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에 비친 인천 | 굿모닝인천 11월, Vol. 347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따뜻하고 섬세한 손길을 따라 인천 사람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에는 세상에서 한걸음 물러서 오롯이 빛나는 섬, 동검도. 조광호 신부와 김가빈 작가, 두 예술가의 눈으로 그 섬의 빛과 색을 본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전재천 포토 디렉터
로고스의 암호, 60×120cm, 백유리·유약 소성, 2021, 조광호
깊고 짙은 ‘코발트블루빛’ 비밀스러운 세상.
창 너머 갯벌에 물이 차오르면, 세상에 푸른빛을 퍼트린다.
‘마지막 단계에서 완성된 세상’이라는, 작가의 도상圖像을 담았다.
마음에
빛, 반짝이다
봄이 오기 전이었다. 아직 찬 공기를 가로질러 동검도 바닷가 작은 예배당을 찾았다. 가슴이 답답한 사람, 외로운 사람, 쉼이 필요한 사람, 누구든 품어 안는 ‘마음의 집’. 그 집을 짓고 돌보는 조광호(75) 신부는 말했다. “싹이 돋고 꽃이 핀다고 봄이 아니다. 봄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긴 겨울을 버텨온 사람에게만 온다”라고. 그렇게 다시, 봄을 맞았다.
오늘 다시 찾은 동검도 ‘마음의 집’엔 가을 햇살이 비추어 들고 있었다. 물빛으로 투명하게 반짝거리는 햇살이다. 그 빛을 따라 채플chapel 옆 스테인드글라스 갤러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2층으로 올랐다. 삼면이 유리로 둘러싸였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세상.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빛이 스며들고 흔들리는 나뭇잎과 물결이 비추어 든다. 그 빛은 햇살의 농도와 기울기에 따라 시시각각 다르다.
공간 끝 창 모양의 프레임으로 눈길이 닿는다. 이름하여 ‘여여與與의 창’. ‘있는 그대로의 창’이라는 뜻을 품은 조 신부의 유리화 작품이다. 작가는 하얀 도화지를 펼쳐 놓았을 뿐, 작품은 매 순간 하느님이 그려주신다. 어느 날은 바다가, 또 어떤 날은 하늘이, 땅이 작품의 주인공이 된다.
“제 그림은 아주 작은 세상에 지나지 않아요. 하나 거대한 자연을 끌어들이지요. 사람과 자연이 서로를 끌어안을 때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됩니다.” 창 너머 시간과 자연이 빚어놓은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잠시 멈춤, 다시 나를 만난다.
Gorgeous Island 22gb21, 117×91cm, 칠보·자개·아크릴, 김가빈
‘Gorgeous’ 아주 멋진, 섬을 향한 작가의 찬사다. 그림 속 풍경은 육지에서 바라보는 동검도이기도, 섬에서 바라보는 섬이기도 하다.
삶에
빛, 비추다
동검도라는 섬,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는가 보다. 조광호 신부는 20여 년간 작은 예배당 짓기를 꿈꿔왔다. 훗날 다리 건너, 드넓은 갯벌과 갈대숲, 나지막한 산과 들을 지나 동검도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단 30분 만에 ‘예서 꿈을 이루겠노라’ 마음먹었다. 미술 작가 김가빈(64)도 동검도를 ‘발견’하고는 주저 없이 터를 잡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도시 한복판에서 평생 살아온 그다. 강화도에 대한 기억은 학창 시절 미술 도구를 들고 시외버스에 무작정 몸을 실었던 때가 전부다. 강화도 남단 끝자락에 비밀스레 숨은 섬의 존재를 알 리 만무했다. 하지만 평생 대학과 학원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생계를 위해 창작 욕구를 억누르고 살아온 삶. ‘이제는, 오롯이 작가의 이름으로 서겠다’고 결심했을 때, 동검도를 만났다.
“동검도에서 예술가로서 삶의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섬의 자연과 심상이 제게 큰 영감을 주었지요.” 하늘과 바다, 보석처럼 점점이 박힌 섬, 밤이면 빛을 밝히고 매혹적인 실루엣을 드러내는 다리…. 두 눈 가득히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풍경들. 섬에 머무른 지 어느덧 20여 년이 지났지만, 작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조형의 이미지를 아직 다 쏟아내지 못했다. 그토록 섬은 아름답다
Fish Rhapsody Towards Utopia 22gb011, 50×50cm, 포슬린·24K 금·아크릴, 김가빈
섬 작업실 창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푸른 바다 깊숙이까지 닿는다.
그 안에서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는 ‘만물과 인연’이라는 심상을 담은 작가의 오브제다.
섬에
빛, 그리다
섬은 그리움이다. 닿는 순간 육지가 되고, 바다 건너 또 다른 섬이 펼쳐진다. 작가 김가빈에게
도 그렇다. 동검도 남단 작업실 너머로 보이는 영종도와 이름 모를 작은 섬들. 섬에 살고 섬을 그리지만 섬이 그립다.
사실 작가는 외롭기를 자처한다. 밤낮으로 작업실에 틀어박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산다. “‘작가로 서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묵묵히 나만의 길을 걸어왔어요. 스스로를 담금질할수록 작품 세계는 더 견고해졌지요.” 벽 한 면에 난 창이 섬과 소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느끼고 피고 지는 꽃을 바라보고 새소리 바람 소리를 듣는다. 나에게서 오롯이 섬으로 향한다. “창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끝없이 열려 있어요. 저 푸른 바다 깊숙이까지. 난 이 섬의 주인이에요.”
바닷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와 밤하늘의 별과 달, 금꽃나무, 빨간 열매, 들꽃과 곤충…. 섬의 심상에서 떠오른 ‘만물과 인연’을 담은 작가의 오브제다. 칠보, 금, 자개 등으로 빚어낸 조각 하나하나가 빛난다. 섬의 빛과 색으로.
“동검도엔 세상 모든 유채색과 무채색이 존재해요. 그 빛과 색은 계절마다 시간마다 다르게 빛나지요.”
별빛 쏟아지는 밤하늘도 푸르게 빛나다 어느 날은 보랏빛이 감돈다. 그 빛은 쌓이고 쌓여 검은빛을 드리우다 마침내 심연으로 빠져든다.
Morning Glory, 90×180cm, 백유리·투명 유약 소성, 2021, 조광호
싱그러운 보랏빛 꽃송이가 창문을 타고 올라와 아침을 깨운다.
그림이 자연인 듯 자연이 예술인 듯, ‘건축 아트 유리화’ 환경예술은 창 밖과 안의 세상을 하나로 잇는다.
세상에
빛, 차오르다
하늘빛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 햇살이 노을로 부서져 빛으로 내려앉는다. 하늘과 바다가 하나로 물든다. 섬이 가장 빛나는 건 ‘일몰의 순간’이라고, 바닷가 작은 예배당의 신부님은 말한다. ‘황홀한 일몰의 앤솔로지anthology.’ 앤솔로지는 ‘꽃을 모아놓은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안솔로기아anthologia에서 유래했다.
“붉은 노을이 바다에 닿아 다시 하늘을 물들이면, 순간 온세상이 꽃 속에 든 것처럼 찬란하게 빛납니다. 하지만 그 빛은 이내 감쪽같이 사라져, 잠자고 있던 우수憂愁를 깨어나게 합니다. 마치 새벽빛에 만상萬象이 눈을 뜨듯.”
“자연이 숨 쉬는 곳에서 사람도 숨을 트고,
한 점 우주의 먼지 위에서 온 우주를 가슴에 품습니다.”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건축 아트 유리화’는 빛나는 환경예술이다.
어쩌면 이 세상 삶은 가뭇없는 한 줄기 빛과 같다. 짧아서 아름답고 붙잡을 수 없기에 더 소중하다. 세상에 1분 1초도 같은 시간은 없다.
“무수히 빛나던 별도, 타오르던 태양도, 서정의 강을 유영하던 달도 언젠가는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이 참으로 귀하고 의미 있습니다. 45억 년간 지구는 쉼 없이 숨 쉬어왔습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영원합니다. 내면의 눈을 뜨고, 나 자신과 마주하세요.”
작은 섬, 작은 예배당이 품을 연 지 반년이 지났다. 그동안 무수한 사람이 이 안에 머무르며 기쁨과 위안을 느꼈다. 잊고 살던 아름다운 날들을 돌아보고, 숨겨두었던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냈다. 이 순간 바다가 갯벌로 스며들듯, 서서히 온전히 나에게로 다가간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이 차오른다. “하느님 앞에 당신은 눈부신 존재입니다.”
‘그냥 그대로 / 흠도 티도 가시지 않은 / 그 모습 그대로 / 아름다움 속 / 오, 눈부신 진리의 여여함이여 // 그냥 그대로 / 흠도 티도 가시지 않는 / 그 모습 그대로 / 당신도 하느님 앞에 눈부시구나’.
- 조광호 ‘여여함으로’
동검도 바닷가에 어둠이 덮인다. 햇빛이 사그라지고 노을도 스러졌지만, 마음속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빛을 가리면 ‘어둠’이 됩니다. 사실 어둠은 실체가 없습니다. 빛이 없는 것이 어둠이지요. 마음의 눈을 뜨면 하느님의 ‘빛’이 내 안으로 다가옵니다.” 섬의 밤이 깊어간다. 어둠이 짙어가고 세상에 여백을 드리울수록, 마음의 빛은 더 밝게 빛난다.
동검도 채플 & 갤러리 인천 강화군 길상면 동검리 245, 010-8876-2525
여여與與의 창, 150×150cm, 백유리·투명 유약·디지털 페인팅·소성, 2021, 조광호
‘여여與與의 창’. ‘있는 그대로의 창’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어느 날은 바다가, 하늘이 주인공이 된다.
작가는 프레임을 만들었을 뿐 작품은 매 순간 하느님이 그려주신다.
유리화·조광호 조광호 신부는 천주교 인천교구 사제이자 독일 뉘른베르크 조형예술대학교를 졸업하고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활동을 해온 예술가다. 은퇴 후 동검도에서 채플과 갤러리를 열고 문화예술 영성 사목과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오브제 회화·김가빈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54회의 개인전과 380여 회의 단체전을 열었다. 동검도 안에서 칠보·금·메탈·아크릴 등을 소재로 기존 장르를 벗어난 현대미술을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