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입 다물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겠지만, 어떤 계획을 수행하려 하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하라고 지시를 내리면 하기가 싫어진다.
공부하려고 방에 들어가는데, 이제 공부해야 하지 않겠어?라는 말을 들음과 동시에 공부하고 싶은 의지가 싹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그게 그냥 잔소리라고 생각했다.
청소하려는데, 청소하라는 말.
씻으려는데, 씻으라는 말.
공부하려는데, 공부하라는 말.
해야 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하려 하는데 누군가 그것을 하라고 하면 이상하게 하기 싫어졌다.
처음에는 그게 단순히 반항심이라 생각했다.
삶의 여건이 부모님과 가깝지 않던 시기에는 잘 모르고 지냈다.
내가 어떻게 출근하는지, 내가 출근해서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고, 어떻게 일 처리를 하고 등등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잠깐씩 만나는 주말 모임에서도 그런 일을 하나하나 말 할 필요는 없었고, 설령 이야기 한다고 해도 잔소리만 듣게 되니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는 유난히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함께 일을 시작하고는 그렇지 않았다.
밥을 먹으면 양치질하라고 하고, 지인과 전화를 하면 무슨 전화를 그렇게 오래 하느냐 하고, 앉은 자세가 어떻다, 운전 습관이 어떻다 등등.
정말 숨 쉬기 힘들 정도의 잔소리가 따라다녔다.
10년이나 교사로 일 했던 아들이 얼마나 미덥지 못하면 양치질하는 것부터 말하는 톤과 행동 하나하나까지 그렇게 잔소리를 하는 것일까?
심지어 10년 넘는 무사고에 접촉사고 하나 없었던 내 운전을 보면서 흉터 가득한 차의 주인인 부모님은 뭘 그렇게 운전에 대한 잔소리를 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그냥 싫었다.
부모라는 존재의 잔소리가 싫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잔소리의 원인이 여전히 부모의 눈에 자신은 어리게 보인다는 고전적인 말에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긴.
태어난 그 순간부터 봤던 아이의 나이가 30이 넘고, 40이 넘어도 여전히 본인들의 눈에는 아이로 보일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런 관점이 어쩌면 내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생각도 했다.
물론, 그런 이해도 잔소리로 격분한 내 감정을 낮추지는 못했다.
더 깊이 생각했다. 더 많이 생각했고.
그리고 얻은 작은 결론은.
부모님이 보는 안목과 내 안목의 차이이다.
함께 지내다 보면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일을 마주한다. 그리고 문제 해결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항상 충돌이 발생한다.
충돌의 원인에 대한 고찰이 있었고, 그 고찰에 대한 답은 이것이었다.
나는.
전문가의 안목과 관점을 어느 정도 신뢰한다.
예를 들어서 내 건강의 문제에 대해서 2~3명의 의사가 비슷한 소견을 이야기하면 그들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보다 많은 공부를 한 사람이고, 그 분야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며,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들이 학습한 내용에 의거해서 결론을 도출했는데 비슷한 소견을 이야기한다면 그들이 맞다고 생각한다.
반면, 부모님은 다르다.
전문가라도 신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건강의 문제에 대해서 2~3명의 의사가 비슷한 소견을 이야기하였으나 그들이 도출한 결과가 본인이 예상한 것과 다르고 여전히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들이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는, 그들의 소견을 믿었으나 그들보다 정서적으로 가까운, 단, 가족보다는 정서적 거리감이 조금 있는 누군가가 의사의 소견과 반대되는 의견을 이야기하고 그 의견이 부모님의 의중과 약간의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의사의 소견을 불신한다.
아무리 그 의사가 서울대를 나왔다고 하더라도, 1년에 한 명 정도 갈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외국의 유명 대학을 나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분명, 내 부모의 관점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분들의 관점을 무조건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아무리 그들의 사회적 지휘와 권위가 높다 하더라도, 그들 또한 실수할 수 있으며, “나”라는 존재가 가진 특수성을 그들이 잠깐의 관찰로 판단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아주 낮은 값이지만, 어쩌면 그 낮은 가능성에 본인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해하기 힘들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해하기 힘들다고.
그렇지만.
자영업을 시작하면서 조금은 이해를 하게 되었다.
학교라는 조직에 있던 시기에는 그러했다.
문제를 마주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전의 사례를 찾아보거나 선배교사 또는 지인들에게 물어보면서 문제 해결을 위한 모범 답안을 찾아봤다.
나의 고민과 문제에 대한 접근도 중요하지만 그런 관점은 이전의 문제 해결 사례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논리적 추론 과정에는 내가 찾는 정보가 참이라는 가정과, 정보의 출처 역시나 참이라는 가정이 필요했고, 재미있게도 그런 문제 해결 방법 대부분이 올바른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자영업을 하면서는 달랐다.
조직이 아니었고, 개인이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소수의 지인들의 범위에서 정보 수집이 가능했고, 동종업계에 있는 사람은 동료보다는 경쟁상대라는 의식이 강했으며, 나와의 거래 관계에 있는 사람 역시 협업의 대상보다는 견제의 대상인 경우가 많았다.
글쎄. 어떤 일이냐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의 경우는 그런 사례가 많았다.
때문에, 평생을 제조업과 자영업을 하셨던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정보가 없었고, 기존 문제 해결 방법의 사례가 없었으니 모든 일을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찾아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계속된 의심과 대안의 마련은 필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전문가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가정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 피곤한 삶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런 습관이 가족에게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이며, 자식이 어떤 전문직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일을 했는지와 관계없이 틀릴 수 있다는 가정을 전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나쁜 것은 아닌데, 과하면 결코 좋은 게 아니다.
하긴. 이런 문제가 결코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상당수의 부모와 자녀가 비슷한 갈등을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자녀가 의과 대학 교수지만 자녀의 건강 관리에 대해서 잔소리하는 부모님.
자녀가 대기업 창업주이지만, 경영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모님.
자녀가 교사이지만, 아이들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모님.
자녀가 택시기사인데, 운전 습관에 대해서 잔소리하는 부모님.
사실.
훈수가 가장 쉽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런 훈수와 잔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세돌의 바둑을 보고도 훈수를 두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훈수는 자신의 역량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값이라는 생각도 한다.
이세돌은 다섯 수, 열 수 앞을 내다보며 지금의 바둑을 두지만, 훈수를 두는 사람들 대부분은 지금의 그 상황만을 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쉽게 훈수를 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안목이 짧고 아는 게 적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니, 짧은 고민의 결과물이 말로 표현되는 것을 가벼운 훈수라 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노파심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노파심. 혹시나 하지 않았을까, 염려하는 말에는 걱정으로 가장한 불신과 함께 자신이 뛰어나고 우월하다는 믿음이 기본적으로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까지 아는데, 너는 몰랐지? 그러니 너는 못했을걸?
어쩌면 그런 마음이 노파심을 만들고,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마음은 어쩌면 네가 비록 전문가라고 하지만 이 일을 바라보는 나의 통찰은 너보다 우위에 있다는 교만이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그런 자만은 자신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지표가 아닌, 오히려 자신의 짧은 안목과 깊이를 보여주는 폭이 될 수도 있다.
마치, 앞에서 이야기했던 쉽게 훈수 두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저마다의 생각이 있고, 저마다의 속도가 있는데, 자신의 속도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을 우선으로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훈수를 두게 되고, 노파심으로 말하게 된다.
워랜 버핏을 보면서 주식 투자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고, 빌게이츠를 보면서 코딩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근데 그거 알아? 컴퓨터 계속하면 전자파가 네 몸을 나쁘게 한다더라. 같은 말을 노파심에 하는 것처럼.
도움을 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그런 말은.
그렇지만, 하나 알아야 하는 것은.
그런 노파심이 언어로 표현되어 상대에게 전달되는 순간 내가 가진 지식의 폭과 깊이가, 나의 안목의 한계가 전달된다는 것을 알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노파심에 하는 말은.
내가 너보다 우위에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수준을 보여주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