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쓰기 59일차
국민학교, 그러니까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제 꿈은 서점 주인이었습니다.
그때는 책이 좋았으니까요.
지금처럼 대형 서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요.
집에서 30분 정도 걸어서 나가면 있는 서점에서 1달에 1번 소설책 하나와 월간 만화책 하나를 구입해서 봤었어요. 아마, 지금 돌아봐도 개인적으로 어머니께서 제게 해 주셨던 최고의 교육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때는 조용한 서점에서 책을 읽으며 손님을 반기는 사장님이 너무 부러웠어요. 원하는 책을 읽고, 손님이 오면 책을 판매하고, 그렇지 않으면 책을 읽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지요.
중학교를 졸업하는 순간까지도 꿈은 서점 주인이었어요. 아니, 하나 더 늘어났군요. 도서 대여점 사장님이요. 책을 구입하는 것보다 적은 비용으로 만화책을 빌려서 본다는 게 너무 좋았지요. 여러 종류의 소설도 마음에 들었고 말이지요. 아마 그때 동네 도서관이 지금처럼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면 아마 사서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사서라는 직업군을 알게 된 것은 제가 교직에 있으면서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서 선생님을 만난고 나서야 그런 전공과 직업군이 있음을 알게 되었지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진로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서 교사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학교든 학원이든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 말이지요.
학교 수학 선생님이 매력적이어서 그런 꿈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어요. 반대였지요. 적어도 그보다는 잘 가르치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적어도 그보다는 재미있게 수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제가 너무 교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남중, 남고를 나왔던 제가 만난 수학 선생님은 분필보다 몽둥이를 많이 들었고, 알아보기 힘든 필기체와 자신의 책만 보는 수업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적어도 제가 교사가 된다면 아이들과 눈을 더 마주치고,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아이들과 농담도 할 수 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리고, 문제 풀이만 칠판에 가득 적는 교사가 아니라, 자신이 아는 지식을 판서로 그저 자랑하는 교사가 아니라 아이들이 알아가는 즐거움을 얻게 하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갖게 되었지요.
첫 교직은 시간강사였어요.
말이 시간강사였지, 아침에 출근해서 정규수업에 참여하고, 방과 후 수업을 하고, 야간 심화 수업도 했었지요.
제겐 기회였어요. 한 걸음 뒤에서 “진짜”선생님들은 어떻게 일하는지 보고 배우는 기회였지요.
정규수업에서는 학업 수준이 매우 부족한 학생들을 관리하고, 방과 후에서는 일반 학급에서 수업을 했으며, 야간 수업에서는 상위권 학생들을 지도했어요.
수업이 정말 즐거웠어요.
적어도, 학창 시절 제가 목표하던 것은 이룬 것 같았어요.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고,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기초, 기본, 심화의 설명 방법을 만들었어요. 아이들이 알아가는 즐거움을 느끼는 표정을 보는 게 너무 즐거웠지요.
1년의 강사를 하고 학교를 옮겨야 했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정교사가 되기 위해서 학교에서 일정 금액을 요구했었거든요. 그렇지만 저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요.
그런 떳떳하지 않은 방법으로 교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거든요.
예술계 고등학교에서 다음 교직을 보냈어요.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서, 이공계열로 대학에 진학하고 교직을 했던 제게 예술계 고등학교는 새로운 세상이었지요.
음악, 미술, 체육이 중요과목이고 국어, 영어, 수학과 같은 과목이 비중요과목으로 인식되었고, 그중에서 수학은 비중요 과목 중에서도 비중요 과목이었어요.
그럼에도 아이들은 제 수업을 즐겁게 들어줬어요.
교사로 있었던 모든 순간에서 아이들과의 추억은 행복으로 가득하지만, 이때의 추억이 이후 교직에서도 큰 힘이 되었지요.
예술계 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면서 교육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음악으로, 미술로, 무용으로, 각자의 악기로 대학을 진학하는 아이들에게, 학업 성적보다 전공에 대한 역량이 높이 평가받는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강압적인 교사의 권위보다 공부의 필요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고, 그 이유는 일단 나부터 설득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만약 제 삶에 예술계 고등학교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저는 여전히 좁은 세상을 살고 있는 어른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때 만난 아이들로 인해서 내가 살아가던 세상의 다른 영역에 내가 모르고 지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아쉽게도 저는 소심한 교사였어요.
수업에서 소심하다는 것은 아니에요.
누구보다 수업시간에 아이들과 소통했지요. 수업도 하고, 함께 농담도 하고, 웃고 떠들다가도 해야 할 때는 진지하게 집중도 하고 말이지요.
수업시간, 교실에서는 그렇게 아이들과 가깝게 지냈지만, 학년이 바뀌고, 아이들이 졸업을 하고 나서는 가까움에 대해서 전혀 표현하지 않는 소심한 교사였어요.
나름의 이유는 있었어요.
최대한 많은 아이들을 비슷한 애정으로 사랑하자는 가치관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함께 수업을 하던 A학생과 B학생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저는 수업을 하면서 A학생과 정서적으로 가깝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어요. A학생이 수업 도우미를 했다거나, 제 수업에서 발표를 많이 했다거나 등등의 이유로 말이지요. 아이들과 제가 학년이 바뀌고 여전히 제가 A학생에게 친분을 표현한다면, B학생의 기준에서는 본인도 제 수업을 듣고 저와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A학생만 편애한다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을 느낄 수도 있지요.
또는 A학생의 경우 사회적 관계에서 제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학년이 바뀐 이후에도 제가 친분을 표현하는 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요.
이런 혹시나 하는 상황들에 대한 자기 방어적 수단으로 저는 아이들에게 먼저 연락을 하거나 아는 척을 잘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졸업 이후에 연락이 오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선생님과 제자이기보다는 과거의 공통된 추억과 공통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나이 차이가 많은 인연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당시 저는 아이들이 공부하다가 모르면 언제든 물어보라는 의미에서 연락처를 공개하곤 했어요. 그러다 보니 아직도 많은 아이들이 SNS로 연결이 되어 있지요. 물론, 직접 인사를 하거나 안부를 나누지는 않지만, SNS를 통해서 종종 소식을 접하게 되지요.
예술계 고등학교에서 인문계 교등학교로 옮겨야 했어요.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제가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사권을 가진 관리자가 다른 학교로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마음이 쓰이지는 않았어요. 교사라는 직분에 있으면서 제가 가진 에너지를 아이들에게 집중하지 않고 취해서 살아간다는 것에 저는 공감하기가 힘들었거든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진짜 수학 선생님이 되었어요. 힘들었던 것은 예술계 고등학교에 있으면서 수학교사보다는 업무 교사가 되어 있었고,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진짜 수학 선생님이 되어야 했었지요.
그래서 수업 준비를 더 많이 했어요.
그리고 저만의 방법을 만들려 노력했지요.
모든 수업에 빔프로젝터를 활용했어요.
책을 들고 수업하지 않았지요. 그래야 아이들을 보니까요. 수업 내용을 프레젠테이션으로 준비하고 필요한 내용을 판서하면서 아이들을 보면서 설명했어요.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수업했지요.
컬투쇼를 공부하듯 들었어요.
수학이라는 과목이 소수의 몇몇에게는 흥미로워도 다수의 몇몇에게는 어려운 과목이었기에, 수업 중에 환기를 시킬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했지요.
덕분에 아이들에게는 “썰마왕”이라는 별명도 붙었어요.
아이들이 수업을 하다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면, 아이들에게 주제어를 말하라고 하고 저는 해당 주제어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풀었지요.
웃음이 있고, 의미가 있는 수업을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게 이루어진 것 같았어요.
수업이 즐거웠지요. 정말 즐거웠어요.
어려운 개념을 어떻게 아이들에게 풀어서 이야기할까에 대한 고민의 과정은 힘들었어도, 매일매일 수업을 프레젠테이션으로 준비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어도, 수업을 듣고 아이들이 무엇인가 깨닫게 되는 표정의 변화를 보는 순간의 기쁨을 보는 것이 아마 교사가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말이지요.
아이러니는
수업이 즐거워지면서 수업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학교에서는 제게 많은 책임을 부여하기 시작했어요.
교육청에 출장을 가야 하는 일이 생기고, 교육기관 컨설팅에 참여해야 했으며, 학교 발전을 위한 다양한 위원회에 운영위원으로 이름을 넣기 시작했어요.
주어진 일을 빨리 처리하면 그만큼의 수업 준비 시간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일을 빨리 처리하면 그만큼의 새로운 일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업무에 회의를 느끼던 시점에 소외되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수업시간에 수업을 잘 듣는 아이가 참 이쁘게 보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데 열심히 듣는 아이들이 그렇게 고맙게 느껴지더라고요.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말인데 1시간을, 한 학기를, 일 년의 시간을 그렇게 인내하고 앉아서 들어준다는 것에서 고마움을 넘어서는 감정들이 마음에서 일어나더라고요.
그런데 말이지요.
안타까운 것은 학교 교육과 사회가 소위 교실의 교육 활동에서 소외된 아이들을 향한 배려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었어요.
단순히 졸업에 의의를 두고, 생활에 의의를 두고 그들을 성인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교사로 계속 있게 된다면 그런 아이들을 위한 어떤 시도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요.
역시나 아이러니는.
그런 생각을 할 즈음에 만난 아이들과의 수업이 너무 즐거웠어요. 담임을 하는 기간도 즐거웠고요.
어쩌면, 아이들과 가장 행복한 기억을 끝으로 교직을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좋았던 학기를 끝으로 교직에서 나오게 되었어요.
역시나 저는 소심한 교사였기에, 아이들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제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하지도 않았지요.
혹여 아이들의 마음에 흔들림을 줄까 봐 걱정하는 것도 있었고, 더욱 중요한 각자의 삶에 집중하라는 의미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몇몇 아이들이 연락이 왔었어요.
만남도 이어가고 있지요.
그렇지만, 역시나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고 있어요.
혹여, 제 관심이 가장 바쁜 시기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부담을 줄까 봐 말이지요. 혹여 무심결에 연락하는 안부에 아이들이 죄책감을 느끼거나 연락드려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낄까 봐 말이지요.
교사는 아니지만, 저는 여전히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요. 언제 어디서 혹여 아이들과 마주하게 되더라도 제 삶이 아이들 앞에서 떳떳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아이들의 기억에 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가끔 궁금한 시기가 있어요. 결코 물어볼 수 없고 알 방법이 없는 궁금증이지요. 그냥 단지, 교직에 있던 시절 교원평가를 통해서 받은 무기명의 메시지, 특별한 날이면 받게 된 아이들의 글을 통해서 제 모습에 대해서 믿을 뿐이지요.
가끔씩, 연락처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봐요.
가끔씩, 교직에 있던 시절 아이들의 명렬을 보게 되지요.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겠지요?
부디 제가 그 아이들에게 행했던 부족함은 잊고 좋은 추억만 가지고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제 무지와 미성숙함으로 혹여 그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줬던 게 있다면 이후보다 좋은 인연으로 그것이 회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행복한 삶을 살아갔으면 한느 마음이 있어요. 스승의 날이 되면, 지난 시간을 기억하며 떠오르는 아이들 하나하나가 각자의 삶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기도를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