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쓰기 53일차
퇴직을 하고 가장 먼저 시작했던 것은 블로그예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어요.
일단, 교직 기간 동안 제가 쌓은 업무적 경험이 누군가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고, 수업을 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요.
무엇보다 직업이 아니라, 취미로 수학을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이제 초등학생인 아이와 언젠가는 함께 고민하며 공부하는 부모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블로그에 교과에 대한 내용을 정리했었고, 제가 문제를 해결했던 방법들을 기록했으며, 성공에 대한 이야기와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게 되었지요.
블로그를 시작하던 초반만 하더라도 참 재미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거짓 공감에 조금씩 예민해지기 시작했어요.
교과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글에 대해서 자신의 블로그에 유입을 유도하는 의미 없는 답글과 광고성 답글에 조금씩 재미를 잃게 되었어요.
교과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재미있었어요.
문제는 그림을 표현하고, 그래프를 그리고 언어로 설명하는 내용을 문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지요.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을 잃게 되는 느낌을 얻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서 아이와 놀아주기라던가, 이제 막 제조업을 하게 된 저로서 이 일에 대한 전문성을 만들어야 할 필요도 있는데, 그보다는 블로그에 더욱 연연하게 되었지요.
경영을 위해서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공부도 필요했고, 방직과 관련한 지식 습득도 필요했으며, 사업 확장을 위한 공부도 필요했어요.
그런데 저는 과거 제 모습을 잃지 않기 위한다는 이유로 블로그에 더욱 집착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요. 이 무렵, ”뒤 돌아보면 돌이 된다 “는 말이 떠오른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생각의 흔적을 브런치에 작성했었지요.
아무튼 저는 블로그를 이유로 계속 뒤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시간은 한정적인데, 그 한정적인 시간에 미래에 대한 준비보다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휘발되지 않게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블로그에 글 쓰는 횟수가 줄어들고, 브런치에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어요.
조금씩 조금씩 말이지요.
소제목에 나온 것처럼 어느덧 브런치에 글을 쓴 것이 벌써 53일이 되어가고 있어요.
어떤 변화가 왔을까요?
관리하지 않은 블로그의 유입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고, 계속 쓰는 브런치의 유입은 그렇게 의미 있는 변화가 보이지 않지요.
그래도 유의미한 차이를 찾으라고 한다면,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전보다는 제 이야기를 글로 편하게 하게 되었다는 것에 있는 것 같아요.
브런치를 선호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블로그보다는 광고가 없으며, 블로그보다는 편하게 글을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아닐까 싶어요. 의무적으로 사진을 골라야 하고, 오프라인에서 알고 지낸 지인을 의식하다 보니 글에 힘이 들어간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에, 브런치의 경우는 그냥 나와의 이야기에 대한 기록이며, 상념 속에서 떠돌고 있는 생각에 대한 정리된 나열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다 보니 하루를 마치는 시점에서 브런치에 글을 쓰고 나면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을 선물 받게 되더라고요.
오늘은 유한함은 갈등을 부른다는 이야기를 하려 했어요.
그런데 왜 블로그, 브런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블로그를 계속 작성하면 경제적 수익도 조금씩 들어오지만, 브런치의 경우는 그럴 가능성이 크게 보이지 않기에 마음을 잡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러면 블로그를 하지 왜?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지요. 물론, 블로그와 브런치 모두를 하는 방법도 있어요.
그렇지만, 고민의 이유는 시간의 유한함이에요.
만약 제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가 없다면 고민의 거리도 아닐 거예요. 그렇지만, 시간은 유한하고 그 유한한 시간을 어떤 가치를 위해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서는 분명 갈등하게 되지요.
최근에 닐 셔터먼의 <수확자>라는 SF소설을 읽고 있어요. 이전 브런치에도 간단하게 소개했었는데요, 기술의 발전으로 죽음이 사라진 시대, 인공지능의 발달로 모든 유한한 자원이 모든 공간에 적소에 배치되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유한함에 대한 개념이 무의미해진 시대를 배경으로 이야기하고 있지요.
이런 유한의 상실은 인구의 무한한 증가를 가지고 오게 되었고, 때문에 ”수확자“라는 이름의 존재에 의해서 어느 날 갑작스럽게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어요.
유한함이 상실된 시대.
혹여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여도 인공지능은 사고와 동시에 가장 가까운 의료시설로 환자를 이송하며 수확자에 의한 죽음이 아닌 이상 모든 사람은 죽음의 강까지 갔다가 최신의 의료 기술로 인하여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책을 읽으며 죽음이 상실된 시대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되더라고요. 과연 우리에게 죽음이 없어진다면 어떨까요?
적어도 지금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할 확률이 높아지고, 지금의 행복이 영원할 확률이 높아지겠지요. 몇 번의 늙음과 회춘을 통해서 여러 삶을 살아갈 확률도 높아지고요.
인공지능의 적절한 자원의 활용은 노력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생계가 모두 보장되며, 안전과 삶의 질이 평균 이상으로 유지될 수 있지요.
과연, 지금 우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상당 부분의 유한함에서 오는 아쉬움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유한함으로 발생하는 갈등이 많아요.
조직은 합심하여 수익을 창출하고, 그 수익을 조직원이 분배하는 과정에서 계급에 의한, 직위에 의한 차이가 발생하고 갈등이 일어나지요.
사람과 사람의 갈등이 전부는 아니에요.
유한한 공간에 어떻게 물건을 축적하는지에 따라서 재고 관리의 효율성이 발생할 수 있고, 유한한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서 수익 발생에 영향을 줄 수 있지요.
유한한 공간에 어떻게 테이블을 배치하는가에 따라서 매장은 동시간에 수용 가능한 최대 고객 수를 예측할 수 있고, 식재료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보관하느냐에 따라서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요리의 종류가 달라지게 되지요.
유한한 시간의 활용 때문에 직장 동료가 일을 효율적으로 잘 처리하는지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고, 유한한 시간 때문에 직장 상사의 필요 없는 대화는 짜증을 유발하기도 하지요.
만약, 정말 만약 <수확자>에 나온 것처럼 최고의 인공지능이 모든 요소를 효율적으로 예측해서 적절하게 분배할 수 있다면, 그래서 모두에게 유한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사전에 소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유토피아를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 대한민국의 발전 원인은 사계절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봄과 여름은 괜찮지만, 겨울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사람들은 일 해야 했으며, 겨울을 준비해야 했었지요. 생존을 위해서 말이에요. 겨울을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 몸을 녹일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해야 했고, 식량을 축적할 필요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별의 아픔 때문에 우리는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죽음이 주는 상실 때문에 우리는 삶이 얼마나 귀한지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곤 하지요.
우리의 삶이 시간이라는 큰 틀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상, 우리는 어떤 형태이든 유한함과 마주하는 삶을 살아야 해요.
결코,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기는 힘들지요.
유한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어디서는 아쉬움을 느끼고, 아련함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그런 유한함이 주는 갈등도 때로는 내가 감당해야 하는 삶의 일부라는 생각을 해 봤고요.
유한함이 주는 갈등을 외면하고 살아가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아요. 조금 더 지혜롭게 그것을 마주하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지금 내가 마주한 유한함에서 오는 갈등을 내가 벗어난다 하여도 그것은 어떻게든 다른 형태로 내 삶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차라리.
지금의 기회에 유한함이 주는 갈등에 조금은 편안 마음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 봤어요.
결국, 내 마음이 평안한 게 우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