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다는 착각

같을 수도.

by Inclass

남들보다 조금 진보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노트에 필기할 때,

태블릿 PC에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고,

모두가 모니터 하나만 보고 있을 때,

두 개의 모니터로 업무를 보는 사람이 있으며,

글과 사진으로 기록을 남길 때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


보통 이렇게 한다는 생각을 조금 비틀어서 있었던 기술이지만 생각도 못 했던 기술로 해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동료 교사가 있었다.

나 또한 조금 다른 방법으로, 좋게 말하면 창의적인 시선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내 성향과 맞다는 느낌의 사람이었다.

나보다 연장자였지만 새로운 기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앞서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 또한 그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러던 그와 어떤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했었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방법으로 문제 해결에 접근했다.

그는 수용하지 못했다.

본인이 알고 있는 기술이 가장 앞서고 있다는 착각 때문인지, 내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고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가장 앞서고 있다는 생각에 자신보다 더 빠른 것은 수용하지 못하는 상황 같았다.


단순하게 그의 경우만 그런 게 아니다.

사실 자주 만나게 된다.


업계 최고라는 자만 때문에 무너지는 다양한 사례들 말이다.

자신이 이 분야에서 최고라는 생각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창의적인 해결법을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 말이다.


교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의학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런 장면을 상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내가 이 분야 최고 권위자인데 내 말이 맞지! 이건 이렇게 시술하는 게 맞는 거야!!”


그런 교만함 때문에 환자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경우 말이다.


교만이 사람을 죽인다는 표현은 특정 상황에서, 노골적으로 표현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그런 오류를 바탕으로 판단하고,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내 자녀니까 내가 잘 안다는 생각에 전문가의 조언을 무시하고, 내 몸이니까 내가 잘 안다는 생각에 역시나 전문가의 조언을 무시한다.

내 자녀에 대해서 내가 가장 잘 알고, 내 몸에 대해서 내가 가장 잘 안다는 교만함 때문에 지금 나의 선택과 판단이 올바른 결과로 가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나는 내 부모와 다른데.

나는 내 가족과 다르니까.

그런 생각에 기초한 판단이 결국은 자신 또한 어떤 부분에서 그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게 되는데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 말이다.


판단하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부모와 함께 일을 하고 있다. 거의 하루를 함께 생활하고, 7일 중에서 거의 6일을 함께 지내고 있다.


처음에는 그런 부정적인 사고방식과 판단에 기초한 대화법이 정말 싫었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부정적인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은 무리에 쉽게 섞이지 못했고, 타인을 쉽게 판단하는 사람 역시 조직에서 그렇게 환영받는 분위기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가족과의 일은 달랐다. 매 순간 판단 당하는 기분이었고, 부정적인 말만 쉼 없이 들어야 했었다.


물론, 이제는 조금은 이해가 간다.

무지함으로 살아온 인생에서 모든 상황과 외부에서 경험하는 자극에는 항상 비판과 분석, 의심이 앞서야 했었고, 경험을 통해 학습된 내용을 바탕으로 세상이라는 험지에서 가족이라는 작은 존재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유익함과 무익함에 대한 절대적 판단만을 앞세워야 했을 것이니 말이다.

어쩌면, 그런 삶의 습관이 지금의 행동을 만든 게 아니었을까?


이해는 하지만, 수용은 힘들다.

때문에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아이의 행동을 판단하지 않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느니 말을 줄이겠다고 생각했으며, 가능하면 이해하는 말과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그런 노력의 한 부분이 블로그나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지인과 만남을 갖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의식 중에 깨닫게 되었다.

나 또한 사람을 판단하고 있던 것이다.

결국 나 또한 비슷한 언어를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가 무엇일까? 나는 노력하고 있었는데.

무엇이 좋은 것이 아닌지 인지하고, 그렇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교만이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다르다.라고 스스로를 정의 내린 순간 이미 나는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응징하려는 군중을 예수님께서 목격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야기하셨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치라. “

아이러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돌을 던진 순간 죄가 만들어진다.


어쩌면 그런 논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온전하게 다른 사람은 없을 것이고, 스스로를 다르다고 순결하고 고결하다고 정의하는 순간 순결한 사람이 아니며 고결한 사람이 아니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학문을 정진한다는 말이 있다.

힘써서 노력하고 학문을 닦는 일이다.

나는 학문의 최고를 이뤘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진하는 행위는 멈추게 된다. 즉, 계속해서 노력하고 발전하여 어제보다 좋은 오늘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어쩌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어제보다 더 깊이 있는 내가 되기 위해서, 이 정도면 나도 좋은 사람이지. 이 정도면 성숙한 거지.처럼 자신의 상태를 완성형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발전하려 노력하는 모습으로 두는 것 말이다.


나는 다르다.라고 정의하는 게 아니라.

나도 같지만 노력해야지. 나도 같지만 좋아지도록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언젠가.

어떤 아이디어에 대해서 프로그램을 전공하는 제자에게 물어본 적 있었다. 아이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연구실에서 정말 많은 프로그램 관련 논의를 하지만 내 의견이 너무 참신하다며, 본인도 방법을 고민해 보겠다며 답을 줬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마치 내게 상어 같다는 말을 했다.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니, 살아있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움직이는 상어의 모습처럼 마치 내가 항상 어떤 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며 다양한 방면으로 성장하려는 어른처럼 느껴져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글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계속 움직이고, 성장하고 발전하는 상태가 말이다.


나 또한 다른 사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내 주변의 사람들과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들이 가진 장점도 내게 있을 것이며,

그들이 가진 단점도 내게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부모의 부정적 인식이 있을 것이고,

나 또한 부모가 가진 화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같음을 바탕으로 조금은 다르게 되어가려 노력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다.

같음도 수용하고, 다름을 위한 노력도 수용하면서 말이다. 결코 달라진 상황이 아니다.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니 말이다.


쉼 없이 움직이는 상어처럼.

나 또한 그렇게 쉼 없이 움직이는 사람으로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가족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