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미래를 예견한 리들리 스콧의 암울한 걸작
영화를 평가할 때 기준은 개인차가 심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선호하는 장르와 스타일이 있고 그런 개인차에 따라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 개봉 당시 흥행에 철저하게 실패하고 심하게 평이 엇갈렸지만, 시간이 흐르며 오히려 호평을 받고 걸작의 반열에 오른 영화들이 있는데, 블레이드 러너가 그들 중 대표적인 영화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거듭해서 볼수록 새롭게 다가오는 영화이다. 마치 훌륭한 문학작품처럼.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는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를 원작으로 리들리 스콧이 감독했다. 소설과 영화 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원작 소설보다 영화가 오히려 더 문학적 깊이가 있다. 영화는 원작 소설을 충실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큰 줄거리만 가져와서 완전히 새로운 내용으로 거듭난다. 데커드나 레플리컨트 같은 주요 캐릭터들은 소설보다 영화에서 훨씬 더 입체적으로 표현되었고, 소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과 고뇌, 그리고 존재의 이유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탁월한 영상과 어우러져 소설보다 더 깊이 있는 작품이 되었다. 영화가 원작 소설을 뛰어넘은 매우 드문 케이스이다.
첫 개봉은 1982년에 했다. 영화의 배경은 개봉 당시로부터 37년 후의 미래인 2019년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으로 설정된 미래는 이미 현재가 되었다. 비록 영화가 그린 디스토피아와는 거리가 있지만, 영화에서 제시한 인공지능의 발달과 다른 여러 기술의 발전, 그리고 이에 따른 존재론적인 다양한 고민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공지능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각하고 생명에 집착하는 모습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로 우주 식민지의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레플리컨트라 불리는 인조인간은 외형적으로 인간과 똑같고 지능과 체력 모두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들을 제어할 안전장치로서 수명을 제한했는데, 레플리컨트는 4년밖에 살지 못한다. 식민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탈출한 6명의 레플리컨트들은 지구에 잠입하여 자신을 창조한 타이렐 사의 회장 타이렐 박사를 찾아가 생명을 연장하려 한다. 블레이드 러너는 이런 레플리컨트를 추적해서 "은퇴 retire"시키는 특수경찰을 지칭한다. 해리슨 포드가 연기한 블레이드 런너 데커드가 이들 6명을 추적해서 은퇴시키는 과정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1982년 개봉 당시 영화는 제작사의 간섭으로 인해 감독의 의도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게 편집되어 개봉했고,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참패했다. 1982년 극장판에서는 시종일관 데커드의 내레이션을 통해 내면의 심리상태를 설명하고 복잡한 상황을 정리한다. 그리고 중요한 몇몇 장면들이 삭제되어 감독이 의도한 결말과는 전혀 딴판인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결국 흥행해서 참패했다.
리들리 스콧은 시간이 흐른 후 원래 자신의 제작 의도대로 다시 편집한 감독판을 제작해서 재개봉한다. 감독판은 원래의 극장판과 극적인 차이가 있는데, 데커드의 정체성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극장판에서 데커드와 레이첼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엔딩을 암시하며 끝난다. 감독판에서 엔딩은 확연하게 달라지는데,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는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레플리컨트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데커드와 레이첼의 운명은 미스터리로 남겨진 채 영화는 끝난다.
감독판으로 재개봉한 블레이드 런너는 평단과 대중의 극찬을 받으며 걸작의 반열에 올라가게 된다. 이런저런 기관에서 가장 위대한 영화 목록을 꼽을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의 매력은 다면적이고 심오한 철학적 주제들을 논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고 지속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평하기 좋아하는 비평가와 인텔리들이 한 마디씩 덧붙일 수 있는 요인들이 풍부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SF영화 역사상 가장 화제를 불러온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존재에 대한 물음, 윤리, 환경, 계급 등 다양한 논쟁적인 주제들이 맛깔스럽게 버무려져 있기에 누구나 한 마디씩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고뇌를 하는 레플리컨트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고, 창조주로서 인간의 자격과 존재에 대해 한번쯤 뒤돌아보며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스타일이다. 영화가 풍기는 독특한 스타일. 어둡고 음울하고 추적추적 계속 비가 내리는 미래의 로스앤젤레스의 모습은, 리들리 스콧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독창적인 스타일로 완성되었다. 비와 안개로 탁하게 물든 길거리에서 빛을 발하는 네온사인과 신호등, 허공에 매달린 거대한 광고 스크린에 클로즈업되는 여인의 얼굴, 기업체의 로고들,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경찰차의 경광등 불빛의 이미지는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오롯이 블레이드 러너에서 창조해낸 미래 도시의 모습이다. 루저들만이 남아있는, 더할 수없이 복잡하고 너저분하고 혼란스럽고 황량한 뒷골목 분위기의 음울한 도시를 보며 관객은 묘하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군중 속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고립된 개인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군더더기 하나 없이 오로지 비주얼만으로 이렇게 표현해 냈다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반젤리스의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레플리컨트 여인인 조라가 도망치다 데커드의 총을 등에 맞고, 눈 내리는 쇼윈도를 깨며 넘어질 때 흐르는 반젤리스의 신시사이저 선율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처절함을 더할 나위 없이 쓸쓸하게 표현해준다. 화면과 음악이 극적으로 어울려 잊지 못할 명장면을 연출한다. 영화의 모든 구성 요소들이 이렇게 제대로 맞아떨어질 때, 이런 걸작이 탄생한다.
곧 블레이드 러너 속편이 개봉된다. 기대 반 우려 반이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종종 속편이 제작된다. 전편의 흥행에 힘입어 어느 정도 관객 동원이 보장되니 최소한 손해는 안 본다는 얄팍한 계산이 바탕에 깔려있다. 그 많은 속편은 극히 드문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함량 미달인 경우가 많다.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는데, 메가폰을 잡은 드니 빌뇌브 감독에 대한 신뢰가 기대치를 높이는데 한몫하고 있다. 물론 뚜껑은 열어봐야 알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