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세계를 만들면 얼마나 행복한지 알고 싶지 않니?

노다메 칸타빌레 최종악장

by Inclass

“일본”이라는 국가와 그렇게 가깝지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에 제2 외국어로 일본어를 지원했으나 가위바위보에 밀려서 독일어를 공부하게 되었고, 애국이라는 이름과 일제강점기에 대한 반감으로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무비판적 반대 심리가 있었다.


생계의 수단이 바뀌면서 생각보다 많은 부분에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흔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제조업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내가 일 하는 분야의 모든 제품은 일본에서 생산한 기계였고, 사용하는 공구도 대부분이 일본에서 만든 공구였다.


언젠가 국산 공구를 이용해서 기계를 분해하는데, 초기 조립 시에 너무 강하게 조여진 나사를 풀다가 국산 공구가 부러지면서 심하게 다칠뻔한 경험이 있었다. 반면, 일제 공구는 약 270도의 휘어짐이 있어도 철이 부러지지 않았고, 약 80%가 마모된 나사에도 그것의 기능을 온전하게 발휘하는 것을 보고는 공구의 완성도에서 어딘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계에 발생한 문제에 대하여 제조사와 소통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고, 일을 하면서 일본산 공구를 사용하면서 얻게 된 신뢰로 문득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내가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 정서에 대해서 조금씩 공부하게 되었다.


분명하게 이야기하지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알아가는 것과 무지함으로 일관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그리고 나는 알아가는 과정을 선택한 것이다.


시간적 여유가 많은 것이 아니어서 히라가나, 가타가나를 공부하기는 힘들었고, 시간이 되는 범위에서 일본 드라마나 미디어를 접하면서 언어에 대한 노출 빈도를 높여보려 했다.

그리고 고민 고민 하다가 선택하게 된 것이 <노다메 칸타빌레>라는 드라마였다.


처음에는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요소들에 거부감이 생겼다.

만화적 연출, 연기를 연기하는 배우의 느낌.

그렇지만, 에피소드를 보면서 악인이 존재하지 않는 설정과 상대를 다그치면서 성장을 유도하는 언어의 표현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드라마에서 노다메는 천재적인 피아노 연주가이지만,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우면서 당한 학대로 연주가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그렇지만, 대학 생활에서 만난 치아키라는 지휘자를 통해서 자신의 역량을 더욱 끌어올리게 되지만 스스로가 만든 벽을 넘어가지 못해서 힘들어하게 된다.

노다메의 역량을 알고 있는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슈트레제만은 그녀의 숨겨진 역량을 극대화하면서 어떤 분야의 정점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연주가로서 정점을 차지만 노다메는 자신의 해석으로 곡을 훌륭하게 소화한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학교를 그만두고 쉬고 있는데, 알고 지내던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갑작스럽게 학교에 선생님께서 코로나에 걸렸고, 강사를 모집하고 있는데 내 생각이 났으며, 여건이 된다면 며칠만 수업을 봐 달라는 것이었다.

기쁜 마음을 학교에 갔다.

내가 아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처음 가는 학교였고, 학기 중에 만난 아이들이었다.

아무리 아이들을 편하게 대한다고 하여도, 오랜 시간 있었던 학교에서, 오랜 시간 봤던 아이들을 보는 것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한 학교에서 오랜 시간 일 한다는 것은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학교의 시스템을 모두 알게 되어 자유롭게 여러 가지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선배들이 하는 일을 받아서 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하는 일을 받아서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시스템을 알아가고,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을 시스템이라는 틀 안에서 표현하려 노력하다 보니 아이들도, 나도, 학교도 모두가 이득을 보는 상황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시스템에 대한 이해의 과정은 어려웠지만, 그런 이해의 과정으로 인해서 나의 일이 더욱 자유로워졌음을 알게 되었다.


오랜 시간 학교에 있어서 그런지, “배움”이라는 주제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우리는 왜 배워야 하고, 그것의 필요성은 무엇이며,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얻게 된 깨달음의 일부는 우리는 항상 배워야 하고, 그러한 배움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조직에 들어가면 조직의 문화와 분위기, 흐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배움의 과정인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배움의 과정에서 불합리를 발견하고 그것이 마찰력으로 작용하여 배움의 속도를 늦춘다는 것을 모르게 된다. 그리고 마찰력은 어느덧 배움의 가속보다 큰 값이 되어 그가 취할 수 있는 세상의 폭의 한계값을 결정하게 된다.


직위는 능력과 비례한다.

부원은 자신의 직위에서 볼 수 있는 관점의 한계가 있고, 부장을 비롯하여 직분을 가진 사람들 또한 각자의 영역에서 볼 수 있는 관점의 한계가 있다.

생각하지 못했던 불합리와 갈등,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마찰력은 줄어들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이 지켜야 하는 신념은 또 다른 마찰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가진 사람만이 여기저기서 발생하는 갈등을 조절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그렇지 않은 현실도 존재한다는 게 안타깝기는 하지만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희망한다.

나 또한 자유를 희망한다.

자유로운 나만의 세상을 꿈꾼다.

어떻게 행동해도 누군가와 갈등이 발생하지 않으며, 어떻게 행동해도 나와 타인의 기쁨이 보장되며,

어떻게 행동해도 나와 타인에게 유익이 된다면,

그보다 진정한 자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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