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무엇을 하고 싶니?

“무엇”보다는 “어떤”에 대한 이야기.

by Inclass

아버지께서는 양말 공장을 하셨다.

그 시절 어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겠냐 하겠지만, 그래도 밥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그럼에도 형제가 많았기에 쉬운 삶은 아니었다고 들었다.

공부를 해서 공무원이 되었고, 직장 생활을 계기로 가정을 이루게 되었는데, 아무것도 없는 삶에서 급여만으로 안정적인 경제 환경을 만드는 건 어렵다는 생각을 하셨단다.


어떻게 배운 기술을 이용해서 양말공장을 시작하셨다.

공장을 운영하기 위해서 기술은 중요하지만 기술이 있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판로가 있어야 하고, 판로가 필요로 하는 생산을 채워야 하고, 생산을 위한 원재료의 수급이 필요하며, 적절한 기간에 적절한 가격의 원재료를 준비해서, 약속된 시간까지 완성품을 만들어서 납품을 해야 하며, 그 가운데 모든 것이 일에 연소되지 않게 적절한 수입의 틈도 만들어야 했다.

흔히 생각하기를 많이 일 하면 수익이 창출된다고 하지만, 그건 무지한 사람의 훈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먼저 나가는 돈과 나중에 나가는 돈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실질적인 입출과 기억 속의 모호함 속에서 벌어지는 오차가 내게 더하기가 아닌 마이너스로 적용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시작된 공장을 운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기술은 부족했고,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으며, 공장이라는 조직에 입을 모으고 있는 식솔들의 삶 또한 책임져야 했다. 그들의 삶을 책임진다는 것은 비록 내 주머니에 떨어지는 돈은 조금 부족하더라고, 한 달의 보상으로 주기로 약속한 대가는 치러야 한다는 의무감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장과 집이 한 건물에 있으니 당시 기억으로 부모님은 항상 집에 함께 있으니 좋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쉼 없이 일을 하셨는지 종종 깨닫곤 한다.


아침에도, 밤에도 우리 집에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 대의 기계가 각자의 일정한 속도로 작동하며 중간중간 들려오는 비프음이 기기의 오작동을 알려줬다.

상시로 기기를 살펴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유로 부모님 또한 그 자리를 지켰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잘 몰랐지만, 지금 기계를 돌리는 내 입장에서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바쁜 일이었는지 가끔 실감하곤 한다.


새해가 되었다.

그때는 가족의 구성원이었던 내가 어느덧 가장이 되었고, 새해의 첫 식사를 가족들과 둘러앉아 나누면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 가족이 어떤 삶을 살았으면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내 아이가 어떤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어린 시절 내 부모님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을 좋아하던 초등학생 시절에 서점을 하겠다고 생각했고, 그 꿈이 중학교에 가던 순간까지 반대하지 않으셨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을 생각하며 교사를 하겠다고 말했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고, 학원을 하겠다고 할 때에도 반대하지 않으셨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찬성도 하지 않았고, 적극적인 반대도 없었으며, 어쩌면 무관심하다고 느껴질 만큼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어렵게 학교에서 자리를 구하고 그 일이 내 잠을 줄이던 시기에도 그만하라고 말리지 않았고, 수업 때문이 아닌 늦은 시간까지의 연속된 회식으로 학교 생활에 회의를 느낄 때도 말리지 않았으며, 매일 80km 거리를 왕복으로 출퇴근하던 시기에도 그만하라고 말리지 않으셨다. 네가 하고 싶다면 해라. 그게 전부였다.

10년의 교직 끝에 그 일을 그만하겠다고 했을 시기에도 왜 더 참지 않고 그만하냐고 하지 않았고, 다른 무엇을 할 것이냐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약간의 의도는 있었겠다고 생각하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해 보겠다고 준비하던 시기에도 그 일을 말리지 않으셨다. 단지, 공장을 운영하기에 너무 힘들다는 내색을 보이셨고, 그런 힘겨움에 대한 이야기가 내게 가족을 생각하게 하였으며 이상을 꿈꾸며 가족의 희생을 강요하기보다는 현실을 생각하며 조금은 타협할 필요를 인지하게 해 줬을 뿐이었다.

내가 하려던 그 일을 말리지는 않았지만, 나 스스로 다시 결정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식탁에서 함께 아침을 먹으며 이제 9살이 되는 아이의 성장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문득 지나간 내 모습과 내 부모의 모습이 생각났다.


내 부모님은 내가 “무엇”이 되기보다는 “어떤”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게 아닐까?

무엇의 관점으로 이야기하자면, 학창 시절 학생이었던 나는 교사가 되었고, 지금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수학 선생이었고, 양말공장 공장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의 관점으로 이야기하자면, 나는 아이들과 소통하려 했으며, 수학을 도구로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으며, 아이들에게 더 좋은 미래를 이야기하고 싶었고, 변화 가능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고, 지금은 조금 더 삶에 대한 통찰을 가진 사람으로서 선하고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무엇이 명시적인 반면 어떤은 추상적이라는 단점이 있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무엇은 완성형이며 결과적이며 어떤은 진행형이라는 장점이 있다. 때문에 “어떤“으로 삶을 채운다는 것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한 노력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아침 식사를 나누며, 혼자 생각을 이어가다가 아이의 꿈을 물어보려던 생각을 거두었다. 마치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마치 아이가 바라는 목표의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말이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다듬어 본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질문을 자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아이에게 “어떤”에 대한 질문을 자주 해야겠다는 생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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