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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모닝인천 Dec 26. 2022

진실한, 내 안의 빛

스케치에 비친 인천 | 굿모닝인천 12월, Vol. 348



RayonVert03, 17×12cm, Oil pastel on paper, 2020, 이하영

노을이 바다로 스며들면서 순간 비치는 ‘녹색광선’.

그 빛을 보면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던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고 전해진다.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그 섬세하고 따뜻한 손길을 따라 인천 사람의 삶으로 들어간다. 이번 호에는 햇살보다 노을이 아름다운 그곳, 정서진을 이하영 작가와 김숙경 시민 가족이 그렸다. 내 안에서 진실하고 서로를 향해 따스한 마음을 담아.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류창현·전재천 포토 디렉터



어둠 안에서 빛으로 물든 정서진 노을종


두 번 낳아준

어머니     

“힘들게 살지 마라.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아도 된단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하지만 작가 이하영(43)에게 삶은 자기 것이 아니었다.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났다. 가족이 먼저였다. 가난은 꿈도 가로막았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미대에 진학할 수는 없었다. 사실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학을 전공했지만 공공기관과 일반 기업에서 사무를 봤다. 동네 작은 마트나 빵집, 식당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에게 일은 하루하루를 지탱하는 밥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상은 시시때때로 혹독했다. 그러다 누구라도 다니고 싶어 할 외국계 IT 기업에서 일하게 됐다. 생계를 위해 적당히 머무르기를 택했다.

더 이상 삶이 고단하고 배고프지 않았지만, 행복한 건 아니었다. 그러다 어머니의 죽음을 맞닥뜨렸다. 그의 나이 마흔 즈음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라.’ 미련 없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길을 나섰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서 헤어나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으로 멀리 떠났다. 스페인 산티아고Santiago. 한 달 내내 혼자 걷고 또 걸었다. 그리워할 만큼 그리워하고 울 수 있을 만큼 눈물 흘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이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슬픔은 아무리 지우려 해도 잊히지 않아요. 떠난 엄마를 가슴에 품고서야 비로소 괜찮아졌습니다.”



정서진 ‘아라빛섬’ 앞에서, 이하영 작가
정서진 ‘아라빛섬’ 앞에서, 이하영 작가

풍력발전, 20×20cm, Oil pastel on paper, 2020, 최진영


노을, 33×34cm, Oil pastel on paper, 2020, 최다정


노을종, 20×20cm, Oil pastel on paper, 2020, 김숙경

김숙경 시민 가족이 그린 정서진 풍경. 인천서구문화재단의 ‘퍼블릭 드로잉 프로젝트: 녹색광선Le Rayon Vert’으로 진행됐다.


정서진에서 만난 다복한 김숙경 씨네 가족.엄마 김숙경, 둘째 최다정, 셋째 최진영(앞부터)



더없이 좋은

지금     

그 어떤 지난한 삶도 지나고 나면 먼 일처럼 느껴진다지만, 그에겐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돌이켜 보면 행복하기보다 없어서 힘들었던 기억이 더 많다. 그래도 고단했던 옛이야기를 이젠 웃으며 말할 수 있다.

“힘들게 살아온 시간만큼 이 순간이 고맙고 소중해요. 미술도 마찬가지예요. ‘만약 내가 뜻대로 미술을 전공했더라면 지금처럼 마음 다해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3년 전 인천으로 왔다. 그림책을 내고 사람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함께 전시회도 열었다. 삶의 새 길이 순조롭게 열렸다. 2020년 인천서구문화재단이 기획한 ‘퍼블릭 드로잉 프로젝트: 녹색광선Le Rayon Vert’은 가슴 한편에 추억으로 남아 있다. 서구 주민들과 정서진 풍경을 화폭에 담고 전시해 세상에 선보였다. 그 시간을 함께한 한 가족을 오늘 만난다.

코로나19로 온 세상이 잔뜩 움츠러든 때였다. 프로젝트는 시민들이 이 작가의 드로잉 영상을 집에서 보면서 ‘각자 다른 공간’에서 ‘모두 함께 그리는’ 비대면으로 진행했다. 얼굴을 마주하는 건 2년 만에 오늘이 처음이다.

“선생님이 어떤 분일까, 궁금했어요. 목소리를 듣고 손짓만 보며 상상한 얼굴을 이제야 실제로 보네요.” 작업에 참여한 시민 김숙경(54) 씨가 반가움에 겨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노을 지는 정서진 바닷가로

가족은 짧은 여행을 떠났다.

바다도 바라보는 마음도 붉게 붉게 물든다.

그날 빛나는 풍경과 가족의 추억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빛을 밝히며 또 다른 하루를 여는 정서진 노을종



가족이 함께하는

행복     

작가는 그림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 김숙경 씨의 작품에서는 강렬하고 화려한 색감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린 이도 활력이 넘친다.

서구 심곡동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라면 마을 사람들은 아마도 김 씨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는 셋째가 다니는 서곶중학교의 운영위부위원장이자 연희동주민자치회 ‘자라는 마을’과 인천서구지속가능발전협의회 도시경제분과의 분과장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살다 인천에 터를 내린 지 17년 됐다. 어쩌면 나고 자란 사람보다 인천을 더 아끼고 사랑한다. 동네 일이라면 어디든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는 그다.

“우리 셋째, 넷째의 고향인걸요. 발 딛고 살아갈수록 사랑하는 마음이 커져가요. 그 안에서 가족과 나누는 시간도 소중하고요.”

정서진 드로잉 프로젝트는 가족이 함께하는 작은 여정이었다. 해가 땅끝으로 떨어지기 전에 부부와 딸 셋, 아들 하나 온 가족이 정서진으로 달려갔다. 햇살이 바다를 어루만지다 세상을 온통 노을빛으로 물들인다. 수평선 사이로 보이는 섬들이 아스라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의 지는 해가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그 풍경을 눈으로 바라보다 뷰파인더 너머로 찰칵, 가슴에 새기었다. 그날의 빛나는 풍경과 가족의 추억은, 그대로 그림이 되었다.     

‘낮에는 너무 높고 눈부셔 볼 수 없던 당신을

이제야 내 눈높이로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너무 가까워 노을빛이 내 심장의 피가 됩니다.’

- 이어령 ‘정서진 노을 종소리’ 중에서



정서진 ‘아라빛섬’을 스케치하는 이하영 작가



정서진을 바라보는 시선은 모두 다르다. ‘낮에는 너무 높고 눈부셔 볼 수 없던 당신을 / 이제야 내 눈높이로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 너무 가까워 노을빛이 내 심장의 피가 됩니다.’ -이어령 ‘정서진 노을 종소리’ 중에서. 엄마는 노을종 너머로 지는 해를 캔버스에 곱게 새겨 넣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그리울 그날의 풍경을.

둘째 최다정(19) 양은 노을빛에 불그름히 물든 바다를 화폭에 담았다. 어둠이 깃들자 영종대교가 하나둘 불빛을 켜고 우아한 실루엣을 드러낸다. 눈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을 온전히 담을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셋째 최진영(15) 군은 풍력발전기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대한 풍차가 멀리서부터 시선을 빼앗아버렸다.

“가족이 함께 한곳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 섰던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 눈빛을 바라보고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맞추었던….”

본래 다복한 가정이다. 스무 살이 다 된 딸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여전히 더 즐겁다. 아들은 사이좋은 엄마와 누나들 사이에 유일한 남자라서 서운하단다. 아빠에게는 비밀. 웃음 띤 가족의 얼굴이 노을빛으로 불그레하게 빛난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아라뱃길
어둠 속에서 빛의 향연을 펼치는 정서진 노을종

정서진02, 20×20cm, Oil pastel on canvas, 2020, 이하영

작가는 정서진을 처음 화폭에 담은 후로, 햇살 좋은 날에도 궂은날에도 늘 정서진을 찾았다.

어떤 날이라도 다 좋지만, 비가 온 그다음 날의 노을이 가장 아름답다고.

그 모든 기억과 풍경은 고스란히 그림이 되었다.




‘녹색광선’

그 진실의 힘     

‘녹색광선.’ 햇살이 노을로 부서져 내리면 수평선이 잠시 녹색으로 물든다. 그 찰나의 순간, 내면 깊이 숨겨져 있던 진실이 드러난다는 말이 전해진다. 녹색 빛이 비치는 날은 흔치 않아 어쩌면 평생 못 볼 수도 있다. 그 빛은 결국 마음속에서 오롯이 빛난다.

녹색광선은 이하영 작가와 김숙경 씨 가족을 비롯한 시민들이 참여한 드로잉 프로그램의 이름이자 전시명으로, 쥘 베른Jules Verne의 동명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은 프랑스 영화 <녹색광선>(1986)에서 차용했다.

“누구에게나 힘든 시간은 있습니다. 하지만 해가 뜨고 지듯 자연스럽게 묵묵히 일상을 살아내다 보면 이겨낼 수 있어요. 정서진의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나만의 녹색광선을 찾고 마음속 진실을 들여다보세요.”

작가라 불리는 것이 아직은 낯선 마흔셋의 이하영. 그에게 삶은 한 번도 찬란하게 아름다운 적이 없었다. 하나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는 삶의 한가운데 자신을 두었다. 스스로 결핍을 지우고 꿈을 가로막던 장벽을 걷어냈다. 벗어나고 싶던 시절은 그대로 그림이 되었다. 누구보다 충실히 살아낸 순간순간이 빛나는 보석처럼 그림에 선명히 박혔다. 그렇게 오랜 꿈을 이뤄냈다.

아라빛섬을 지나 집으로 가는 길, 그의 고운 어깨에 노을빛이 한참을 머문다. 그동안 담아내고 앞으로 담아가야 할 수많은 시간. 그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건, 삶을 기억하고 가슴에 새기는 일이다. 진실한, 내 안의 빛을 켜고.     

정서진의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나만의 녹색광선을 찾고

마음속 진실을 들여다본다.

햇살이 바다를 어루만지다

세상을 온통 노을빛으로 물들인다.

반짝반짝, 내 안의

진실한 빛이 빛난다.



노을로 하나가 된 정서진 하늘과 바다

그림 이하영

동화작가 지도사이자 그림책 지도사로, 그림과 그림책 수업으로 다양한 사람과 소통한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 그림이고, 사람에겐 저마다 자신도 모르는 반짝이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발견하고 꺼내주는 일이 즐겁다. 독립 출판 그림 에세이 <걷는 마음>을 출간하기도 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돌아가신 엄마를 애도하는 그림 에세이로, 그때 마주한 풍경과 사람, 마음의 움직임을 글과 그림으로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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