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le Ale May 31. 2020

한국형 좀비와 빨리빨리 문화

몇 년 전 개봉한 "부산행"은 한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흥행에 성공한 한국 좀비 영화이다. 좀비물은 외국에서는 수 없이 많은 영화와 시리즈가 제작되어 다소 식상한 장르인데, 한국은 유독 좀비물을 찾아보기 어려운 불모지였다. 그런 한국 영화계에서 좀비물로 성공한 첫 번째 영화라 할 수 있는 부산행은 참신한 아이디어로 흥행과 비평 모두 잡아냈고, 한국에서도 좀비물이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첫 사례가 되었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한국 드라마 시리즈 "킹덤"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좀비물로서 국제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해외 네티즌들은 킹덤의 등장인물들이 쓰고 나온 갓을 비롯한 다양한 모자에 열광하고 그 종류를 분석하는 글을 올리는 등, 대단한 관심을 끌었으니 좀비가 한국 문화를 국제적으로 알려주는 매개체가 된 셈이다. 킹덤은 국제적인 인기에 힘입어 곧 시즌2가 개봉할 예정인데, 시즌1을 시청한 팬들은 예고편을 보고 벌써부터 큰 기대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 제작된 좀비물은 외국의 좀비물과 비교해서 두드러지게 차별화된 특징이 있다. 좀비들이 엄청나게 빠르다는 점이다. 좀비물의 원조격인 서양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 좀비들은 어기적 어기적 느리게 걸어 다닌다. 여기에 비해 한국 좀비들은 엄청나게 빨리 뛰어다닌다. 좀비들의 그런 스피드가 서양 좀비물과 크게 차별화되고 더욱 흥미와 몰입도를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한국 좀비물을 시청한 해외 관객들이 흥미롭게 본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엄청나게 빠른 한국 좀비들은 느려 터진 서양 좀비들과 비교하여 확실하게 극의 긴장감을 훨씬 더 높여준다. 


도대체 왜 유독 한국의 좀비들은 그렇게 빠르게 뛰어다닐까 생각해보니, 우리의 빨리빨리 문화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무엇이건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답답하게 느껴지는 한국 문화를 충실히 반영한 듯, 한국은 좀비들도 빠르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한국에서 빠른 것이 어디 좀비뿐이겠는가. 모든 것이 빠르다. 인터넷 속도도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물건 배달도 빠르다. 주문한 물건을 새벽에 배송해주는 나라는 아마도 한국이 유일하지 싶다. 심지어 일본과의 무역분쟁이 일어나자 일본 소재의 국산화도 전광석화처럼 해내고 있으니, 모든 것이 너무 빨라서 과속방지턱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러니 한국 좀비가 다른 나라 좀비와 비교할 수 없이 빠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외국에서 생활해보면 한국이 얼마나 빠른 문화를 갖고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유럽의 국가들은 대부분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고 있는 서비스들이 매우 느리다. 집에 인터넷 연결을 신청하면 연결되는데 몇 개월이 걸릴 수도 있다. 심지어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도 느리게 나온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의 해외 생활 경험담을 보면, 느린 서비스에 적응하지 못해 복장이 터질 지경이 된 사람들의 경험담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우리 민족이 원래 그렇게 성급한 민족이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급격한 산업화를 겪고, 다른 나라들이 몇 세기에 걸쳐 천천히 이룩한 발전 단계를 불과 몇십 년 만에 압축해서 고도성장을 한 후유증으로 나타난 것이 빨리빨리 문화이다. 농경생활을 하던 과거 우리 조상들은 지금처럼 서두를 일이 없었고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생활했다. 지금은 약속시간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시간 약속에 늦는 사람은 책임감이 없는 사람처럼 매도되지만, 한때는 약속시간에 적당히 늦게 가는 것을 지칭하는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시간에 대한 개념이 관대했었다. 그런 만큼 일을 처리하는 속도도 느렸겠지만, 반면 생활의 여유가 있었다.


지금도 남미나 중동 등의 문화권에서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매우 관대하다. 일을 처리하는 속도도 매우 느리다. 사람들은 우리처럼 조급하지 않으며 따라서 마음도 여유롭다. 이런 문화권의 사람들과 업무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면 한국 사람은 답답해하고 좌절하겠지만, 사실 바람직한 것은 그런 여유로운 문화와 느긋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다.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것은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겠지만, 한국은 다른 선진 산업사회와 비교해봐도 너무 빠르고 여유가 부족하다. 오죽하면 좀비들조차 강박적으로 빨리 뛰어다니겠는가.


그동안 숨 가쁘게 살아왔으니 이제 여유를 갖고 숨도 돌려가며 주위를 살펴보고 마음을 추슬러야 할 시점이 아닐까. 조금 느린 서비스와 약간은 흐트러진 시간관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여유를 갖는 문화가 정착되기를 희망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19금 청춘드라마 인간사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