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건 좋은 게 아니다.

어쩌면 좋을 수도.

by Inclass

이상하게도 선형적인 이야기 구조에 익숙하다.

지금의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마치 어떤 서사의 시작처럼 퇴직을 하게 된 이유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내 일을 생각하게 된 계기, 과정, 그러다가 공장 일을 하게 된 계기, 그리고 그 가운데 넘어지고 일어나고의 반복.


누구나 자신의 서사가 있다.

그리고 그 서사에서 본인은 옳은 사람이고, 정직하며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정말 옳고, 능력이 있다고 타인 또한 그렇게 인정하는지 아니면 본인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컴퓨터를 전공한 건 아니다. 스마트 기기에 익숙한 사람도 아니고, 어딘가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무엇인가를 시도하고 도전하며 성장하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미션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조금씩 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고 좋아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오만가지 일이 모이기 시작했다.


학교 홍보 사진을 찍어라. 온라인 학교를 만들어라. 기초 학력자를 위한 수업 콘텐츠를 만들어라. 가상전시회를 만들어라. 동아리 활동을 기획해라. 지역사회와 연계한 교과 활동을 만들어라. 연구부를 해라. 교무부를 해라. 등등.


연차가 쌓이면 일이 편하게 된다는 건 몇몇 선배들의 말이었고, 내 한정된 삶이 감당해야 하는 의무는 해가 지나면서 누적되고 내 삶의 영역을 계속 좀먹고 있었다.


쓰임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내게 일이 주어지고 중요한 일을 담당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갔지만 언제부터인가 누군가로 인해서 쓰임 받는 게 아니라 이용당한다는 생각에 문득 삶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그놈의 영광을 위해서 시간을 삥 뜯겨야 하는 건가?


그런 마음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할 즈음에 그만하겠다고, 마침표를 찍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이었지만, 정말 사랑하는 일이었지만, 그만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잠결에 시간을 확인하려 봤던 휴대전화에 새벽임을 알리는 시간 표시와 함께 부재중 전화 13통을 보고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예상하지 못한 긴급 상황이 발생했음에도 그것을 모르고 일찍 잠든 이유와 일찍 출근하겠다며 시간이 늦어 문자로 남긴다는 메시지를 전송하고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울리는 답문을 본 그날에 마음이 떠난 건지도 모르겠다.


책임감과 의무를 핑계로 가스라이팅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을 책임지고 나를 보호해 준다는 의무는 지키지 않은 그들에게서 말이다.


그래서 마침표를 찍었다.

가장 좋은 기억이 피어났던 날 그만하자고.


봄날의 벚꽃이 절정을 맞이하며 바람결에 꽃비가 내리는 풍경을 사진으로 남겨두는 것처럼, 좋은 기억이 가득한 순간, 그것이 더 어두운 기억으로 채워지기 전에 그만하자고 생각했다.


제조업을 하던 부모님의 일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게 좋다고 생각했다.

무능력한 상사에게 무지에서 나오는 쓴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부모의 쓴소리를 듣는 게 상대적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참았다.


막상 일을 시작하니 이 일도 쉽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제조업을 운영하기에 누구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물가는 올라갔는데, 제조원가는 낮아진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럼에도 그것을 수용하는 모습이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판매자가 없으면 공장은 멈춰야 했으니까.


결국 부모님을 설득해서 판매로 사업을 확장했다.

조직에서 일을 하면서 배웠던 기술이 활용되었다.

원재료를 활용해서 디자인하고, 제조하고, 상품화하고, 촬영을 하고, 상세페이지를 만들고 온라인에 판매했다. 가끔은 광고도 만들면서 나름의 마케팅을 고민했으며 트렌드에 대해서 고민하고 나름 분석하며 브랜드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했다.


무질서하게 관리되던 창고를 정리하고, 그 가운데 완성된 상품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공장 여기저기 버려진 공간을 정리하고 관리하며 활용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어갔다.


부모님 두 분 이서만 지내던 공간을 함께 활용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정리되고, 사용 가능한 물건과 그렇지 않은 물건을 빠르게 정리했다. 그래야 유통판매가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온라인 판매에 대한 개념이 익숙하지 않지만 배우면서, 공부하면서,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부모님의 눈에는 마치 그것이 내가 그동안 쌓은 역량으로 쉽게 어렵지 않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해야 할 일을 위해서 시간을 만들면 그만큼의 다른 일을 요청한다. 이후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고, 부모님께서 요청하는 일을 처리하고 다시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렇지만, 부모님은 모른다. 당연히 내가 잘 알고 그냥 쉽게 한다고 생각한다.


원래 사진을 좋아했으니, 상품 촬영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원래 컴퓨터를 만졌으니 상세페이지를 잘 만든다고 생각할 것이며, 원래 컴퓨터를 잘했으니 프로그램을 잘 다룬다고 생각하며, 원래 수학을 전공했으니 입출금에 대한 계산이 빠르다고 생각할 것이며, 원래 나무를 잘 자르고, 원래 못질을 잘하며, 원래 물류 관리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 쉽게 이게 필요하다. 이걸 해야 한다. 이걸 하면 좋겠다. 이걸 알아보고 이런 걸 사면 좋겠다라고 말 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

학교라는 조직에서 내가 하던 일도 누군가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 악의적으로 일을 시켰던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 누구지? 이런 거 기획 잘하는 사람이 누구지? 웹 프로그램 활용 잘하는 사람은? 모바일 기기 잘 다루는 사람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이런 일 할 만한 사람은? 빨리 처리해야 하는 일 앞에서 누가 그 일에 적합한 일인지 깊은 고민의 시간이 없을 경우 보통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게 된다. 어쩌면 그런 원리가 아니었을까?


안마의자 하면 장윤정의 코지마 안마의자를 떠올리는 것처럼, 급한 상황에서는 익숙한 게 가장 쉽고 빨리 생각나는 것처럼 말이다.


네이버에 물어봐. 쿠팡에서 주문하면 된다는 말처럼 말이다.


김대호 아나운서가 MBC를 퇴사했다는 이야기를 봤다. 어떤 방송국에서 누구누구 아나운서가 퇴사했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어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김대호 아나운서의 퇴사 이야기는 자주 보는 예능 프로그램 때문인지 아니면 내 경험 때문인지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 우리 방송국 예능에 누구 시키면 좋을까? 김대호 아나운서 잘하던데 시켜볼까? 이번 시상식에서 축하 공연 누가 좋을까? 김대호 아나운서 어때? 이번 행사 진행 누구 하지? 김대호 아나운서? 이번에 새롭게 하는 프로그램에 누구를 투입해 볼까? 김대호 아나운서?


많은 연장이 있어도 손에 익은 연장을 계속 사용하는 것처럼, 조직에서도 일 할 수 있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익숙한 사람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익숙함을 유지함에서 오는 위험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조직은 장기적인 성장이 어렵지만, 그런 익숙함의 위험성을 인지하는 조직은 유기적이며 일사불란한 조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김대호 아나운서는 퇴사를 결심했고, 그의 수고는 그의 가치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조직을 나오고 내 일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조직의 미션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내 모습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잘하는 건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용당하고, 쉼 없이 무엇인가 해야 했고, 희생당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지만. 지나고 보니 어쩌면 좋은 일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덕분에 내 능력은 향상되었고 덕분에 스스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얼마나 성장시킬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나의 조직을 만들게 되는 날을 상상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어떻게 유기적이며 일사불란한 조직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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