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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모닝인천 Sep 01. 2022

아무도 울지 않는 밤 -8-

옴니버스 소설 | 굿모닝인천 9월, Vol. 345

밤을 건너는 사람

글 안보윤 │ 일러스트 송미정




기준은 난감한 얼굴로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탓에 머릿속이 부옜으나 방금 들은 말만큼은  더없이 선명했다. 기준의 할머니는 기준이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지금 배 탔다!” 

배요? 할머니, 무슨 배요? 기준이 묻자 할머니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배는, 우리 귀한 손주네 집으로 가는 배지. 전화가 바로 끊어진 탓에 기준은 꿈인가 싶어 멍 니 앉아 있었다. 곧이어 전화를 걸어온 아버지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다시 잠들어 버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번 추석 연휴에 네가 안 왔잖냐. 할머니가 못내 섭섭하셨는지 너 오는 길이 그렇게 멀고 복잡하냐 물으시더라고. 여차저차해 간다고 길을 알려드렸더니 휭하니 나가버리시지 뭐냐.”  

할머니가 계시는 백령도에서 기준이 사는 동네까지는 배로만 네 시간, 선착장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근 한 시간을 더 이동해야 했다. 기준에게도 녹록지 않은 거리인데 일흔네 살 할머니에겐 더욱 혹독한 여정일 게 뻔했다. 동네에 무사히 도착한다 해도 버스에서 내린 뒤가 더 큰일이었다. 집까지 이어지는 가파른 언덕길을 할머니가 걸어 올라오실 수 있을까. 기준이 질끈 눈을 감았다.      

추석 연휴 내내 기준이 편의점에서 일한 건 안부 때문이었다. 친척들과 마주했을 때 자연스럽게 화제가 되는 안부. 너는 어떻게 지내니 취직은 했니 남들은 금세 척척 취업하던데 너는 왜 아직이니 만나는 사람은 있니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너는 어째 전부 다 늦되는구나, 기준은 그런 말들 속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질 자신이 없었다. 기준을 걱정해 건네는 말이라 해도 수십 번의 불합격 통보가 누적된 상태에서는 오롯한 비난으로만 들릴 것 같았다.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됐을까. 

기준은 초조한 마음으로 도로를 따라 올라오는 차들을 살폈다. 마침 시내버스에서 커다란 등산 가방을 멘 노인이 내렸다. 챙이 넓은 모자와 스카프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으나 기준은 단박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어린 시절 기준은 백령도 할머니 집에서 방학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니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어깨와 급한 성격 그대로 성큼성큼 내딛는 익숙한 걸음걸이를 놓칠 리 없었다. 할머니! 기준이 달려가자 할머니는 대뜸 가방부터 내려 넘겨주었다. “너 먹을 거니 네가 들고, 어디 함 가보자.”  

휘휘 주위를 두른 할머니가 사거리 편의점에서 북쪽으로 뻗은 언덕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 사는 곳에 아주 야박한 언덕이 있다고 하지 않았니. 그게 저기냐?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할머니가 언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망설임 없이 곧고 힘찬 걸음이었다. 기준이 가방을 걸머멘 채 할머니 뒤를 쫓았다. 가방 안에서 가볍고 각진 것들이 달그락달그락 부딪는 소리가 났다. 

언덕길은 변덕스레 이어졌다. 자갈 섞인 시멘트 바닥이 어느 때는 새까맣고 어느 때는 모래투성이였다. 높이가 제각각인 계단 너머 홈이 파인 경사로가 이어지다 갑작스레 탁 트인 공터가 나오기도 했다. 사방엔 온통 집이었다. 언덕길만큼 어수선한 모양새의 낡은 집들. 꼭대기로 향할수록 집들은 눈에 띄게 작고 납작해졌다. 기준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었다. 기준이 조금만 넉살 좋게 친척들과 어울렸다면 할머니가 고생할 일도, 자신의 남루한 자취방을 내보일 일도 없었을 터였다.  

죄송해요, 할머니. 기준은 저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연인의 이별 선언과 수많은 회사들이 건넨 불합격 통보, 면접관의 질책까지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기준의 말들이 터벅터벅 쌓였다. 부서진 시멘트 담만큼이나 볼품없는 말들이라 기준은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너 어릴 때 연 날리던 기억 있나?”  

땅바닥만 보고 걷던 기준이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가 왜 갑자기 연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해서였다. 처음보단 느려졌지만 여전히 고른 리듬으로 걸음을 옮기며 할머니가 말했다.      

“어린애가 섬에서 뭐 할 게 있었겠냐. 물놀이도 못 하는 겨울에는 연이나 날리고 놀았지. 다른 애들은 엄벙덤벙 연을 만들어 놀러 나가는데 기준이 너는 안 그랬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방에 앉아 살대를 구부려 붙이고 꼬리를 만들고 연을 말렸지. 가오리연이고 방패연이고 네가 만든 건 하나같이 가볍고 똑발랐어.” 

“요령 없이 고지식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기준이 한숨을 쉬자 할머니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만든 연이 제일이었다.”  

할머니 뒤로 작은 화단이 보였다. 꽃을 빼곡히 심어 가꾸는 파란 대문집을 지나면 이제 정말 언덕 꼭대기였다. “다른 연들은 금세 찢어져 고꾸라지는데 네 연은 잘도 날았어. 네 연이 제일 오래, 제일 멀리 날았다. 남들보다 속도는 늦어도 기준이 너는 가장 튼튼한 연을 만들 줄 아는 아이였어.” 

제법 선선해진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땀을 식히기엔 충분치 않아도 잠시 숨을 돌리기엔 충분한 바람이었다. 너는 찬찬한 아이다. 그걸 알아주는 곳이 틀림없이 나타날 거야. 말을 마친 할머니가 스카프를 풀어 땀을 닦았다. 어느새 두 사람은 기준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할머니는 물 한 컵을 다 마셨다. 기준은 가방 안에서 쏟아져 나온 김과 미역, 건어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자가 온 건 그때였다. […서공가구 신입 공채에 최종 합격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자세한 내용은 지원서에 써주신 메일 주소로…] 기준이 우뚝 멈췄다. 서공가구는 남동공단 내 위치한 제법 큰 규모의 중소기업이었다. 기준은 최종 면접 때 둥근 안경을 쓴 면접관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원리원칙에 따라 한결같은 마음가짐으로 일하겠다라. 요즘 젊은 사람 같지 않네.” 면접장에서 나올 땐 조롱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정반대 의미였던 모양이었다.  

할머니, 기준이 부르자 그래, 하고 답이 돌아왔다. 할머니는 창턱에 놓인 카네이션 화분에 물을 부어주고 있었다. 부러진 꽃대 옆으로 잎줄기가 새파랗고 풍성하게 자라난 화분이었다. 그것 봐라, 내가 뭐랬니. 기준이 할 말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는 듯 할머니가 말했다. 열린 창으로 바람 이 한 발짝 걸어들어와 묵은 공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





안보윤 | 1981년 인천 출신. 2005년 장편소설 <악어떼가 나왔다>로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자음과모음문학상 수상. 소설집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소년7의 고백>, 장편소설 <오즈의 닥터> <사소한 문제들> <우선멈춤> <모르는 척> <밤의 행방>, 중편소설 <알마의 숲>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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