을 학생들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이 떠나고 동네는 텅 비어갔다. 남아있는 사람과 공간은 나이 들어간다. ‘중심’은 어느새 ‘변두리’가 됐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언제까지라도 여기 살 거예요. 우리 동네, 내 집, 제물포.” 제물포는 여전히 그 삶의 중심이다. 전성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찻길 옆, 오래된 건물과 집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동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시간이 켜켜이 쌓아 올린 삶의 흔적을 밟는다. 지척에 고층 아파트와 빌딩 숲이 들어서 있지만, 마치 다른 시간을 사는 듯하다.
이 골목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이봉용(68) 씨는 세 살 때 충남 당진에서 화수동으로 왔다. 아버지가 만석동에 있는 인천 판유리 공장에서 일했다. 판유리는 6·25전쟁의 포화에 휩싸였던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정부가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의 지원을 받아 추진한 3대 기간산업 중 하나였다.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된 월미도가 가까이 있잖아요. 폭발물을 가지고 놀다 뒤늦게 터지는 사고도 종종 있었어요. 그래도 폐허 속에서 술래잡기하며 이 골목 저 골목 신나게 뛰어 다녔지요.” 그날의 기억이 오롯이 아름다운 건 철없던 시절이어서도, 아픈 기억을 잊어서도 아닌, 아버지 때문이리라. 가족을 위해 부단히도 삶을 지탱해 내던 아버지 덕분이다.
도화동에는 1974년에 왔다. 아버지는 형과 누이가 서울에 있는 직장에 편히 다니도록 제물포역 가까이에 새집을 장만했다. 얼기설기 지은 판잣집들 사이에 시멘트 벽돌로 쌓아 올린 근사한 양옥집이었다. 그러고는 10개월 만에 교통사고로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흔들리지 않았다. 자식이 넷이나 됐다. 그 앞에서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자식, 손자들 건사하며 평생 바지런히 살았다. 그러고는 94세의 나이에 영영 가족 곁을 떠났다. 벌써 수년이 지났지만 어머니가 그립다.
‘도심공공주택복합사업’, 재개발 바람을 피해 나지막이 엎드려 있던 이 동네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떠나는 사람도, 남는 사람도, 다시 돌아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온 가족이 기찻길 옆 양옥집으로 이사 오던 그날의 기억이 선명해요. 어머니가 이 자리에서 눈을 감았어요.” 그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노인과 들개
2007, acrylic on canvas, 53×45.5cm
누구나 나이 들고 언젠가 홀로 남겨진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다.
거리를 떠돌던 개와 할머니가 만났다. 방금 봤지만 서로를 깊이 이해하듯, 한참 동안 온기를 나눈다. 그러다 불현듯 개가 떠난다. 무심히 떠나는 뒷모습을, 노인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다시 할머니만 덩그러니 남았다.
“우리 인생과 같아요. 누구나 늙고, 언젠가는 홀로 남겨지고, 또 떠나야 하지요.” 인생은 혼자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대끼며 함께 살아간다.
류성환(49) 작가는 초상화가다. 사람 얼굴을 그린다. 한가로운 오후, 수봉공원에 모여 갈 곳 없는 몸을 뉘이는 노인들, 재개발로 살던 집에서 떠나야 하는 할머니, 끈끈한 바닷바람이 스치는 어부의 검게 그을린 얼굴…. 20여 년 동안 수많은 인천 사람을 화폭에 담았다.
“꿈이 무엇인가요?” 화판 너머 사람에게 그가 늘 던지는 질문이다. 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언젠가 이룰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오늘은 마을의 유경이(65) 목사가 그 앞에 앉았다. “어릴 적 꿈은 작가가 되는 거였어요. 멋진 소설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작가. 그래도 목회하길 잘했어요. 이웃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요.” 사실 그는 이미 꿈을 살아내고 있다. 언젠가 제물포역에서 8년이나 떠돌던 노숙자를 보듬어 새 삶을 찾아주기도 한 그다.
그림이 완성됐다. “황홀해요. 제가 이렇게 예쁜 사람이었나요.” “그럼요, 제 눈엔 그리 보여요.”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는다. 그려진 사람도 그린 사람도, 이 순간 행복하다.
“다 늙어빠진 얼굴을 그려서 뭣 하려고.” 누군가를 그리는 일, 특히 나이테 같은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을 담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언제 죽을지 몰라. 영정 사진으로나 써야겠다.” 살면서 숱한 풍파를 겪었을,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얼굴. “단 하루를 살더라도, 꿈을 꾼다면 행복하지 않을까요. 이제 고단한 삶이 깃든 얼굴을 마주해도 슬프거나 아프지만은 않아요. 희망을 먼저 떠올리니까요.” 그가 운영하는 ‘제물포 갤러리’는 이 골목 깊숙이에 있다. 5년 전 갤러리 문을 처음 열었을 때, 동네 사람들조차 잊힌 원도심에 갤러리를 연 그가 무모하다고 했다. 하지만 전시를 열고, 동네 사람들에게 예술 교육을 하고, 함께 골목골목에 그림도 그렸다. 오늘 갤러리는 하나에서 세 곳으로 늘어났다.
“원도심 사람들 삶엔 부침이 있어요. 의지와 상관없이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불안하게 하지요. 도시가 변하더라도 살아가는 사람들은 끌어안고 가야 합니다.” 살면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정이 들었다. 떠나기 쉽지 않으리라.
덜컹거리는 지하철 1호선에 몸을 싣는다. 창밖에 어둠이 내린다. 재개발 바람이 불어닥칠 이곳은 앞으로 또 어떤 모습이 될까. 시간은 흐르고 누군가는 떠나고 또 누군가는 오기 마련이다. 분명한 건, 제물포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늘, 2008, charcoal, acrylic on canvas, 163×131cm
시간이 느릿느릿 흐르는 마을. 늘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이곳에도 변화의 바람은 분다.
그림 류성환
류성환 작가는 인하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예술기획과에서 수학했다. ‘지역 주민과 대화하고 함께 고민해 지역 특색에 맞는 꾸밈을 실천하는 활동’이라는 의미를 담은 공공미술로 사람과 함께하는 예술관을 표현하는 작품 활동을 한다. ‘인천 사람 초상화 로드 다큐’, ‘기울어진 삶’ 등 13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도화동에서 ‘제물포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으며 ‘숙골로 스쾃 커뮤니티’ 등 문화기획자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