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원피스의 정치학
빨간 원피스가 화제다. 정작 국회 내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는데, 언론 등 장외 선수들이 오히려 시끄럽다. 화제를 억지로 만들어 내서라도 관심을 끌고 수익을 올리려는 사람들이 많아진 탓이다. 물론 황색 저널리즘이 한몫 단단히 하고 있는 것은 작금의 언론 환경에서 늘 있는 일상이니 그려려니 한다. 유시민이 국회 등원하며 빽바지 논란을 불러왔던 것에 비하면 그래도 국회 내에서는 별다른 제약이 없었다고 할 수 있으니 그나마 진보라면 진보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유시민은 결국 빽바지로 의원선서를 하지 못했고, 정장을 하고서야 선서를 할 수 있었는데 비해 빨간 원피스는 별다른 제지나 저항 없이 무사히 의정활동을 했으니 말이다.
패션은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표현하는 방법(Fashion is a simple way of saying complicated things). 필리핀 어느 옷가게 쇼윈도에서 봤던 문구인데, 빨간 원피스 사태(?)를 정확히 짚어낸 표현이다. 빨간 원피스의 원래 의도가 무엇인지는 당사자가 아니니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여러 미디어에서 쓸데없이 복잡하게 다루어주면서 의도와는 무관하게 다양한 해석과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권위주의 타파에서부터 페미니즘까지 빨간 원피스가 불러온 파장은 사뭇 다양하다. 어쨌거나 빨간 원피스는 화제의 중심에 서있고, 원래 달성하고자 했던 소기의 목적을 200% 달성했다고 하겠다.
국회의원의 의상이 어떻든, 의정활동만 제대로 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청바지를 입고 등원한들 뭐라고 할 사안이 아니다. 국회의원 본연의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청바지가 아니라 비키니를 입고 등원해도 무방하겠다. 임무를 수행하는데 편리하고 편안한 복장이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또한 옷차림 그 자체로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니 빨간 원피스는 분명 확실하게 메시지를 전달했고 그런 의미에서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략이라 하겠다.
커뮤니케이션은 언어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의사소통에 있어서 비언어적 요인이 오히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예컨대 눈빛이나 미묘한 표정 혹은 손동작과 같은 비언어적 수단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비중이 언어로 전달하는 메시지보다 훨씬 더 크다. 우리는 상대방이 “좋다”라고 말할 때 실은 정반대를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표정과 몸짓으로 간파하고 대응을 한다.
그렇게 중요한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수단 중 하나가 옷차림 즉 패션이다. 필리핀 쇼윈도의 문구처럼 패션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며 복잡한 콘셉트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빨간 원피스 자체는 옷일 뿐이지만 그 옷을 입은 사람이 누구이며 어느 장소 어떤 환경에서 입었느냐에 따라 함축적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젊은 여성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 입고 나타난 빨간 원피스는 그러므로 위의 광고 문구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해낸 경우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빨간 원피스가 어떤 메시지를 의도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원래 의도가 무엇이건 충분히 복잡한 의미를 전달하고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측면에서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뭘 하는지 모르는 존재감 없는 국회의원들이 사실 얼마나 많은가.
다만 짚고 싶은 것은 패션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때와 장소를 정확하게 가려야 하며 그 메시지를 뒷받침할 충분한 배경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장례식에 빨간 원피스를 입고 가겠다고 결정했다며 충분한 배경을 갖추고 실행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 부작용만 초래할 뿐이다. 매너리즘을 타파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 필요하고 효과적일 수 있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관습으로 굳어진 패션은 그럴만한 배경과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배경까지 숙지하고 세심하게 계획된 일탈적 패션은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될 수 있으나, 맥락을 잘못짚은 패션은 그저 유치한 치기일 뿐이다.
국회의 권위는 의정활동으로 세워지는 것이지 패션으로 세워지는 것은 아니기에 빨간 원피스이건 빽바지이건 탓할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은 맥락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어쨌거나 다양한 견해가 충돌하고 시끄럽게 투쟁하는 장이 국회이니, 진일보한 면모로 긍정적이라 하겠다. 배낭 메고 자전거로 등원하는 유럽 국가 의원들은 흔하던데, 반바지로 등원하는 국회의원을 볼 수 있으려나. 물론 단순히 튀려는 목적이 아니라 충분한 맥락을 가진 패션 센스를 가진 국회의원을 보고 싶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