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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le Ale Sep 26. 2017

스타트렉 디스커버리를 위한 변명

스타트렉은 진화하고 있는가?

스타트렉이 미국에서 처음 방영된 것은 1966년이다. 그다지 큰 인기를 끌지 못해 3 시즌을 마치고 1969년 종영되었지만, 이후 신디케이드에서 방영되며 큰 인기를 끌었고 트레키라 불리는 컬트적 추종자를 낳았다. 많은 후속 시리즈와 영화가 제작되었고,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고 영향력 있는 TV 시리즈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마지막 스타트렉 시리즈인 엔터프라이즈가 2005년 종영하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최근 개봉한 스타트렉 영화가 3편 있긴 하지만, 기존 스타트렉과는 전혀 다른 타임라인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기에 엄밀하게 따지면 기존의 스타트렉 시리즈와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그렇기에 스타트렉 팬들이 기존 시리즈를 이어갈 새로운 시리즈에 거는 기대가 컸고,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Star Trek: Discovery"가 제작되어 드디어 첫 방영을 시작했다. 관심이 많았기에 첫회가 방영된 지금 많은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골수 스타트렉 팬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디스커버리에는 스타트렉 시리즈의 근본적인 철학과 세계관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견해의 차이가 있고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오리지널 스타트렉 시리즈가 가진 가장 큰 미덕 중 하나가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다. 미국 TV 시리즈 역사상 최초로 흑인 여성이 중요 캐릭터로 등장하였고, 동양인 역시 메인 캐릭터로 등장하였다. 스타트렉이 개척한 소수인종에 대한 새로운 표현 방식은 스타트렉이라는 TV 프로그램의 영향력과 의의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장점이자 특징이다. 


오리지널 시리즈가 제작 방영되던 시점은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시점인데,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과 반성, 그러니까 반전 운동이 한창 무르익을 때였고, 히피 문화가 발아하여 꽃을 피우던 시절이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되어 당시 다른 TV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개방적 태도와 매우 철학적 주제가 다루어진 시리즈가 스타트렉이었다. 그러한 특징으로 인해 스타트렉은 지금까지도 가장 중요한 TV 프로그램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수많은 열성적 팬들을 거느리게 된 배경이자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트레키 trekkie 혹은 트레커 trekker라 불리는 이들 열성적 팬들은 스타트렉 시리즈, 특히 새로운 시리즈에 가장 비판적인 사람들이기도 하다. 새로 방영된 디스커버리도 예외 없이 비판이 쏟아지고 있고,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열성적인 트레키일 것이다.



디스커버리는 스타트렉 시리즈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인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진보된 모습을 보여준다. 첫회에 등장한 함선 선저우호의 함장은 동양인 여성이다. 양자경이 분한 필리파 조지우 Philippa Georgiou 함장은 자신의 뿌리를 굳이 숨기지 않고 오히려 강조하기 위해 중국식 영어 억양으로 말한다. (보다 정확하게는 말레이시아 영어 억양이다. 양자경 본인이 말레이시아 화교 출신이다.) 함선의 이름도 중국 명칭인 선저우 Shenzou이다. 



함장이 동양인 여성인데, 부함장인 마이클 번햄Michael Burnham은 흑인 여성이다. 또한 함교의 주요 캐릭터인 과학 장교 사루 소령은 외계인이다. 그러니까 주요 배역 3명 중 미국 사회에서 가장 다수인 백인 남성은 없다. 이 정도의 구성이면 기존 어느 스타트렉 시리즈보다 다양성에 관한 한 훨씬 더 진보적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스타트렉의 팬이라면 당연히 두 손들어 환영해야 할 텐데, 역설적으로 가장 비판적이다. 



물론 시리즈가 진행되며 주 무대는 선저우호가 아니라 함선 디스커버리호가 될 터이고, 디스커버리의 함장은 백인 남성으로 확정되어 있기에 변화가 예상되기는 한다. 그러나 여전히 주인공은 흑인 여성인 마이클 번햄이고 이는 스타트렉 주인공 중 가장 진보한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동안 스타트렉 시리즈에서 주인공은 지속적으로 진보했다. 윌리엄 섀트너가 분한 오리지널 시리즈의 커크 함장에서, 두 번째 시리즈인 TNG에서는 같은 백인 남성이지만 극 중에서는 미국인이 아니라 프랑스 출신으로 설정된 장 뤽 피카드 함장으로 (피카드 함장 역을 맡은 배우는 엑스맨 시리즈로 유명한 패트릭 스튜어트이다.) 이어졌다가, 드디어 흑인 남성이 주인공인 DS9과, 여성이 주인공인 보이저 시리즈로 이어졌다. 


흑인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디스커버리는 이러한 진화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고, 가장 진보적인 발전을 이룬 것이기에 당연히 환영받을 일이다. 아무래도 중국인 시청자를 겨냥한 포석이겠지만 중국계 여성 함장이 핵심 캐릭터로 등장하는 것도 진일보한 구성이다. 따라서 등장인물의 구성으로 보면 디스커버리는 기존 스타트렉의 철학을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 차원 더 진화했다.


등장인물을 떠나서, 트레키가 디스커버리를 비판하는 주된 이유는 아마도 기존의 철학과 세계관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스타트렉의 기본 철학은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배워가는 과정을 통해, 인류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꾸준히 성장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시리즈들은 그러한 철학에 비교적 충실했다. 하지만 디스커버리의 첫회에서는 그런 탐험가 정신을 보여주기보다는, 화려한 액션을 통한 볼거리와 박진감을 강조한 듯 보인다. 이런 점이 트레키들에게는 당연히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스타트렉은 과거의 철학에 충실한 새로운 시리즈로 귀환할 수 있을까? 아마도 어려울 것이고 일부 트레키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향후 제작될 스타트렉은 과거의 전통에서 상당히 벗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스타트렉의 전통이 세워질 당시의 환경과 지금의 환경이 너무 달라졌다. 제한된 채널밖에 존재하지 않던 아날로그적 환경에서, 급변하는 디지털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고, 당연히 이런 환경은 시리즈의 내용에 반영되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60년대에 존재하던 혼란과 억압, 전쟁, 그리고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인류가 고결한 존재로 거듭나게 되며, 다양성에 대한 열린 사고와 포용력으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다는 개념은, 당시에는 설득력 있는 희망이었을지 몰라도, 지금 현시점에서 본다면 비현실적이다. 너무나 이상적인 희망이고, 그런 낭만적 이상은 신자유주의 광풍이 한바탕 몰아치고 난 이후의 기묘하고 척박한 환경에 서 있는 21세기 초반의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순진한 환상일 뿐이다.


21세기 사람들이 그려보는 23세기는 더 이상 그런 유토피아가 아니다. 과거에 희망했던 장밋빛 미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60년대 사람들이 유토피아로 생각했을 21세기 현시점에서, 여전히 인류는 전쟁과 범죄와 온갖 불평등과 야만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럴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한때 달성했던 진보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기에 디스커버리에서 설정한 23세기는 보다 더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21세기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춰서. 물론 인류는 진보하여 온갖 발전을 이루고 심우주를 탐험하고 다니지만, 여전히 전쟁을 치르고 있고, 소소한 관계에서 갈등하며, 차별과 문화적 몰이해가 존재한다. 기존의 스타트렉 시리즈가 그린 고결한 인류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기존 스타트렉 시리즈의 가치관이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고 시청자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기에, 스타트렉의 리부트 시리즈 3편, 즉 스타트렉 비기닝, 스타트렉 다크니스, 스타트렉 비욘드는 아예 기존의 타임라인에서 벗어나 블록버스터 흥행 영화를 천명하고 제작되었다. 리부트 시리즈의 성공은 당연히 새롭게 제작된 시리즈 디스커버리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바뀐 환경에 따른 흥행 공식을 반영하지 않을 수없다. 이미 늙어버린 트레키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기보다는 새로운 팬을 확보하는 것이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다.


어쨌거나, 모든 것을 떠나서, 새로운 스타트렉 시리즈인 디스커버리는 성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예스이다. TV시리즈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비주얼과 스피디한 전개, 그리고 매력적인 주인공은 이미 성공을 담보하고 있다. 물론 첫회에서 보인 다소 어수선한 이야기 전개가 개선되고, 캐릭터들의 케미가 제대로 자리 잡고, 향후 전개될 에피소드들이 프리미어에서 보여준 수준을 계속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그렇다는 말이지만. 그리고 확실한 것은, 기존 트레키들은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늘어놓겠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시리즈를 끝까지 시청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스타트렉에 관한 다른 이야기들.

http://blog.naver.com/my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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