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인천으로 | 굿모닝인천 1월 Vol.361
인천은 깊다. 최초, 최고가 공존한다. 그 역사는 인천 사람들이 살아낸 시간이기도 하다. 인천 곳곳에 깃든 저마다의 삶과 기억, 숨은 이야기를 찾아 기록한다. ‘인천에서 인천으로’는 우리가 모르고 있던 또 다른 인천의 삶, 시간, 공간 그리고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장봉도의 ‘욕쟁이 할머니’ 공정업 어르신이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사람인 줄 알았다. 남편과 딸을 가슴에 품고 세계 30여 나라 오지에 발자국을 찍은 뒤 깨달았다.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삶은 빛난다는 것을.
일흔넷, 안나푸르나에
오르다
“내가 우리나라 재벌 故이건희보다 더 부자야. 히말라야 안나
푸르나Annapurna에 올랐으니까.” 한겨울의 장봉도 바닷가, 매서운 바람 모 서리에서 진한 짠내가 묻어난다. 공정업 할머니는 2주 후면 이 섬을 떠 난다. 미지의 북아프리카 대륙으로 가 금빛 일렁이는 사하라 사막 위를 거닐 것이다.
그의 나이 일흔넷, 놀랄 일은 아니다. 이미 홀로 30여 나라에 발자국을 남 긴 그다. 여행이 아닌 고행길이었다. 인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세상 의 중심에서 뚝 떨어진 오지로 주저 없이 걸어 들어갔다. 네팔의 히말라야 산맥 안나푸르나 정상에도 올랐다. 육체가 아닌 영혼이 이끄는 대로, 열흘 을 걷고 걸은 끝에 높고 푸른 네팔 하늘 가까이에 닿았다.
할 수 있는 외국어는 오로지 ‘노 잉글리시’, 여행 자금은 마이너스 통장이 대 신한다. “기가 막히지? 나 같은 사람이 세계를 혼자 다니고. 하지만 이래 봬 도 내가 ‘글로벌 페이스’라 어디서든 통해.” 검게 그을린 주름투성이 얼굴에 하얗게 빛나는 안나푸르나가 겹쳐 지난다. 그는 세상 어디든 갈 수 있고,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가 사는 세상은 아프도록 남루했다. 젊은 시절, 먹고살기 위해 고향인 전 남 고흥을 떠나 소래포구로 왔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비포장도로를 달려 검 은 바다에 다다랐다. 새벽빛이 밝아오기 전부터 부둣가로 나가 해가 땅 밑 으로 떨어질 때까지 생선을 팔았다. 몸에 비릿한 바다 냄새가 스며들어 지 워지지 않았다. 남편은 일하지 않았다. 생선 비린내 배인 돈을 흥청망청 쓰 며 매일을 술로 지냈다. 기어이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했다. 두 자식만 아니 면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하나, 슬픔과 분노가 뒤엉켜 달려들지라도 어떻 게든 버티고 살아내야 했다. 어느 날 남편이 “장봉도에서 지주식支柱式 김 양 식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더라”라고 말했다. ‘섬으로 들어가 버리면, 남편 이 지긋지긋한 술을 끊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30여 년 전, 부부는 여덟 살, 열 살 난 아들딸 손을 붙잡고 바다를 건너 섬으로 흘러들어왔다.
사랑하는 존재와
시간의 상실
섬에서도 살아가는 일은 여전히 고단했다. 김 양식을 하겠다던 남편은 바다로 나가지 않았다. 술 만 마시면 아내에게 욕설을 퍼붓고 주먹을 휘둘렀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에도. 아내는 매일 밤 울면서 잠이 들었다. 아침에 퉁퉁 부은 눈을 떠서 보면 이불에 눈물 자국이 아프게 새겨져 있었다.
그럼에도 살아야만 했다. 어느덧 자식들이 집을 떠나 육지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다. 남부럽지 않게는 못 키 워도 공부는 가르쳐야 했다. 갯벌에 뒤엉켜 억척스럽 게 삶을 일궈냈다. 바다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지주를 세우고 발을 던지고 김을 맸다. 모진 바람과 시린 물 살을 견뎌낼수록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해졌다. “바다는 내 생명줄이야.” 바다가 있기에, 그도 오늘 여기 있다.
남편이 죽었다. 그날도 고된 노동으로 무거워진 몸을 간신히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섬에서 새사람 만들어 언젠가 는 고향으로 함께 돌아가려고 했는데… 먼저 가버렸 어. 결국 술도 영영 못 끊고 죽어버렸어.” 살아 있을 때 는 차라리 죽기를 바랐다. 그래서 가슴이 더 사무치게 아팠다.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무서운 거야. 끊어 내기가 힘들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잊히는 건 아니다. 그리움이 더 해갈 뿐이다. 가까스로 살아내고 있는데, 남편이 떠나 고 10년 후에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그를 집어삼켰다. 눈 뜨고 일어나는 매 순 간,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실감이 그 또한 소멸시켜 버렸다.
‘죽어야겠다.’ 세상 전부를 잃으니 한갓 인생살이쯤은 두렵지 않았다. 먼 길을 나섰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 는 낯선 땅에 자신을 덩그러니 떨어트려 놓고 스스로 를 괴롭혔다. 세상에서 점점 사그라들다 마침내 사라 져 버리기 위해.
모든 삶은
빛난다,
살아 있기에
갠지스강의 밤이 깊어 간다. 어둠이 짙어 갈수록 강가의 붉은 단 위로 불빛이 강렬히 쏟아져 내린다. ‘아르띠 뿌자Arti-Puja. 촛불로 어둠을 몰아내고 물과 꽃, 바람을 신에 게 바쳐 죽은 이의 영혼을 달래는 의식이다. 남편과 딸을 위해 기도하러 갠지스강이 흐 르는 인도 바라나시Varanasi로 갔다. 강가 화장터에는 죽은 자를 태우는 연기가 끝없이 피 어오르고, 산 자들은 바로 옆에서 죄를 사하기 위해 몸을 씻는다. 삶과 죽음 사이에 서서, 살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껏 내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불쌍한 존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물 한 모금 편히 못 마시고, 제 몸 누일 공간조차 없는데도 사람이 살고 있었어. 웃고 있었지. 순간 깨달았어. ‘나는 왜 운명을 이겨내려고만 했을까.’, ‘아, 나는 행복한 사람이구나.’ 죽으려 고 떠난 여행이 그를 숨 쉬게 했다.
욕쟁이 할머니, 혼자가 된 후로 바닷가에서 작은 식당을 꾸리면서 그리 불리게 됐다. 처음 엔 짓궂은 손님을 만나면 겁부터 나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용기 내어 거친 말 을 내뱉고 급기야 욕세례를 퍼붓기에 이르렀다. 그가 모진 말을 쏟아내는 건 자신을 지키 려는 것이지, 남에게 상처 주려는 게 아니다. 투박하지만 따뜻한 인정도 배어 있다. “난 육지에서 여행 오는 사람들이 다 행복한 줄로만 알았어. 한데 나보다 험한 일을 겪은 사 람도 많아. 말해주고 싶어. 사는 게 고통일지라도 행복은 온다고. 나도 시간이 한참 지나고 서야 알았어. 지금, 이 순간이 힘든 건, 살아 있기 때문이야. 이 또한 하늘이 준 선물이야.”
‘삶이 힘든 건, 네가 살아 있기에 / 행복을 아는 건, 네가 살아 있기에 / 불행을 느끼는 것도 네 가 살아 있기에 / 뜻대로 이루지 못하고, 희망을 잃는 것조차 네가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에’
- 공정업의 시 ‘살아 있기에’
그에게 삶은 단 한 번도 찬란하게 아름다운 적 없었다. 가난은 고달프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은 고통스럽게 슬펐다. 하나 번번이 주저앉던 그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건, 고통의 시간이다. 이제는 안다. 모든 삶은 빛난다는 것을. 지금 여기, 살아 있다는 이 유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