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머물다, 깊게 남는 것들
수많은 순간을 지나온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계절 속에서
어떤 말은 바람처럼 흩어지고
어떤 눈빛은 오래도록 가슴에 스민다
잠시 스쳤을 뿐인데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함께 걷지도 않았고,
손을 잡지도 않았지만
남기고 간 공기는
아직 따뜻하다
너와 나는
짧은 안부만 나눴을 뿐인데
그 한 문장이
내 하루를
조금 더 다정하게 만들었다
지나갔기에 아름답고
머물지 않았기에 오래 남는다
스쳐간다는 건
외면하는 게 아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침묵 속에서
고요한 안녕을 건네는 일이다
나는 스쳐간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가볍게 사랑한 적은 없다
"처음부터 이 책은
‘스쳐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생각보다 오래 가슴에 남고,
어떤 눈빛은
말보다 먼저 위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루라는 골목을 돌아 나가며
무수한 존재와 마주칩니다.
다정한 인사 없이, 이름도 남기지 않고
그냥 스쳐가는 사이일지라도
그 시간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때론 한 문장,
한 장면,
한숨처럼 흘러간 마음 하나가
몇 달 후의 나를
조용히 꺼내주기도 하니까요.
함께한 모든 기록은
속도를 잠시 늦춘 시간들이었습니다.
말을 아끼고, 감정을 밀어넣는 대신
잠시 멈춰 서서,
하루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연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서로를 스쳐갔습니다.
하지만 그 스침이 따뜻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는 인연이라 믿습니다.
살다 보면 다시 마주칠 수도,
영영 멀어질 수도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쳐간다는 건,
가볍게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그 순간을 제대로 바라봤다는 증거이니까요.
당신의 어느 하루에
작은 숨결 하나 얹어두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다음 계절에,
다음 골목에서—
우리, 또 다정히 스쳐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