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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

어떤 방향을 보면서 살아가는가?

by Inclass

그 시절의 모든 부모가 그렇겠지만.

내 아이가 행복하게 살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어떤 가치나 기준 없이 그저 남들 하는 만큼, 남들 할 때, 남들 하는 정도의 기준으로 아이들을 키웠던 것 같다.

문제는 “남들 하는”이라는 모호한 기준인데, 지금의 말로 표현하자면 엄친아 정도?


엄마 친구 아들, 아빠 친구 아들은 뭘 했다더라. 어디에 취직을 했다더라. 성적이 얼마나 나왔다더라. 어떤 상을 받았다고 하더라. 어떤 대회에 나갔다고 하더라. 등등.


때문에, 부모의 자랑이 되고 싶은, 또는 부모가 자랑으로 삼고 싶은 아이들은 항상 보이지 않는 누군가라는 그때그때 바뀌는 기준과 비교당하며 항상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 강요받아야 했던 것 같다.


교사가 되고 만난 아이들 대부분도 그러했다.

아이가 아무리 인물이 좋아도 공부를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성격이 좋아도 상을 받지 못하면 그냥 그런 아이로 생각했고, 성적이 상위권이어도 1등이 아니면 그냥 조금 하는 정도로 아이를 평가했다.

아이 역시도 그러했다.

2등에서 3등으로 떨어져도 부족했고, 100점에서 90점이 되었다고 좌절해야 했으며, 상을 받지 못했다고 미래가 흔들린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부모의 관점은 그러했을 것이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해야지. 어떤 건 잘해야지. 남보다는 못하지 말아야지. 그래야 언젠가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지.

아이들을 상담하고 위로하면서, 어떻게든 부모의 관점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얻은 나의 결론은 그 정도였다.


나는 다를 수 있을까?

부모가 된 나는 내가 만났던 아이들의 부모와는 다르게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학교에서 나오고, 자영업을 하면서도 감사하게 졸업생들과의 자리를 종종 갖게 된다.

취업을 준비하는 아이, 취업이 된 아이, 아직은 학업을 이어가는 아이 등등.

사실, 어떤 아이를 만나더라도 평탄하고 쉽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힘들다.

공부는 해도 끝이 없으며, 공부가 끝난다고 취업이 보장되는 건 아니고, 취업을 했다고 해도 일이 안정적이라 말하기도 어려우며, 취업이 어렵다는 뉴스가 계속 나오는 가운데 과연 내가 일 할 자리는 있을까 염려하는 아이까지.


대한민국에서 학생으로, 수험생으로 살아가는 것도 쉽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청년으로 살아가는 것 역시 그렇게 쉽지는 않으며, 그렇다고 중년의 삶 또한 쉽고 평안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다.


과연.

이러한 여건 속에서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방향성을 말할 수 있을까?



언젠가 서울에서 사교육을 하는 후배를 만났다.

내가 학교에서 나왔다고 하던 시기에, 함께 학원을 하자고 이야기하던 동생이었고, 대치동에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동생이었다.


그 친구가 내게 성공적으로 이직을 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성공적인 이직이라.


그 말을 믿기로 했다. 하긴,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수학교육을 전공하고,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수학 교사로 있던 사람이 제조업을 시작했고, 도소매까지 확장했으니 나름 성공적인 이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는 부모님께서 하는 사업을 받아서 하는 것이니 가능했던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물론, 그 말에 대한 전적인 부정은 어렵지만 전적인 동의도 어렵다.

나는 이 일에서 시스템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수익이 크게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제조업 종사자가 줄어들고 있고, 정확한 커리큘럼이 없이 주먹구구로 하는 사업장이 대부분인 시점에서 일의 시스템을 구현하고 틀을 만드는 나로서는 어느 정도 성공적인 이직을 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내가 왜 이렇게 노력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해 본다.

과연 나는 지금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말이다.


..


제조업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부모님과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결코, 쉽지 않았다.

거의 10년을 두 분 이서만 일을 하셨다. 그렇다고 상황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물가는 오르는데, 10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납품가는 줄어들었으니 과연 성공적인 사업이라 할 수 있었겠는가?


분명.

보통의 생각으로 라면, 그만둬야 하는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왜 계속하셨을까?


결국. 내가 얻은 답은 “변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해 왔던 것이 제조업이었고, 이미 투자된 비용이 아까운 것도 있었으니, 결국은 큰 수익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는 것. 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은 단지 내 부모님만의 일은 아니었다.


교직을 그만두고 나오던 시점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그래도 젊으니까. 당신은 능력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지금까지 해 왔던 게 이거라서. 이제 와서 어디 갈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만기를 채워야지.처럼 말이다.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어쩔 수 없이 어제와 같은 오늘을 보내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보낸다.

지금까지 내가 그 일을 했으니.

지금까지 내가 그 일 말고는 해 본 적이 없으니.

그나마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언젠가 지하철 승객들에게 칫솔을 판매하면서 고시원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한다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방송에서 봤다.

젊은 시절, 작은 시골에서 천재라고 불려지며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의 유명한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지만, 계속해서 사법고시에 떨어지게 되었고, 결국은 그로 인해서 정신적인 병을 얻게 되어 가족과의 인연을 끊고 사법고시 공부만 계속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누구도 그에게 이 정도에서 그만하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한다는 것의 선택은 온전히 본인에게 있으니 말이다.



교직을 그만하겠다고 생각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이야기한다면.

변하고 싶었다.

평생 현실과 떨어진 교과서에 있는 수학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교과서에 있는 수학이 어떻게 삶에 적용되는지 경험하고 싶은 부분도 있었고, 내가 지도한 아이들이 살아가게 될 세상이라는 것의 일부를 경험하고 싶은 것도 있었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가 아니라, 그 밖에서 말이다.


그런 변화에 대한 욕심이 “그만하겠다.”라는 결정을 주게 되었던 것 같다.


학창 시절을 보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했던 수학을 가르친 사람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고, 때문에 제조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아직 완벽하다 할 수는 없으나, 어느 정도의 기계 정비와 수리는 할 수 있으니 나름 나는 성공적으로 변하고 적응하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겠다.


단순 제조업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온라인 유통을 시작했다.

역시나. 변화에 대한 추구였고, 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이제 내가 만든 상품을 온라인을 통해서 직접 고객에게 유통하고 있다. 나름. 브랜드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더욱 발전하고 변화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언젠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봤다.

이제 만들어지는 놀라운 기술과 많은 변화에 대해서 소개하는 강사에게 사회자가 물었다.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데,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는 게 좋을까요?”


강사의 말은 그러했다.

무엇이 바뀔지 보다는 바뀌지 않을 무엇을 찾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른 이유는.

오늘 내가 하는 이야기와 아이러니하게 맞기 때문이다.


바뀌지 않을 것을 찾고, 공부하여 그것을 바뀐 형태로 표현하는 것.

즉, 본질은 유지하되 표현의 방법은 시대에 맞게 바꿔가는 것.


이야기를 마무리하겠다.


그러면.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


정답이라고 할 수 없으나, 오늘의 생각으로 얻은 결론은 이것이다.


세상에서 바뀌지 않는 것에 관심과 애정을 두고, 바뀌는 것을 관찰하며 본질을 유지하되 충분히 변화할 수 있는 사람.


내가 지금까지 해 왔던 어떤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해야 하는 관성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해 왔던 일의 본질과 세상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변형하여 세상의 필요에 따라서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사람.


물론. 그것이 항상 성공으로 연결된 삶이 아닐 가능성도 있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주도권이 본인에게 있기에, 충분히 행복한 삶, 깊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래.

나는 네가. 부유하고 가난하고를 떠나서,

네 삶의 주도권을 가진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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